소설리스트

광자임해-24화 (24/210)

< -- 24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7

“신은 허통을 반대하옵니다.  첫째 존비(尊卑)의 등급을 엄격히 해야 하옵고, 둘째 선왕의 법을 지켜야 하오며, 셋째 이들을 등용하면 명분이 문란해지옵니다.”

영의정 이발의 발언에 잠시 침음한 이진이 좌상 성혼을 지적해 물었다.

“흐흠.......! 좌의정의 생각은 어떻소?”

“사람의 재능과 품성은 출생처의 귀천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등용하되, 청요직(淸要職)은 주지 말았으면 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청요직이라는 것은 삼사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높은 지위를 의미했다.

“좋소. 우상의 견해는?”

“저 역시 허통을 반대하옵니다. 그 이유는 영상대감과 같사옵니다.”

이산해가 반대 의견을 피력하고 나선 순간 한 사람이 급히 발언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주서로 참여한 송익필이 그였다.

“전하! 소신의 생각으로는.......”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말단 주서가 함부로.......”

대제학 이해수의 발언을 손으로 저지한 이진이 말했다.

“여기 있는 모두는 발언할 권한이 있소. 입을 막지 마오. 가주서는 하던 발언을 계속하시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송익필이 울먹이는 음성으로 자신의 맺힌 것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사인(士人)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이들 서자들이옵니다. 하니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장되고 있사옵니까. 이는 나라 전채로 보아도 큰 손실이오니, 이들에게 과거 응시의 기회를 주어 널리 인재를 구하시되, 좌상 대감의 말씀처럼 청요직은 허용하지 않는 게 좋겠사옵니다. 또한 취약한 나라의 살림살이를 위해서라도 80석 이상의 현미를 내는 자에 한해,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옵고, 모친이 양인 또는 천인이라고 해서 그 대대손손이 양인 또는 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 하옵니다. 하오니 서얼 자신의 일대(一代)만 업유(業儒), 업무(業武)라 하옵시고, 아들 대부터는 유학(幼學:사족(士族)으로 아직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 부르게 하옵소서.”

이를 받아 이진이 얼른 왕대비 박 씨에게 자문을 구했다.

“전하! 송 가주서의 말대로 행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이는 나라를 위해 실로 일찍이 행해야 할 법도가 아닌가 하옵니다.”

“.........”

이진의 물음에도 판단이 서질 않는지 아무런 답이 없는 왕대비였다. 여기서 왕대비의 공식적인 호칭으로 ‘전하’로 불리기도 했다.

“아녀자로서 무얼 알겠소이까 만은, 선왕의 법은 지켜야할 줄 아오.”

이어진 왕대비의 한 마디에 이진 이하 실망을 금지 못하는데,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희희낙락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고, 지난번에 수렴첨정을 그만둔다 할 때 얼른 받아들일 걸.’

괜히 형식적으로 사양했다가 후회막급인 이진이었다. 주상 이진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가운데 허봉이 다음 안건을 꺼냈다.

“무릉도 왜인들의 발호를 어찌 처리할 런지 논의했으면 좋겠사옵니다. 소직의 생각으로는 실태파악을 위한 경차관을 파견하는 것이 좋겠사옵나이다.”

“실태 파악보다는 공도정책과 해금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에 대해 논의해 주시오.”

“제 선왕들에 의해 섬을 비우게 하고 바다를 이용하지 못하게 함은, 온 백성들을 왜구 등의 피해로부터 구제하고자 함 이옵고, 또한 이 정책은 대국 명국에서도 지속적으로 시행해오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하니 이 정책은 계속 유지되어야 할 줄 아옵나이다.”

우의정 이산해의 발언에 이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국이 시행한다고 해서 우리라고 마냥 따하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삼면이 바다인 우리 조선에서는 바다를 이용하고 더 나아가 바다를 제패해야만 유수의 강국이 될 수 있을 것이오. 해서 과인은 바다를 이용한 사 무역까지 모두 허용했으면 좋겠소.”

“어찌 그리 말도 안 되는......... 게으른 자들이 어려운 농경을 피하여 모두 장사수단에 매달리지 않을까하여 천시하는 장사를, 바닷길까지 열어주신다 함은 천하지대본인 농사를 망치는 첩경이옵나이다.”

이산해의 말에 급히 반론을 제기하는 이진이었다.

