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8화 (8/210)

< -- 8 회: 쪽박 or 대박? -- >

8

이튿날.

이진은 송익필로부터 새삼 서체를 배우고 소학을 읽고 있는데 허준이 방문을 했다. 금란을 불러 다과상을 들인 이진이 허준에게 물었다.

“어쩐 일이오?”

“완쾌되셨다지만 혹시나 하여 경과를 보러왔사옵니다.”

“잘 왔소. 보시다시피 내 다 낫지를 않았소?”

“그렇사옵니다.”

“내 어의께 귀한 선물을 하나 줄 테니 어의는 내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내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대답을 하겠다는 말이오?”

말없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허준이었다.

“내가 마마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어찌 하겠소?”

“세상에 그런 방법이 있사옵니까?”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앉는 그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있소. 틀림없이 있소.”

이진의 확신에 찬 대답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표정인 허준이었다.

그 역시 두창을 앓는 자들에게 처방은 하나 열에 아홉은 실패하고 있는 처지라 더욱 그랬다. 또한 원인은 임해군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다, 의원도 아닌 자가 그런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 해괴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한 이진이 빙그레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당장에는 내 말에 믿음이 가지 않을 것 이오만, 이는 실험을 통해 증명을 해보면 될 일. 이후 그 방법이 확실한 일로 증명이 된다면, 그대는 내게 무엇으로 보답을 하겠소?”

“명은 물론 세상 그 어디에도 지금까지는 역질을 완치시킬 처방이 없었사옵니다. 게다가 이 병이 여간 고약합니까? 전염 속도가 빠르며, 한 번 걸렸다하면 거의 반은 죽어나가는 실정이니, 정말로 확실한 처방전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 천 것의 목숨인들 아끼리까?”

“좋소! 어의가 그렇게 다짐을 하니 내 일러주리라. 그 전에 내 한 가지 물어봅시다.”

“말씀 하시죠. 군 마마!”

“소가 마마를 앓는다는 소리를 들어보았거나, 보았소?”

“듣기도 했고, 보기도 했사옵니다.”

“그럼, 이야기하기가 쉽겠군. 그 처방은 마마를 앓은 소의 고름을 채취해 인간에게 약간만 상처를 내 옮기는 것이오. 그러면 소위 면역력이라는 것이 생겨, 절대 그 사람은 두창에 걸리지를 않소. 또 한 같은 방법으로 그렇게 앓고 난 사람의 고름을 채취해, 똑 같은 방법으로 이를 시행하는 것이오.”

“이 말고도 마마 환자에게 직접 채취해 바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면역력을 생기게 하는 방법도 있으나, 이는 권장할 방법이 못 되오. 우두보다는 균이 강해서 잘못하면 예방하려다 죽는 수가 있소. 또 너무 약하게 하면 항체 즉 면역력이 생기지 않아, 하나 마나한 경우도 있고.”

“요는 역병을 앓고 있는 소의 고름을 적당량 채취해 사람에게 옮기면, 한 번 앓고 난 사람은 다시는 그 병에 안 걸린다는 군 마마의 말씀이시죠?”

“그렇소이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고개를 갸웃하는 그에게 이진이 말했다.

“그 방법을 시행하려면 주사기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하면 더욱 좋을 것이오.”

“주사기라뇨?”

이진은 화선지에 붓을 들어 대충이나마 주사기 모양을 그렸다. 그리고 설명을 했다.

“우리 조선에는 플라스틱이 없으니 험, 험........! 대나무로 물총을 만드는 원리 그대로 물총을 만들어 그 끝에 쇠바늘을 만들어 다는 방법이오. 그러고 이것으로 사람의 혈관을 찾아 피를 뽑거나, 고름 등을 주입할 때 쓰면 아주 좋을 것이오.”

“정말 그런 방법도 있겠군요.”

“그러니 내 말대로 일단은 시행을 해보고 확신을 얻은 후에나, 천것들을 상대로 시험해 보고, 차차 일반 백성이나 사대부에게도 권하는 쪽으로 합시다.”

“알겠사옵니다. 군 마마! 정말 이 방법이 두창을 예방할 수 있다면 이는 군왕뿐만 아니라 온 조선 백성이 경하할 일이옵니다.”

