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다리 쪽으로 묵직한 무게감만 느껴질 뿐 너무나 편안하고 몸이 가벼웠다.
분명 엄청난 속도의 검은 차가 달려왔었다.
‘설마 내가 죽은 건가?’
-아니, 아직 명은 붙어있다.
‘어? 어…. 어!’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더니…. 지금 서인우가 딱 그 상태였다.
목소리만 들려야 하는데 희미하게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누, 누구세요? 사, 사부! 사부 어디 있어?’
당황해 뒷걸음을 치며 서인우가 소리쳤다.
-드디어 이렇게 내 제자와 첫 대면을 하게 되는구나.
‘네? 뭐? 그쪽이 우리 사부라는 말인가요?’
화려한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주름진 얼굴에 박힌 이목구비가 유독 커다란 60대쯤 되어 보이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눈만 끔뻑이고 있는 서인우에게 서서히 다가온 남자가 지그시 그를 쳐다보았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나는 왕차여라고 하네. 요즘 세상 사람들 표현대로 하자면 청나라 건륭황제 때 요리사였다.
‘사부!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거야? 이제 사부가 누구였는지 알게 된 거냐고….요?’
-그러니 너에게 내 소개를 하는 거겠지.
‘왕차여…. 왕차여…. 너무 어색하다. 그래도 사부가 기억이 돌아왔다니까 너무 기뻐. 정말 잘됐어, 사부.’
거무스름하고 주름진 손을 서인우의 어깨에 올린 왕차여가 낮은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죽는 줄 알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구나. 그저 너에게만 들리는 소리를 지르는 일 밖에.
‘들렸어. 처음 듣는 괴성이 들려서 내가 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썼던 거야.’
-나도 내 속에서 그런 괴성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내 몸이 아니라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 같았어. 그렇게 너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회오리가 치는 것 같더니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회오리?’
서인우는 희미한 기억 속에 온 세상이 회오리바람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걸 확실히 느꼈었다.
‘나도 정신을 잃어가면서 희미하게 본 것 같아. 그 회오리 바람을….’
-그 순간 우리가 같은 것을 느꼈었나 보구나.
‘사부, 말투도 조금 이상하고…. 갑자기 나타난 이 모습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계속 반말을 하면 안 될 것도 같고 말이야.’
-너와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기억이 돌아오니 나도 전처럼 대화가 쉽지는 않구나. 이래 봬도 후대 사람들이 나를 중국 역사상 길이 남는 10대 요리사로 불렀었다.
‘대단한데? 사실 나는 사부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
서인우의 어깨를 토닥이던 손을 위로 올려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많이 아플 거다.
‘사부 덕분에 살았어. 이상하리만큼 하나도 아프지 않아.’
왕차여가 다시 한번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싹 거둬가며 서인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제 돌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지금보다 더 실력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중식 셰프가 되길 바란다. 이건 진심이다.
‘왜 그래?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그리고, 돌아가라니? 어디로 돌아가란 말이야?’
-아직도 못 느끼는 거냐? 주위를 둘러봐봐. 여기는 네가 살던 세상이 아니다.
사부의 말에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서인우가 그만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 세상이 희뿌연 연기처럼 쌓여있고, 정신을 차리고 살펴본 제 몸에는 상처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부! 이거 뭐야? 그러면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건데?’
-너는 지금 수술 후 깨어나길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빨리 정신 차리고 일어나야지.
‘이게…. 지금….’
제 눈으로 보고 사부를 통해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눈을 비벼보고 급기야 팔을 꼬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조금씩 사부의 말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사부! 나 반드시 이겨낼 거야. 내가 깨어나도 사부는 내 곁에 있는 거지? 절대 사라지지 않는 거 맞지?’
-네가 눈 뜨는 건 꼭 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기나 해! [서풍]은 너 없으면 절대 바람을 일으키지 못해. 네가 있어야 완성된다는 사실 꼭 명심하라고!
‘아! [서풍]….’
며칠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을까?
아무런 느낌이 없는 만큼 어떤 기억도 없다.
사부의 처절한 외침과 안간힘을 쓰고 위로 올라와 굴렀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죽을힘을 다해 위로 올라가서 나뒹굴었던 건 기억이 나. 하지만, 그 후로는 깜깜하게 불 꺼진 밤에 던져진 것 같았어. 전혀 생각나지 않아.’
