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남성재와 계약서 작성을 위해 다시 만난 카페.
발걸음이 가볍게 카페로 들어오던 남성재를 보며 서인우와 이준형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안녕하세요. 아직 5분 전인데, 벌써 와 계시네요?”
“네, 서인우 대표는 항상 일찍 준비하는 성격이라서요.”
“매사에 정확하시네요.”
각자 원하는 음료를 시켜 앞에 놓고는 본격적인 계약 얘기를 시작했다.
“여기 계시는 이 사장님이 시간이 없으셔서 어제 협회와 급하게 연락하느라 진땀을 좀 뺐습니다.”
“그러셨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얘기가 됐나요?”
“우선 협회 측하고 얘기는 잘 됐습니다. 워낙 처음부터 서인우 셰프님의 [서풍]을 좋게 봤기 때문에 어떤 조건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저도 어제 말씀드린 대로 계약서 내용에 어떤 문제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은 한 최선을 다해서 해볼 생각입니다.”
“서로 의견이 잘 맞아서 잘 됐습니다. 그러면 계약을 진행해 볼까요? 제가 작성해 온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보시고 얘기하도록 하죠.”
남성재가 김원상과 몇 차례 의논하며 작성한 계약서를 서인우에게 건넸다.
서인우와 이준형이 마치 시험공부 하듯 계약서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본 계약은 “갑”이 “을”의 경영에 투자하기로 함에 따라 그 구체적인 내용과 필요한 제반 사항을 결정하고 “갑”과 “을” 사이의 권리의무관계를 명확히 규정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투자의 전제 조건]
-본 계약에 따른 투자를 위해“갑”은 “을”에 다음의 조건을 충족할 것을 요구할 수 있으며,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본 계약은 성립되지 못하고 파기되는 것으로 한다.
위에 명시한 사업장 및 기타 계약서에 작성된 내용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다.
교육을 위해 선별된 직원의 역량 부족에 의한 결과는 “갑”이 책임지지 않는다.
복잡한 내용은 이준형이 철저하게 되새겨 보며 확인했다.
서인우는 자신이 요구했던 조건에만 초점을 두고 있었다.
“다 확인 하셨나요?”
“네, 그러면 이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면 바로 어제 계약한 잔금이 입금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여기 명시되어 있는 대로 오늘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을 지급한 후, 10일 이내에 투자금을 현금 입금하시면 됩니다.”
계속해서 서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이준형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서인우가 눈으로 물었다.
‘어때? 문제없겠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이준형이 남성재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다.
“이 투자금은 여기 적혀 있는 대로 쌍방이 함께하는 거 확실하죠?”
“네, 협회 측에서 모든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합의 하에 진행하도록 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바로 계약을 진행하도록 하죠.”
순간 코를 벌름거리던 남성재가 자기가 준비해온 위임장과 기타 회사 서류들을 주루룩 펼쳐 확인시켜 주었다.
이준형 역시 가방에서 준비해온 회사 서류를 건넸다.
복잡한 과정을 다 마친 후 남성재가 바로 계약서를 찍어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이준형이 움찔하며 서인우를 쳐다봤다.
저 서류가 누구에게 들어갈지 뻔히 알고 있는 둘은 표정 관리에 더 신경 쓰며 평온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지금 협회에 계약서 사진 보냈으니 바로 답이 올 겁니다. 커피 한 잔 더 시킬까요? 아니면, 뭐 다른 음료라도?”
“이거면 됐습니다.”
굉장히 홀가분해 보이는 남성재가 짧은 한숨과 함께 손등으로 이마를 쓱 닦았다.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서인우 셰프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돼서 보람 있습니다. 끝까지 거절하셨으면 전 회사에서 잘렸을 수도 있다니까요.”
실실 웃어가며 너스레를 떨고 있던 남성재의 핸드폰에 문자를 알리는 경쾌한 음이 울렸다.
“지금 바로 대표님 회사 계좌로 잔금 입금했다고 하니까 확인해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계좌에 입금된 액수를 확인한 서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입금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닌데, 우리 협회에서도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서인우 대표님과 함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만 한 번 더 알아주세요.”
“생각보다 빠른 조처에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지금 계약금 입금했습니다. 회사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네, 잠시만요.”
서인우가 10%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선뜻 입금하자 잔뜩 신이 난 남성재가 문자를 보내놓고는 남은 음료를 벌컥 들이켰다.
“제가 생각해도 [서풍]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우리 협회에서 이렇게까지 [서풍]을 열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거든요.”