“그게 그렇지 않소. 만백성들이 오로지 생업으로 농업에만 매달리다보니, 하나가 해도 될 일을 서넛이 매달리는 것은 보통이고, 또한 꾸물꾸물 말안장 하나를 얹는데도 한 시진을 노닥거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오. 이래가지고야 나라의 꼴이 뭐가 되겠소. 모두 게으름뱅이에 일정한 직업은 있되 과인은 이들을 잠재적 실업자로 부르고 싶소. 해서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상업은 물론 장인들도 많이 생겨나야 하고, 이들의 생계를 위해서 바닷길을 열어줌은 물론 상업도 물품세 등을 받고 장려한다면 왕실의 재정이 두 세배는 튼튼해질 것으로 과인은 내다보고 있소. 왕대비 마마의 현명한 판단을 바랍니다.”

“실로 왕실의 재정이 전하의 말대로 두세 배 불어나겠소?”

왕대비의 물음에 이진이 급해 답변을 했다.

“여부가 있사옵니까? 늦어도 5년 내에 두 배, 십 년 내로 세배는 왕실 재정이 불어나 많은 면에서 개혁을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첫째로 과인은 관리들의 녹봉을 현실화 해주고 싶사옵니다. 신이 사저에 있을 때 은밀히 내사해온 바에 의하면, 관리들이 위아래 할 것 없이 뇌물을 받는 것을 공공연히 행하고 있사옵니다. 이 액수가 봉미의 두 배이나, 나라의 녹을 넉넉히 주지 못하는 관계로, 알면서도 서로 눈감아주고 있는 것이 현 실태이옵니다. 또 아전들과 군의 실무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녹을 지급치 못하니, 그런 자들이 백성을 등쳐 생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사옵니다. 이 모든 적폐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과인이 제시한 상업과 광공업은 물론 바다 육지 할 것 없이, 사 무역 또한 전면적으로 해금(解禁)해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 왕대비 마마!”

“아녀자로서 짧은 소견 밖에 갖추지 못했지만 이는 주상의 견해가 옳은 것 같아요. 주상의 뜻대로 하세요.”

“전하! 통촉하여 주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왕대비마마!”

제 신하들이 뜻을 거둘 것을 청원하였으나, 왕대비 박 씨는 침묵으로 그들의 뜻을 간접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신들도 끈질겼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왕대비마마!”

“이는 실로 망국의 지름길이옵니다. 왕대비마마!”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패악이옵니다. 왕대비마마!”

어느 대신인지 모를 막말에 온순하기만 하던 왕대비 박 씨가 드디어 뿔이 났다.

“주렴 뒤에 앉혀놓고 아녀자의 소견이라고 따르지 않는다면, 본 비가 앉아 있을 필요가 없질 않은가요? 하고 근일 죽 주상을 지켜본 바로는, 비록 보령 유치하나 영특하시기가 짝이 없어요. 아녀자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으니, 이래저래 금일부로 본 전은 주렴을 걷으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왕대비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왕대비마마!”

그러나 벌써 주렴 뒤는 휑했다.

화가 난 이진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이렇게 이날의 회의는 파행으로 끝이 났다.

* * *

그날 오후.

왕대비 박 씨가 비록 왕실의 재정이 십 년 내로 폭증한다는 이진의 말에 허락을 했지만, 그렇게 녹록하기만 한 조정대신들이 아니었다. 이 대신들의 집단공격에 그로기 상태에 몰린 왕대비가 최후의 패를 꺼내들자, 당혹한 대신들도 이의 철회를 위해 우르르 통명전으로 몰려갔다.

내부 통신망으로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던 이진으로서는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심 아예 주렴을 걷기를 바라는 이진이었지만, 허례허식이 지배하는 유교사회에서 명분 축적을 위해서도 이진은 통명전으로 거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명전 섬돌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시위를 벌이는 대신들을 일별한 이진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주상전하 납시오!”

내관의 목소리가 전내에 울려 퍼지자 대왕대비를 모시는 시녀상궁이 얼른 문을 열어 이진을 맞아들였다.

“어서 오시옵소서, 주상전하!”

궁녀의 인사를 무표정하게 받은 이진은 곧 자리보전하고 있는 왕대비 박 씨 곁으로 다가갔다.

“어마마마! 많이 편찮으신지요? 어의를 들라 하겠습니다.”

“주상은 걱정할 것 없어요.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편치 않아 이러고 있는 거예요.”

“어마마마, 그만 노여움을 푸시고 .........”

