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누가 찾아왔다고?”
서인우가 사고로 자리를 비운 상황에 [서풍] 영업은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음이 불 보듯 뻔했다.
강진수가 바로 돌아왔지만, 잠시도 아니고 며칠씩이나 강진수와 오상준 그렇게 둘이 모든 주문을 해결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베트남 직원들이 재료 준비를 척척 해낸다고 해도 최근 들어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손님이 줄 서서 기다리는 상황에 그들만으로 절대 꾸려나갈 수 없었다.
“내가 병원에 있는 사이에 누가 찾아왔다는 거야?”
“남지운 아저씨요.”
“남지운 씨? 그 사람이 하던 일을 어떻게 하고 우리 가게를 도와?”
“사실 그때 사장님이 찾아가셔서 해주신 말씀에 너무 후회되고 수치스러워서 바로 가게를 그만뒀답니다. 그리고, [서풍]에도 몇 번 찾아왔었대요. 며칠 전 매니저 누나가 얘기했어요.”
그러고 보니 언젠가 김예은 매니저가 서인우에게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망설였던 기억이 났다.
“사장님 허락 없이는 우리도 안된다고 했는데, 바라는 거 없다고. 그저 사장님 완쾌하실 때까지 일손만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하도 사정해서….”
“그 결정은 누가 한 거지?”
“이명옥 총 주방장님이 사장님이 계셨어도 받아주셨을 거라고 그러셨어요. 사실 주방에 일손이 꼭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고요.”
남지운.
그 사람이라면 큰 힘이 되어줬을 거다.
워낙 경험도 많고 손도 빠른 편이었으니까.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서인우와 [서풍] 가족들을 배신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서인우에게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텐데, 다시 돌아와 일손을 도운 용기를 높이 사주고 싶었다.
“내일 출근하면 내가 감사해한다고 꼭 전해줘.”
“그 아저씨가 먼저 배신했는데, 사장님이 감사할 일은 아니죠. 뭐 그래도 도움이 되긴 많이 됩니다. 저번 일로 사람이 좀 달라졌어요.”
“그래?”
“일도 더 열심히 하고, 누구에게나 더 친절하게 대하고 특히 마감하면 정리와 청소는 거의 혼자 다 하려고 해요.”
그동안 그가 겪어냈을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서풍]의 모든 요리를 배워 당당하게 서인우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었을 텐데….
음료수를 사서 다시 병실로 돌아온 엄마와 이모, 윤지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의사 선생님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정을 취하라고 했는데,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엄마 이지희가 서인우의 이마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다리를 다친 거지 다른 곳은 멀쩡해요.”
“네가 의사야? 일주일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인우 이모의 톡 쏘는 말에 서인우와 강진수가 동시에 눈을 내리깔았다.
“강진수 씨라고 했나? 이제 다 울었어요?”
“네? 네.”
인우 이모의 짓궂은 질문에 강진수의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거 시원하게 마셔요.”
음료수를 건네는 인우 이모와 윤지영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옴싹 거리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뭔데요? 다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눈치만 살피던 윤지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 오빠한테 검은색 자가용이 무작정 달려들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운전자 얼굴은 못 봤어?”
“응. 분명 나를 아는 사람이었어. 내가 길을 건너는 걸 지켜보다가 갑자기 달려들었거든.”
사고 당시를 설명하는 말에 엄마 이지희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윤지영이 제 엄마를 쳐다봤다.
“어떻게 해? 이모 놀라시는데 내가 나중에 물어보자고 했잖아?”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아야지. 도대체 어느 썩을 놈이 우리 인우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말이야.”
“지금 사장님 사고 당시 영상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왔어요. 차량 번호도 다 찍혀있어서 범인은 금방 잡힐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진수가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 주었다.
“이준형씨한테 얘기 들었어. 그 얘긴 나중에 나랑 다시 하자.”