-그때부터 너는 의식을 잃었었다.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의 신고로 병원으로 보내졌고.
‘그 검은 차, 나에게 달려든 검은 차 운전자는 어떻게 됐어? 김원상 맞아?’
-아직 누구인지는 몰라. 완전히 찌그러진 차로 내빼버렸어. 몰려든 사람들이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었으니 분명 곧 잡힐 거다.
‘김원상일 거야. 분명히 내 얼굴을 확인하고 달려들었어. 아니면, 그자가 누군가를 시켰겠지.’
-죄지은 놈은 누구든 잡혀서 철저하게 처벌을 받을 거다.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네 생각만 해!
서인우를 바라보는 왕차여의 눈빛이 매서웠다.
낯선 얼굴에 처음 보는 눈빛이지만, 항상 들어왔던 사부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사부의 얼굴 더 오래 보고 기억하고 싶은데…. 그러면 의식을 찾기 힘들어지겠지?’
-이제 빨리 돌아가! 그리고, 네가 마지막에 떠올렸던 네 어머니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힘을 내봐!
‘알았어. 사고 날 때 나를 살렸듯이 이번에도 일어날 수 있게 내게 힘을 줘. 사부를 믿고 더 힘내볼게.’
-그래. 내 제자의 능력을 믿는다. 넌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거다. 그래서 그놈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요리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라. 그게 이 사부가 너에게 유일하게 바라는 거다.
‘그래, 꼭 힘을 내서 사부와 다시 만날 거야.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줘. 왕차여 사부님!’
갑자기 왕차여가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어 보였다.
-내 자랑스러운 제자를 한 번만 안아봐도 되겠느냐?
‘이거 좀 쑥스럽지만….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면 사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겠지?’
조심스럽게 왕차여에게 다가가자 그가 큰 손으로 서인우의 등을 두 번 툭툭 부드럽게 두드렸다.
* * *
“오빠! 정신 좀 차려봐! 제발 눈떠서 나 좀, 나 좀 보란 말이야!”
“사, 사부….”
서인우의 입에서 신음하는 듯한 작은 소리가 나왔다.
“여, 여기요. 우리 오빠 의식이, 의식이 돌아왔어요. 여기 좀 빨리 와주세요. 누가 좀 봐주세요. 빨리요!”
뿌연 안개처럼 보이던 눈앞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익숙한 얼굴이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지영아!”
“흐앙! 나, 나는 오뽜가 흐윽…. 주 죽는 줄 흐으흑 이, 이모! 어, 엄마!”
나는 의식이 돌아왔는데, 얘가 의식이 나갔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흐느껴 울면서 누군가를 계속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인우야!”
우리 엄마와 많이 닮았네….
“인우야! 정신이 들어?”
닮은 게 아니라 정말 엄마였다.
혹시 사부가 돌려보낸 곳이 또 다른 세상인 건가?
“어, 엄마?”
“언니! 인우 정신 돌아왔네. 이제 됐어. 우리 인우 이제 살았어.”
병실에 이모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습은 희미해도 목소리를 들으니 바로 알 수 있었다.
흥분해서인지 평상시보다 한 층 더 업된 목소리 톤이 눈감고 들어도 딱 이모였다.
전에는 조금 시끄럽다고까지 생각했던 이모의 목소리가 오늘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어떤 소리보다 따뜻하고 반가웠다.
뚝뚝!
서인우의 손등 위로 뜨거운 눈물이 연신 떨어졌다.
세상을 다 잃은 듯 하얗게 질린 엄마의 얼굴을 보고 가까스로 힘을 내 웃어 주었다.
“언니. 인우 웃네. 괜찮아. 이제 살았어.”
“인우야!”
서인우의 엄마 이지희가 붉게 충혈된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아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엄마의 체온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아빠의 죽음 이후로 차갑게 식어버렸던 엄마의 눈빛이 예전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인우야! 어, 엄마는 네가 잘못되는 줄 알고…. 흐으흑.”
“엄마….”
