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200화 (완결) (200/200)

제200화.

마스크를 벗고 화사한 봄꽃처럼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이였다.

“어! 제이씨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지금 그 얼굴 반갑다는 표정 맞죠?”

“네,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이씨가 나타났는데, 홀에 있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조용하죠? 제이씨 얼굴을 못 봤나요?”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제이를 대신해 옆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우르르 몰려 들어와서 못 봤을 거예요. 이곳 매니저님이 조용하고 재빠르게 안내해줘서 바로 룸으로 직행했거든요.”

처음 보는 젊은 여자 셋이 함께였다.

“지민이한테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가 서인우 셰프님이 마치 친한 오빠처럼 익숙하네요.”

“지, 지민 씨요?”

“아! 제이 본명이 지민이에요.”

“그랬군요. 몰랐습니다. 지민 씨.”

순간 꺄르르 웃는 네 여자는 무척 편해 보였다.

“내가 연예계 생활하면서 힘들 때마다 정말 의지가 됐던 친구들이에요. 오늘은 제이가 아니라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해하는 지민이로 왔습니다.”

“네. 지민 씨가 주문하신 양장피 나왔습니다. 지금 바로 드셔야 맛있습니다.”

서인우가 소스를 부어 재빨리 섞어주자 대단히 신기한 것이라도 보듯 세 여자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중했다.

“이게 서풍에서만 볼 수 있다는 퍼포먼스 맞죠? 확실히 셰프님이 직접 소스를 뿌려 주니까 더 맛있어 보이기는 한다. 그치?”

“미안, 나는 얼굴 보느라 못 봤네.”

네 명의 여자들이 다시 꺄르르 웃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천천히 맛있게 드세요. 바로 식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 셰프님은 이제 다 나은 거죠?”

“보시다시피 이전과 똑같습니다.”

제이가 조심스럽게 서인우의 오른쪽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다 나았어요?”

“여름에 비 많이 오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현재로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걱정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제이의 눈빛을 보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을지 알 것 같았다.

“아휴 말도 마세요. 그때 뉴스를 보고 우리 지민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맛있게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쑥스러운지 제이가 급하게 친구의 말을 잘랐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백 짬뽕을 완벽하게 완성해놓은 강진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높이 세워 보였다.

기름기가 살짝 도는 뽀얀 국물에 큼직한 새우와 오징어 등 해물과 적당히 익은 배추와 양파, 대파 등 채소들이 탑처럼 높이 쌓여있었다.

“자! 5번 테이블 깐풍기하고 7번 테이블 난쟈완스 서두릅시다.”

직원들 모두, 마치 오랜 세월 같이한 팀원들처럼 서로 협력하며 요리하기 시작했다.

주방에 익숙한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보니 정신없던 점심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끝나가고 있었다.

잠시 한가한 틈을 타 7층 사무실로 올라간 서인우는 일제히 일어나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편하게 앉아서 일보라고 손짓하고 급하게 사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픽 한번 웃고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컴퓨터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던 윤지영이 힐끗 고개를 들어 쳐다보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잘됐다. 이리 좀 와봐.”

“왜? 뭐가 잘 안돼? 컴퓨터랑 한참 기싸움하고 있던데?”

대답 대신 서인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윤지영이 포기한 듯 말을 이었다.

“베트남에 있는 오상준 씨한테 메일이 와있던데, 둘이 벌써 통화했어?”

“남지운 씨 관련된 메일 말하는 거지?”

“이미 얘기가 다 된 건가 보네. 정말 남지운 씨도 [서풍]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열게 허락해 줬다는 말이야?”

서인우가 소파에 엉덩이를 쑥 밀어 넣고 앉았다.

“한국 들어오기 전에 대충 얘기했던 거야. 남지운 씨는 원래 처음 면접 때부터 해외에서 중식당을 열고 싶어 했어.”

“나도 그건 들어서 알아. 그뿐 아니라 오빠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이랑 계약해서 가짜 [서풍]을 만드는 일에 일조했다는 사실도 알고.”

입을 꾹 다물고 잠시 말이 없던 서인우가 윤지영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웃어? 난 그 미소에 안 넘어가!”

“나 치료받는 동안 [서풍]의 요리를 밤낮으로 연습해서 나한테 이미 인정받은 사람이야. 그 이름을 걸 자격이 충분해.”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남지운씨가 지금까지 마련한 자금이 부족해서 오빠가 6개월간 무상으로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는 것도 사실이냐고 묻는 거야.”

“나 돈 넘치게 많아.”

윤지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며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내가 오빠 돈 많냐고 물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한 거야?”

“지영아. 난 말이야 만약에 누군가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그런데, 능력도 있고 성실함도 있는데 단지 자금이 부족하다면 난 그게 누구든 결과에 상관없이 도울 거다.”

“내가 오빠 생각을 모르는 건 아니야. 그래도 좀 계획서도 받아보고 성공 가능성도 따져보고….”

“정말 큰 힘이 될 거야. 그리고 그 힘으로 충분히 일어설 수 있을 것이고. 난 내가 그럴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해.”

윤지영이 키보드를 힘차게 눌렀다.

아니, 세게 때렸다.

“그러니까 반드시 지원해주라는 얘기지? 6개월 후 조금씩 상환하는 조건으로?”

“남지운 씨는 이미 저번 일로 많이 배웠을 거야. 꼭 성공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구, 두야.”

서인우가 윤지영의 눈치를 슬슬 보더니 화제를 돌렸다.

“서풍 만두 2호점이랑 3호점 준비는 잘되고 있는 거지?”

“다음 달 오픈 앞두고 이명옥 씨랑 김정순 씨 모두 아주 열심이야. 조금 있으면 여기로 올 거야. 대표님 얼굴 보고 꼭 할 말이 있다네.”

