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정신없이 뛰어대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서인우가 물었다.
“준형아. 자세히 얘기해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뉴스에서 이미 김원상의 모든 범행을 다 밝혔고, 처벌만 남은 상태잖아?”
-그게…. 어제 남성재로부터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도주 우려가 있는 김원상에게 출국 금지명령이 떨어졌어.
“그래, 어제 통화할 때 네가 얘기해줬잖아.”
-그런데, 누군가 김원상을 도운 것 같아. 어떻게 알았는지 전날 그가 해외로 도주했어.
“뭐?”
서인우의 목소리가 주방에 울리자 직원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조용히 직원용 통로로 나온 서인우가 통화를 이어갔다.
“그럼 그자를 처벌할 방법이 없다는 거야?”
-아니,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떻게든 찾아서 합당한 벌을 받게 해야지. 문제는 그게 아니야.
“왜, 그럼 뭔데?”
그런데 갑자기 중식도의 소리가 들렸다.
-서인우! 인우야!
주방도 아니고 통로로 나왔는데도 중식도의 소리가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에 불안해지기 시작한 서인우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김원상의 처벌 문제가 아니면 뭐가 문제인데?”
-그자의 출국 기록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베트남으로 나와 있어. 아무래도 너를 찾아간 거 아닐까 걱정이 돼서.
“여기로? 결국 둘이 만나서 해결해야 한다는 걸까?”
-느낌이 안 좋다. 최근 김원상 거의 이상한 사람이, 아니 자기 아버지도 버리는 괴물이 됐다는 얘기 했지? 조심해.
“그렇다고 설마 이상한 짓까지 하진 않을 거야. 그래도 한때 요리에 빠졌던 중식계의 유망주였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항상 조심하라고. 알았지? 여기서도 계속 그자를 찾는 일에 모든 인력을 다 동원하겠다고 했으니까 금방 잡히긴 할 거다.
이준형과 통화를 마친 서인우는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답답한 가슴을 쭉 펴고 깊게 심호흡을 하던 서인우의 귀에 계속해서 중식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 무슨 일이야?’
-너 괜찮은 거지? 내가 애타게 불렀는데 어디 있는 거야?
‘지금 바로 주방으로 들어갈게.’
주방으로 다시 돌아온 서인우를 향한 시선이 한둘이 아니었다.
통화를 하는 사이사이 들렸던 내용에 직원들 모두 긴장한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별일 아닙니다. 다들 각자 일 보세요.”
자연스럽게 중식도가 있는 자리로 돌아온 서인우는 항상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인 중식도를 보고 안심을 했다.
‘여기도 아니고 멀리 통로에까지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잖아?’
-난…. 난 말이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고.
‘갑자기 왜 그러는데?’
-조금 전에 번뜩하고 영상이 하나 지나갔어. 그런데…. 정말이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상이었다.
서인우 또한 이준형의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심장이 이유 없이 뛰었다.
왜 이러는 걸까?
‘어떤 영상이었는데?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거야?’
-인우 너…. 어, 어떻게 안거냐?
‘뭐? 정말 무슨 장면을 본 건데? 자세히 얘기해줘.’
-나…. 너무 무섭다. 이럴 때는 내 능력이 저주 같아서 정말 싫다.
중식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항상 장난기 섞인 말로 떠들어대던 중식도가 착 가라앉은 소리로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인우를 긴장시켰다.
‘이제 본대로 얘기해봐. 나 들을 준비 됐어.’
-너, 서인우 네가….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지 중식도의 목소리가 끊겼다.
‘괜찮으니까 말해. 뭔데? 내가 죽기라도 했어?’
-달리는 차가 너를 치고 달아나버렸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너는 의식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고.
괜찮다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분명 말했지만…. 막상 중식도를 통해 들은 얘기들은 서인우를 마구 흔들었다.
쨍그랑.
무심코 잡고 있던 국자가 손에서 떨어져 커다란 소리를 냈다.
“사장님.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어디 아파요?”
사소한 실수 한 번 보인 적 없던 서인우가 국자를 떨어트리는 모습에 다들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미안합니다. 딴생각하다가 그만. 이래서 주방에서는 딴생각하면 안 되는데….”