“무슨 얘기인데? 왜 둘만 해? 엄마한테 말해봐.”
윤지영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서인우 엄마 이지희의 충격을 생각해서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을 잃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타지에 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충격도 말로 다 하지 못할 지경일 텐데, 그 사고가 남편을 죽인 자의 아들이 벌인 소행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몸서리치며 윤지영에게 몰래 고개를 가로저어 보인 서인우가 바로 강진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할머님은 건강하시지?”
“네, 사장님 덕분에 전보다 더 치료도 잘 받으시고 많이 좋아지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휴가는 좋았어? 정다운 매니저도 잘 있고?”
“네. 우리 자기는 더 이뻐졌어요. 매일 영상통화 하는데 우리 다운씨는 피부도 뽀얗고 입술이 빨간 게 역시 실물이….”
신나서 떠들고 있는 강진수를 서인우와 세 여자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 기운을 느낀 강진수가 바로 입을 닫았다.
“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여튼 사장님이 깨어나셔서 너무 다행입니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직원분들한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겠습니다. [서풍]은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사장님은 빨리 회복하는 것만 신경 쓰세요.”
“그래, 고마워. 진수씨만 믿어.”
“네. 최선을 다해서 사장님 빈자리를 메꾸도록 하겠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여러 번 인사하고는 강진수가 병실을 나갔다.
서인우는 계속해서 그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엄마 이지희를 멍하니 쳐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따뜻하게 눈을 맞춰 주는 엄마의 눈동자에는 어릴 적처럼 그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서인우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써봤지만, 조금씩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불도 켜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김원상이 거의 다 마셔버린 양주병을 들어 남은 술을 모두 잔에 따라버렸다.
핸드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서 자신의 이름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이 새끼가 어떻게 알고 피한 거지? 한 번에 보내버릴 수 있었는데….”
사고 당시를 다시 떠올린 김원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 새끼가 뛰기 시작했단 말이야.”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거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환하게 켜진 핸드폰 화면이 조명처럼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만가복] 회장 아들이라는 부러움을 온몸에 받고 자란 김원상도, 세계 요리 대회에서 수상하며 업계에서 촉망받던 김원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제 아버지며 동생까지 다 버리고 그 원망을 서인우에게만 쏟아내려 날뛰는 미치광이 하나가 초점 없는 눈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결국 네 손으로 그 자식을 죽이려고까지 한 거냐? 뭣 때문에 …. 도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만든 거야?”
화면이 꺼지자 방안이 다시 깜깜해졌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거울 속 자신을 보고 소리 지르고 있던 김원상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점점 커져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 * *
의식이 돌아오고 하루가 지났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준 가족이 있다는 행복한 기분에 젖어 아픈 줄도 모르고 하루를 보냈다.
“지영이 너 가게는 어떻게 하고 온 거야? 빨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 사고 소식 듣고 정신이 없었지. 엄마랑 이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계속 울고만 계시니 두 분만 보낼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이렇게 가게를 비우면 지장이 클 텐데….”
“우리 매니저 언니가 워낙 일을 잘하잖아. 어젯밤에도 통화했는데, 별일 없다면서 오빠 안부만 묻고 계속 울더라고.”
“어쩌냐? 내가 여럿 울렸네.”
“이제 농담도 하는 거 보니까 나는 가봐도 되겠다.”
윤지영이 웃으며 얘기하다 슬쩍 옆에서 소파에 기대 잠든 엄마와 이모를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준형씨 얘기 사실이야?”
서인우도 고개를 살짝 돌려 엄마와 이모가 잠든 걸 확인하고는 작게 대답했다.
“뉴스 봐서 김원상이 벌인 사기행각은 다들 알고 있었지?”
“그럼. 아빠가 당장 찾아가 가만 안 둔다고 난리가 났었어. 그런데, 그 사람이 여기에 와 있다는 거야?”