“그래서 올라오라고 한 거구나?”

“이 메일 건도 확인해야 하고 대표님이 결정해줘야 할 일이 많아.”

윤지영이 테블릿 전원을 켜서 서인우 앞으로 가져왔다.

“지금 안상훈 셰프님이 하시고 계신 [서풍] MS 백화점 강남점은 지난달도 최고의 매출을 보였어.”

“그래? 역시 안셰프님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니까.”

“백화점 측에서도 장기간으로 재계약을 했으면 하던데, 안상훈 셰프님이 대표님과 의논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니까 빠른 시일 내에 둘이 만나서 결정하고 알려줘.”

서인우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오빠! 듣고 있어?”

“그, 그럼. 내가 말이야 처음부터 지영이 너와 같이 일을 시작한 게 신의 한 수인 것 같다.”

“그래?”

“네가 유학까지 포기하고 사업을 같이한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잘한 결정인지 자신 없었는데, 지금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

“뭐라고 말이야?”

“아주 잘한 일이라고.”

윤지영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네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나 지금 매우 바쁘지만 행복하다고.”

“맞아. 처음에는 오빠가 너무 요리에만 빠져서 아무것도 몰라 손해 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우리와 함께했던 많은 사람이 함께 성공해서 행복해하는 걸 보니까 나도 신나.”

“이제 너도 그 맛을 알았으니 헤어나오기 쉽지 않을 거다.”

“뭐? 내가 못 살아.”

서인우와 윤지영이 소리 내 웃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이명옥과 김정순이 꽃다발과 화분을 각자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억수로 축하혀요. 우리 [서풍]이 허벌나게 멋들어지게 변했어라.”

“감사합니다. 다 우리 [서풍] 직원들 덕분입니다.”

들고 온 화분을 높이 치켜들어 얼굴을 가린 김정순이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다음 달이면 내 가게가 생긴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내가 죽을 때까지 대표님께 받은 이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지….”

“그런 생각 하시지 마세요. 두 분 능력으로 얻어낸 것들입니다. 게다가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두 분이 얼마나 애써주셨는지 잘 아는데, 내가 더 감사하죠.”

“우리 대표님은 나이도 젊은디 속은 완전히 애 늙은이여라. 전생에 부처님이었던 거 아니어라?”

이명옥의 구수한 사투리 섞인 농담으로 사무실에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저녁 장사 준비를 위해 웍을 정리했다.

“오픈 날이라 그런지 손님이 끊이질 않네요. 사장님 안 계신 동안에도 주문이 계속 들어왔어요.”

“뭐가 걱정이야? 이제 내가 없어도 척척 해내는 강진수 수석 셰프가 있는데.”

“네, 사장님은 가끔 내가 게을러지지 않는지 체크만 해주시면 됩니다.”

“뭐? 이제 나한테 빠지라는 얘기냐?”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거는 아닐 테니까 조심하시라는 얘기죠.”

서인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강진수를 쳐다봤다.

“일 년 후에 강진수, 네 가게를 오픈할 때까지 내까 딱 지켜볼 거다. 뭐하나 실수하다 걸리는 날에는 국물도 없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네가 여기를 떠나도 난 계속 누군가에게 요리를 가르쳐주며 이 중식도를 내려놓지 않을 거다.”

“아주 뼛속까지 요리사입니다.”

“그럼, 내가 누구 제자인데….”

강진수가 서인우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더워! 저리 떨어져.”

“전부터 진짜 궁금했는데요. 사장님은 정말 누구에게 요리를 배우신 겁니까?”

“나? 사부님.”

“그러니까 그 사부님이 누구냐고요?”

“이거 정말 아무한테도 알려 주지 않은 비밀인데…. 끝까지 지킬 자신 있어?”

서인우의 질문에 강진수가 꿀컥 크게 침을 삼켰다.

“그럼요. 절대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다운 씨한테도 끝까지 비밀 유지하겠습니다.”

“그럼 더 가까이 와봐.”

서인우가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하자 강진수가 서인우 턱밑까지 바짝 달라붙었다.

“왕차여.”

“네? 뭘 차여?”

“내 사부님 존함이 왕차여라고.”

“왕차여요? 그러면 중국분이세요?”

서인우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내 사부님을 일컬어 이렇게 말하지.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10대 요리사 중 한 분이시라고.”

“우와! 정말요? 대박! 역시 훌륭한 스승 밑에 더 대단한 제자가 나온 거네요. 그야말로 청춘어람이네요.”

“뭐?”

서인우가 기가 막혀 크게 웃었다.

“에이. 나도 그 정도 사자성어는 알아요. 일찍 요리 시작했다고 무식한 사람 취급하지는 마세요.”

“그래. 아프니까 청춘이다.”

서인우는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자리로 돌아가는 강진수를 한참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분명 사부가 있었으면 한마디 했을 텐데….’

이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중식도를 시린 눈으로 쳐다봤다.

사부와 우스갯소리를 하며 울고 웃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봤던 사부 왕차여의 모습 또한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사부! 사부가 처음 우리 아빠와 인연을 맺었던 바로 그곳이야. 기억해?’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비록 이제는 사부를 다시 만나지는 못하지만, 사부와 나, 그리고 우리 아빠와 사부의 역사가 시작된 이곳에서 내가 보란 듯이 멋진 요리를 만들어 보일게.’

금색 실로 [서풍] 서인우라고 멋지게 수놓아진 검은색 셰프복을 다시 한번 단정하게 매만졌다.

그리고는 중식도의 손잡이에 슬며시 손을 올려보았다.

‘나를 믿어주고 아껴준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그 날까지 난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할 거야. 그게 사부를 만난 내 행운에 대한 나만의 보답이야.’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직원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서인우의 눈에 어느새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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