서인우가 억지로 웃으며 넘기려 했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이 사고를 당할 거라는 중식도의 말을 들은 직후다.
지금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을 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준형의 전화도 중식도가 본 영상도 모두 서인우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사부 덕에 미리 알았으니 조심, 또 조심 할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서인우가 중식도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알려줘서 고마워.’
크게 심호흡을 하고 차가운 물을 한 컵 가득 들이켰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주문 들어온 요리를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 * *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의 술집에 홀로 앉은 김원상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독한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었다.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의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어댔다.
‘서인우, 이 새끼가 다 알고 나를 물 먹이려 했단 말이지? 이 김원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어. 이 새끼 내가 아주 없애버릴 거야.’
술보다 더 독한 눈빛의 김원상을 옆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베트남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추적될까 봐 호텔에도 못 가고 이게 무슨 꼴이야? 절대 나만 당하지 않을 테니까 두고 봐!’
위스키 병의 거의 반이 다 비었을 때쯤 술집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김원상이 있는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간 남자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울리는 벨소리에 화들짝 놀란 김원상이 종료 버튼을 막 누르려고 하자 그 남자가 의자를 꺼내 앉았다.
“뭐야?”
남자가 다시 통화버튼을 눌러 그의 핸드폰이 울리는 걸 확인시켜 주자 그제야 화면에 뜬 번호를 본 김원상이 몸을 숙이며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차는? 차는 준비 된 건가?”
“근처에 세워 놓습니다. 돈은?”
“차를 확인해야 돈을 주지. 내가 그깟 푼돈 가지고 장난칠 사람인 줄 알아?”
김원상이 가방을 조금 열어 돈뭉치를 슬쩍 보였다.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남자가 꾸벅 인사를 했다.
“차와 핸드폰 말고 또 모든 필요한 거 말하면 다 됩니다. 돈이면 오똔것도 준비 됩니다.”
“잘 곳이 필요해. 호텔은 안되고, 호텔만큼 깨끗하고 좋은 곳을 하나 구할 수 있나?”
“돈은 올마나?”
“이런 제길. 돈은 얼마든지 준다고! 얼마면 되는데? 어?”
남자가 계산기를 꺼내 액수를 찍어 보였다.
김원상은 좀 비싸다 싶었지만, 지금은 이 남자 외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조용히 술집을 빠져나온 둘은 남자가 세워 놓은 차로 다가갔다.
검은색 세단에 올라탄 김원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좀 전에 말한 숙소는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차로 20분 정도 가묜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굴 만나?”
“그 숙소.”
남자의 어설픈 한국어가 몹시나 맘에 들지 않은 김원상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럼 안내해봐. 오늘은 그 숙소로 가도록 하지.”
“네. 그러믄 출발 홉니다.”
남자가 운전하기 시작하자 김원상이 차창 밖을 한참 쳐다보다 다시 물었다.
“여기서 내가 말한 그 백화점은 얼마나 걸리지?”
“그 한국 백호점 말이죠? 고기는 가는 길에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가면서 알려 줍니다.”
‘서인우!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거냐? 잠시만 기다리라고. 곧 네 아버지를 만나게 해줄 테니까.’
괴기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김원상을 힐끗 쳐다본 남자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는 것 같았다.
5분쯤 아무 말 없이 운전대만 잡고 있던 남자가 길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저 빌딩이 올해 오픈한 한국 백호점입니다.”
화려한 거리, 많은 인파로 둘러싸인 MS 백화점을 빤히 쳐다보던 김원상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기에 있단 얘기지?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하고 내일 만나자고. 푹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네?”
“아니야. 혼잣말이야.”
룸미러로 김원상을 연신 힐끗거리던 남자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차에 크게 들렸다.
백화점의 위치를 확인한 김원상이 오늘 하루 쉬지 않고 울어대던 핸드폰의 부재중 통화 내역과 문자를 하나하나 살폈다.
쭉쭉 읽어내려가던 김원상의 눈이 동생 김서원이 보낸 문자에 그대로 꽂혔다.
[오빠! 전화 좀 받아! 지금 어디 있어? 정말 베트남이야?]