“당치않아요. 대신들의 말이 노여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 어미가 보아도 주상이 영특한 것은 사실 이예요. 비록 보령 유치하시나 이 어미가 없어도 잘 해나갈 것을 믿기에 내린 결단이었어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대신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겁니다. 어마마마!”

“..........”

이진의 말에도 아무런 말이 없는 왕대비 박 씨였다.

“그만 노여움을 거두시죠. 어마마마!”

“조정대신들이 내 뜻에 따른다면 그럴 용의도 있소. 주상!”

의외로 뚝심이 있는 왕대비 박 씨였다.

평소 온순하던 사람이 한 번 화가 나면 무섭듯이,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인 박 씨가 한 번 고집을 부리자, 그 뒤끝이 대단했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 한 절대 물러설 수 없다고 강경하고 버티고 나선 것이다.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이진이었지만 이진은 곧 수행한 내관을 통해 모후의 뜻을 대신들에게 전하도록 했다. 곧 왕대비 박 씨의 의중을 알게 된 대신들 간의 구수회의가 즉석에서 열렸다.

곧 그들의 의사가 결정되니 일부는 자리를 벗어나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결코 이들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난 것은 다음 날 성균관 유생들을 동원한

권당(捲堂)으로 알 수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도 모자라 며칠 지나지 않아 해금정책을 비난 내지는 철회를 요구하는 상소가 눈 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니 이제 장기전으로 돌입한 신하들과 왕권의 대치였다.

이진 또한 승지들에 의해 상소의 내용을 모두 듣고 중요한 것은 읽어도 보았지만, 상소에 대한 어떤 비답(批答)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시위를 계속했다. 그리고 승지들만 모아 국정 현안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 나갔다. 시급한 안건들을 처리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 * *

사정전 내.

육 승지와 주서, 가주서 그리고 이진이 임어한 가운데 회의가 지속되고 있었다.

“다음 안 건 상정하시오.”

이진이 명하자, 도승지 유성룡이 입을 열어 보고를 했다.

“전 가덕첨사이자 장흥부사 한온(韓蘊)의 증직을 청하는 바, 이를 어찌 처결했으면 좋겠사옵니까? 전하!”

“한온?”

이진의 물음에 유성룡이 한온에 대해 답을 했다. 그가 말한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명종 10년(1555) 왜적이 왜선 60여척으로 전라도 달량진(達梁鎭)에 쳐들어오자, 장흥부사 한온(韓蘊)은 절도사 원적(元績),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과 더불어 달량진을 구원하기 위하여 갔으나 왜적이 거짓으로 도망하였다.

이에 절도사 원적이 입성하여 방비하였는데, 적의 수가 너무 많고 원병이 오지 않은데다가 삼 일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져 군사들로 하여금 옷과 모자를 벗어 항복하는 모양을 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왜적이 세가 약함을 알고 공격하여 성이 함락되고, 절도사 원적과 함께  한온 또한 죽음을 당하였다는 보고였다.

유성룡의 보고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이진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높은 벼슬을 내린다고 녹이 더 나가는 것도 아니니, 후하게 인심 쓰지, 뭐’

결론을 내린 이진이 명했다.

“나라를 위해 죽은 충신이니 병조판서에 추증하도록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장내의 모든 인물들이 부복하여 절을 하자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하였다.

“다음 안건?”

이진의 말에 동부승지 이호민이 아뢰었다.

“전하, 지난번 갑자기 파회가 되는 바람에 아직 처리하지 못한 다리가 부러지도록 방치한 문경 현감의 체직 건은 어찌 처리 하실 런지요?”

“흐흠.......! 갑자기 왕대비마마께서 이석하시는 바람에 상정도 못한 안건 아니오?”

“그렇사옵니다. 전하!”

“파출토록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또한 고개를 조아리는 측근들을 바라보며 이진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남 퇴출시키는 것이 무슨 감사할 일이라고 고개를 조아리는지 알 수 없는 치들이었다.

이때 김 내관이 조용히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아뢰었다.

“이순신이라는 자가 등대하여 섬돌 위에 대기 중이라는 위장의 보고입니다. 주상전하!”

“그래요?”

자시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진이 소리쳤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제 승지들은 돌아가도 좋소. 도승지만 잠시 남도록 하시오.”

그렇게 명하고 이진은 이순신이 기다리고 있는 기단 위로 가려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체통이 있는지라 천천히 다시 어좌로 돌아가며 명했다.

“이순신을 들라하라!”

“네이~”

내시의 길게 끄는 고음을 들으며 이진은 모처럼 용안이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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