이지희는 목이 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우 네가 엄마 살렸다. 너 잘못되면 따라 죽을 거라고 며칠을 먹지도 않고 잠도 안 자고 …. 에휴 내가 줄초상 치르는 줄 알고 흐흐흑.”
이 병실에 눈물의 전염병이 돌고 있다.
누가 시작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하던 엄마를 대신해 몇 마디 전하던 이모가 결국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제 좀 그쳤나보다 했던 윤지영까지 다시 흐느끼기 시작해 병실에 세 여자의 울음소리가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연출했다.
“엄마, 이모…. 그리고 지영아.”
“왜?”
“어디 불편해?”
“의사 선생님 불러올까?”
연신 울고만 있던 세 여자를 불렀더니 동시에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서인우는 골이 흔들렸지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괜찮아요. 다들 그만 울라고.”
“어? 언니 그만 울어. 인우 힘들겠다.”
“내가 언제 울었다고? 너나 눈물 좀 닦아.”
“엄마가 우니까 이모가 더 우는 거 아니야?”
“그러는 너는 아까 다 운 것 같더니 왜 또 울고 난리야.”
또다시 골이 흔들렸다.
골이 부서져도 웃음이 계속 나왔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나를 위해 기도하고 울어주는 모습에 금방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쩍 다리에 힘을 주어봤지만….
무릎 위까지 깁스가 감겨있는 오른쪽 다리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계속 다리 쪽을 쳐다보는 서인우의 시선을 눈치챈 윤지영이 젖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다리 수술은 잘 됐대.”
“그래? 지금은 아무 감각이 없네.”
“깁스해서 시간이 필요하지.”
엄마 이지희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분명히 수술은 잘됐다고 했는데, 네가 꼬박 일주일을 깨어나지 못했어.”
“그러면 사고 난 지 일주일이나 지난 거예요? 우리 [서풍]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지금 죽다 살아나서도 [서풍] 걱정 뿐이지?”
윤지영이 눈을 가늘게 떠 서인우를 노려봤다.
“사고 소식이 있던 날 하루만 문을 닫았고, 지금 장사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곧 마감 시간이라 강진수씨가 또 올거야.”
“강진수? 휴가 갔었는데….”
“휴가에서 돌아오기 전날 오빠 사고가 났고, 도착해서 매일 저녁 여기에 왔었어. 오늘 오빠 깨어난 거 보면 정말 좋아하겠다.”
강진수가 할머니랑 잘 지내고 있고 선물 사서 오겠다는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났다.
돌아오면 휴가는 좋았는지, 어디서 뭐 하며 보냈는지…. 그리고 정다운 매니저와 안상훈 셰프님은 잘 지내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덩치가 산만 한 청년이 인우 네 손을 잡고 펑펑 울더라. 너한테 받기만 했다고…. 꼭 살아서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여전히 서인우의 손을 꽉 쥐고 울고 있는 엄마 이지희를 쳐다보며 인우 이모가 말을 덧붙였다.
“꼭 지금 네 엄마처럼 말이야.”
인우 엄마 이지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눈에서는 이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옆에 서서 핸드폰으로 시간을 체크하던 윤지영이 병실 문을 쳐다봤다.
“진수 씨 올 시간 된 것 같은데…?”
윤지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실 문을 두드리며 강진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어! 사장님! 흐윽.”
“이 청년 또 우네.”
서인우가 의식이 돌아와 가족들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본 강진수가 왈칵 울음을 쏟으며 그대로 달려와 덥석 그를 안았다.
“아! 아프다. 잊었나 본데 나 환자다.”
“사장님. 정신이 들어서 진짜 다행입니다.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성모님. 알라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뭐? 알라님? 하나만 외쳐야 하는 거 아니냐?”
“누가 들어줄지 몰라서 저녁마다 모두에게 다 기도했어요. 사장님 꼭 깨어나시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갑자기 병실이 조용해졌다.
뭔가 싸한 분위기에 설마 하고 돌아보니 세 여자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주 지독한 전염성이 있긴 한 것 같았다.
셋이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병실 문을 열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서풍]은? 요즘 손님이 더 많아져서 장사하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람이 찾아왔어요. 사장님 사고 소식 듣고 바로 다음 날 무작정 주방으로 들어와서 일만 돕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