[나랑 통화 한 번만 해. 내 전화 좀 받아달라고. 내 소원이야.]
[오빠! 제발 더는 죄를 짓지 마! 그 사람 다시는 힘들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
[서인우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내가 절대 용서 못 해. 내 말 명심해!]
그 뒤로도 김서원의 문자는 계속 이어졌다.
‘정신 나간 계집애. 제 오빠가 구속되게 생겼는데, 머릿속엔 서인우 그 새끼뿐이네. 그 사람 힘들게 하지 말라고? 그래. 내가 편하게 해주려는 거야. 얼마나 아빠가 그리웠겠어?’
창문을 열어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소리까지 내며 혼자 웃고 있는 김원상의 얼굴은 마치 영혼을 팔아버린 악마처럼 보였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핏기가 없이 하얘질 정도로 손에 더 힘을 주었다.
* * *
직원들이 다 빠져나간 후 결국 다리에 힘이 빠져버린 서인우는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사부! 우리 아빠의 죽음도 보였었지?’
-그랬지. 그 공포를 다시 느끼게 될 줄 정말 몰랐다.
‘아빠는 사부의 얘기를 듣고도 모든 걸 운명으로 받아들였어. 하지만, 나는 달라.’
-응? 그, 그렇지. 내가 본 건 네가 걷다가 차에 치이는 거였으니까, 그냥 매일 차만 타고 다녀. 절대 걸어 다니지 마.
‘그럴 수는 없어. 난 아침 운동도 똑같이 할거고, 출퇴근도 전처럼 걸어 다닐 거야.’
중식도가 답답한지 크게 빙그르르 돌았다.
-길을 걷다가 차에 치였다니까! 얼핏 보인 장소가 이 백화점 근처였어. 출퇴근만이라도 차를 타고 다니자. 응?
‘아니! 대신 항상 사부와 함께 할 거야. 혹시 내게 위험이 닥치면 사부가 알려줘. 난 사부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어.’
-이런 상황에도 나를 그렇게 믿어주는 건 고마운데…. 나 그 정도로 전지전능하진 못해.
서인우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 실망했냐?
‘아니. 사부는 절대 내가 위험에 처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분명 사부가 말한 그 차가 내게 달려들 때 뭔가 보일 거니까 그때 꼭 나를 구해줘.’
-아놔. 얘가 자꾸 뭘 믿고 이래? 나 자신 없다니까. 지금 장난할 때 아니라고. 그러면, 며칠이라도 쉬자. 집에서 아예 나오지 마라 그냥.
‘내 목숨이 달렸어. 난 아직 할 일이 많아서 절대 지금 죽을 수 없어.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고!’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중식도를 한참 쳐다보던 서인우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난 항상 했듯이 최고의 재료를 사러 다닐 거고, 더 열심히 요리도 할 거야.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일 때문에 벌벌 떨며 숨어있을 수는 없어.’
-으윽! 정말 괴롭다. 넌 내가 얼마나 두려운지 상상도 못할 거야.
‘아니. 사부가 본 장면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어떤 심정일지는 충분히 이해해. 내가 처음 아빠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갈 때 그때 느낀 공포감을 똑똑히 기억하거든.’
-그러면 제발 조심해. 내가 어떻게든 너를 지켜볼게. 절대 나와 떨어져 있지 말고.
‘알았어. 오늘 집에 갈 때부터 항상 가방에 넣고 같이 다닐게. 이렇게 평생 사부와 함께 할 거야.’
적막이 내려앉은 주방에 불을 끄고 가방에 중식도를 잘 넣어 백화점을 나왔다.
서인우도 사부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백화점 입구를 나와서부터 모든 도로에 차가 꽉 차 있었다.
씽씽 달리는 많은 차 중에 어떤 게 갑자기 달려들지 알 수 없었다.
‘사부! 나 좀 떨리네?’
-그거 내 단골 대사인데. 넌 떨면 안 되지?
‘휴. 집에 가는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빨리 가서 쉬고 싶다.’
-내가 봤던 장면은 확실히 백화점 바로 앞이었어. 이제 벗어났으니 안심해도 될 거야.
‘고마워, 사부. 이제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아.’
집에 들어와 샤워를 마친 서인우는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