“하하하.........! 일단 시행을 한 번 해보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내게 와 물어보시오.”

“알겠사옵니다. 군 마마!”

오늘의 이 대화로 인해 채 1년도 안 되어 그 성과가 나타났으니, 임해 이진은 이로 인해 그동안 많이 잃은 신망을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었다.

* * *

그날 오후였다.

역시 경서를 읽고 있는 이진에게 덕삼이 나타나 아뢰었다.

“군 마마, 지난번에 지시한 조선의 검객 몇 명을 모셨사온 즉 접견을 하시겠사옵니까?”

“하하하........! 아무렴, 만나야지. 만나야하고 말고. 지체 말고 바로 데려오도록 해라!”

“네, 군 마마님!”

잠시 후 덕삼이 다섯 명을 데려왔는데, 이진으로서는 기가 차지도 않았다.

한 사람은 16세 전후의 소년으로 5척의 키에, 제 키만 한 장검을 짚고 자신을 무엄하게도 쏘아보고 있었으며, 또 다른 세 명은 모두 무명 적삼 차림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어딘가 건들건들하는 모양새가 양아치 냄새가 났다. 나머지 사십대 중반의 청수하게 생긴 자만이 깊게 가라앉은 눈과 행동거지가 어딘지 검객 같은 심오한 맛을 풍겼다.

이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덕삼이 말했다.

“차례대로 소개해 올리겠사옵니다. 군 마마님!”

“.......”

이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덕삼이 말했다.

“이 청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금 18세로 김명순이라는 자입니다. 자는 염계(染界), 호는 천호(泉湖)라 하옵니다. 그의 검술을 제가 견식 한 바, 그의 검은 날래기가 마치 나비와 같았고, 사납기는 마치 표범의 움직임과 같았사옵니다. 군 마마!”

5척 단구의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벌써 열여덟 살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덕삼의 말을 빌리면 그의 검술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이 사람은 훗날 의병장 출신으로, 그에 대한 기록을 여기에 잠시 기술해보도록 하겠다.

김명순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큰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를 않다. 조선 시대라는 특성과, 전란의 시대라는 악재가 겹친 결과였다. 김명순의 본관은 절치(絶値), 자는 염계(染界), 호는 천호(泉湖)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명순은 키가 5척 정도에, 자기 키만한 장검을 주로 썼다고 전해진다.

무관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김명순은 선조 때에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하자, 5월경 금강산 언저리에서 자기 마을의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김명순은 주로 지리를 활용한 기습 공격을 하였는데, 전승에 따르면 ‘3일 밤낮을 말을 타고 주위를 둘러본 끝에야 비로소 그는 전략을 세우고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라고 적혀 있다.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대부분의 기습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술에 있어 놀랄 만한 부분은 그의 신기(神技)라고까지 칭해지던 검술이었다.

작전에 있어서의 신중함과는 달리 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검을 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여주에서의 패배 이외에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의 신무기였던 조총의 사정거리나,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던 한국의 검술을 생각해 볼 때, 김명순은 조선 검객의 자존심이었던 셈이었다.

서술에 따르면, ‘그의 검은 유려한 나비처럼 지나가며, 초생 달 같은 호를 그리며 적을 베었다....... 적은 신기와 같은 그 검술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나갔고, 마치 표범 같은 그의 움직임에 적은 총을 맞추지 못했다.......’ 라고 쓰여 있었다.

그의 의병대는 이후 응단(鷹團)이라 불리며 각지에서 소규모 기습 전투만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커다란 전투에는 김명순의 이름은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병사들에게서 불패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김명순은 이후 그 공적을 인정받지만, 전쟁 동안에 겪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은거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김명순의 이름은 그의 은둔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 것이다.

이진이 덕삼의 소개에 새삼스러운 눈길로 김명순을 훑고 나니 덕삼이 다음 사람을 소개했다.

“이 세 사람은 검계의 우두머리로 각각 백일문, 김득신, 황명호라 하옵니다.”

“검 계?”

되묻는 이진에게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한마디로 좋게 말하면 한량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오늘날의 조직 폭력배와 비슷한 부류였다.

조선시대에도 평생 사냥과 무술 연마를 하며 지낸 사람들이 있었다. 대체로 명문가 자제들로서 서자라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거나, 공부를 못해서 예시당초 관직에 나가길 포기한 한마디로 명문가 출신 불한당 이른바 한량들이었다.