“출국 금지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누가 도왔나 봐. 그전에 여기로 입국한 기록이 있다고 준형이가 조심하라는 연락을 해왔었어.”
윤지영이 다시 한번 소파 쪽을 쳐다보더니 긴장된 눈으로 물었다.
“그럼 정말 오빠를 차로 친 사람이 김원상일 수도 있겠네?”
“난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그 부분은 경찰에서 해결해줘야지.”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잡힐 때까지는 안전하지 않은 거 아니야?”
“준형이 말로는 한국에서도 김원상을 잡기 위해서 움직였다니까 분명 금방 잡힐 거야. 여기서도 이미 경찰에서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고 들었어.”
윤지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오빠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렇게 난리인 거야? 어떻게 그런 사기를 치려고 한 것도 모자라 사람을 죽이려고 까지….”
“김원상이 이런 짓까지 벌일 거라고는 나도 예상 못 했어. 이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마 전에 자기 친 동생한테도 거슬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까지 했다는데….”
“뭐? 서원씨한테 까지?”
“그 사람, 아니 그놈 완전히 미쳤어.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치워 버리면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
서인우의 얼굴이 순간 어둡게 변했다.
이번 일로 김서원이 또 얼마나 가슴앓이를 하고 상처를 받을지 걱정이 앞섰다.
“네가 서원 씨 잘 챙겨줘. 세상에 홀로 남은 기분일 거야.”
“그래야지. 자기 아버지 일이 밝혀지고 한동안 내 눈도 똑바로 못 쳐다봤었는데…. 정말 이번 일이 자기 오빠가 한 짓이라면 진짜 살고 싶지 않을 거야.”
“내가 아는 서원 씨는 강한 사람이야, 영리하고. 분명히 힘들지만 잘 이겨낼 거야. 옆에서 지영이 네가 힘이 돼준다면 진심으로 고마워할 거고.”
“그건 걱정하지 마. 이제 나도 친동생처럼 정이 들어서 오빠 부탁 아니어도 잘 챙길 거니까.”
“어머! 서원 씨가 누군데?”
“엄마야!”
갑자기 들린 인우 이모의 목소리에 윤지영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네 엄마 맞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둘이 뭐 비밀 얘기라도 하고 있었어?”
잠시 서인우와 눈을 마주친 윤지영이 몸을 돌려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 도대체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야? 어디부터 들었어?”
“나? 김서원 씨가 힘들어할 테니까 잘 부탁한다고 하는 거?”
“그것만 들었어?”
“왜? 또 뭐 있었어? 얘기해봐. 내가 언니한테는 비밀로 할게.”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서인우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온 인우 이모가 집요하게 물었다.
피곤했는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인우 엄마 이지희를 보고는 윤지영이 할 수 없이 둘이 나눈 얘기를 간단하게 전했다.
“뭐? 그. 그게 정말이야? 그놈이 진짜 너를 죽이려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인우 이모의 입을 놀란 윤지영이 손으로 틀어막았다.
“내가 엄마 때문에 못살아. 이모 아시면 쓰러져. 조심 좀 해.”
“아, 알았어. 내가 너무 놀라서…. 아이고 심장이야. 그놈이 작정하고 차로 박았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 이만하길 얼마나 다행이야.”
사부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 깨어나고 사부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내 가방! 내 중식도가 들어있는 가방은 어디 있어?”
“응? 가방? 사고 당시, 네 물건은 다 여기 캐비닛에 있는데…. 뭐 필요한 거 있어?”
서인우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 바둥거리자 윤지영이 재빨리 캐비닛을 열어 가방을 가져다주었다.
바닥에 뒹굴어 더러워진 가방을 급하게 열어보니 다행히 중식도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휴. 다행이다.”
“너 설마 이 요리 칼 없어졌을까 봐 그렇게 놀라 소리친 거냐?”
그런데 …. 뭔가 이상했다.
분명 서인우의 의식이 깨어난 걸 알았을 텐데 사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