명문가 재산 덕에 먹고 사는 걱정은 할 게 없으니, 할 짓이라곤 같은 부류들 끼리 몰려다니며 사냥을 하거나 기방을 들락거렸다. 사냥을 하려면 말 타고 활쏘기는 기본인지라 이들은 무술 연마에 열심이었다. 특히나 건달들 모임에서 완력이 있다는 건 커다란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부류가 제법 많았는지 조선 조정은 이런 백수건달 무사들을 병적에 등록 시켜 때로 전시에 군사로 동원하기도 했다. 모든 한량들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이들 중 일부는 종종 ‘검계(劍契)’라 불리는 검객 동호회(?)를 결성해선 온갖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기방 운영이나 도박, 고리대금업을 해서 전형적인 조직 폭력배 같은 양상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검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눈구멍이 형성된 얼굴 전체를 가리는 삿갓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속에는 좋은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엔 허름한 적삼을 걸치고 있으며, 항상 칼을 소지하고 다녔다고 한다.

검계의 일원들은 칼을 자신들의 상징처럼 여겨서 거금을 들여 비싼 칼을 장만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왈짜, 왈패로 불리던 이들은 결국 현대의 조직 폭력배와 비슷한 부류였다.

이진의 표정이 시원치 않을 것을 보고 김득신이라는 자가 불쑥 내질렀다.

“우리를 만만히 보지 마시오. 조선팔도에서 단지 이 두 사람에게 패했을 뿐이니까.”

이진이 백일문의 무례한 말에도 웃음 띤 얼굴로 이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덕삼이 이제는 마지막 하나 남은 사람을 소개했다.

“김체건이라는 선비로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검법마저 두루 섭렵한 명 검객으로 아마도 조선팔도에서는 꺾을 자가 없는 것으로 사료되어집니다.”

‘김체건? 숙종 때의 인물 아닌가? 아무려면 어떤가?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고, 검술만 강하면 되지.’

이런 생각으로 이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밖의 작은 소란에 송익필마저 나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진은 그의 거동에는 신경 쓰지 않고 무슨 생각인지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 그대들의 무예를 알 수 없으니, 내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것이 어떠한가? 아무래도 그대가 가장 강해 보이는 군. 내 앞에서 시범을 보일 수 있겠나?”

이진의 지적에 김체건이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요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인이 시범을 보이기에 앞서 우선 바닥에 재를 뿌려주십시오.”

“알았다.”

승낙을 한 이진이 덕삼을 바라보자 덕삼은 곧 다른 하인들을 불러다, 마당 한 쪽에 고운 재를 죽 뿌려놓았다.

“이제 시범을 보여주시게나!”

“네, 군 마마님!”

명쾌하게 대답을 김체건이 대중의 앞으로 나서 곧 재가 깔린 곳으로 걸어 나갔다.

곧 김체건이 시범을 보이는데, 칼을 떨쳐 들고 검을 치세워 발꿈치를 들고 엄지발가락으로 서서 걸기 시작했다. 이어 현란한 검무에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장내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놀라마지 않았다. 그 움직임이 어떻게나 빠른지, 그 현란함을 그 누구도 두 눈이 따라가질 못했다.

또한 맨발 양쪽 엄지발가락으로 뿌려놓은 재를 밟는데, 나는 듯한 검무가 극에 이르러 모두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한동안 이어지던 그의 검무가 어느 순간 우뚝 멎었다. 비로소 이진 이하 모두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니, 그는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여전히 고요한 신색이었다.

이진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칭찬하려다 우연히 바닥을 보니 재위에는 발자국 하나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 몸의 가볍고 표홀하기가 이와 같았다. 더욱 놀라고 만족한 이진이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실로 조선의 제일 검객이라 할 만 하도다. 내 후히 상을 내리겠다. 덕삼은 가서 금괴 좀 내오너라.”

“네, 마마!”

덕삼은 곧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일러 묵직한 궤짝 하나를 내왔다. 이진은 곧 궤짝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많은 금 잎을 김체건에게 집어주며 말했다.

“내 그대의 무예에 반했다. 내 곁에 머물러 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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