“이제 저는 협회에서 온 전문 요리사분들께 제 모든 요리 레시피를 전수해주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그러면 잔금은 언제쯤….”
“양측이 합의한 계약서에 10일 이내라고 되어 있으니 그 사이 준비해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우리 협회에서도 최고로 실력 있는 요리사를 엄선하도록 신경 많이 쓰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거래가 성사되어 매우 기쁩니다. 아주 뿌듯해요.”
이준형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얼굴이었다.
남성재와 몇 차례 인사를 나누고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이준형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아휴, 긴장해서 오줌 지릴 뻔했네. 이제 빨리 다음 단계 진행해야겠다.”
“우리는 이미 이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증거 자료를 입수한 상태야. 문제는 언제 터트리느냐지.”
“정리를 좀 해보자. 우리가 저쪽에 5억을 요구해서 입금된 상태고, 다시 저놈들한테 계약금으로 2억을 보냈으니까 금전적인 손해는 전혀 없어.”
“그렇지. 계획대로 됐으니까.”
“저쪽에서는 우리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곧 남은 18억이 입금될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겠지. 오늘 2억이라는 큰돈을 바로 보냈으니까.”
서인우의 표정이 잠시 어둡게 변했다.
“김원상에게 3억이 큰돈은 아니겠지만, 내가 바라는 건 이번 기회에 그 부자가 습관처럼 벌이는 악행을 막고 싶다는 거 그것뿐이다.”
“처음 제안서부터 시작해서 오늘 계약서까지 모든 자료는 다 준비됐어. 문제는 그 배후가 김원상이라는 걸 밝혀야 하는 거지.”
“모든 내용은 중간에 일을 진행한 남성재가 다 알고 있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증거들을 모아 경찰에 넘기는 일이야.”
이준형이 다 마신 커피잔에 남은 얼음을 입에 털어 넣고는 아그작 깨물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한국 돌아가는 대로 바로 처리할 테니까.”
“김원상 만만하게 보면 안 돼. 이미 경찰이나 검사 쪽에도 꽤 힘이 닿는 것 같아.”
“당연하지. 너 안상훈 셰프님 사고 때 기억 안 나냐? 어떻게 선수 쳤는지. 확실한 사람을 통해 정확하게 처리할게.”
서인우는 잔뜩 독기가 오른 듯한 이준형의 눈을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보였다.
“왜? 왜 또 그렇게 웃고 그러냐?”
“고맙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도 내가 얘기했지만, 난 너라서 뭐든 가능했어.”
“듣기 좋은 소리긴 한데, 사실 우리가 이렇게 성공하게 된 건 네 실력과 성실함, 무엇보다 주위 사람을 우선시하는 네 소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코끝이 찡해지는 이준형의 진심 어린 한마디가 힘이 되어주었다.
처음부터 앞으로 언제까지든 서인우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줄 이준형이 있어서 감사한 하루였다.
* * *
이준형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정확히 사흘이 지났다.
저녁 장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종일 기다리던 이준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준형아. 안 그래도 소식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남성재가 결국 모든 범행 사실을 다 밝혔어. 중요한 건 김원상과의 통화 내용과 이번 일로 받은 돈이 김원상의 차명 계좌라는 것까지 다 밝혀졌다.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김원상도 남성재도 다 끝이지. 내일 저녁에 뉴스에서 모든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거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김원상 출국 금지 명령도 내려질 거야.
“알았어. 네가 정말 수고가 많았다. 또 다른 소식 있으면 알려줘.”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서인우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던 김형식의 아들 김원상의 모든 악행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인우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어떤 일로도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김형식이 수감되면서 모든 악연은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또다시 그들과 얽히는 일은 정말 다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뱉은 서인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새 직원들이 일사천리로 주방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다.
“오늘도 수고 많았습니다. 다들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보도록 합시다.”
물 빠지듯 직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조용한 주방에 중식도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왜 이렇게 기분이 저기압이냐? 고기 먹을래?
“응? 갑자기 무슨 고기?”
-저기압에는 고기 앞으로 키키키키키.
오랜만에 듣는 중식도의 요상한 웃음소리다.
“어디서 자꾸 이상한 소리는 주워듣는 거야?”
-주워듣는 거 아니고, 내가 워낙 습득력이 빨라.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지. 그나저나 무슨 일 있어?
“결국 김원상의 악행이 내일 전 국민에게 밝혀질 거야. 같은 중식 업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서풍]과 [만가복]인데….”
-그런데 뭐?
“상생할 수도 있었잖아. 꼭 이렇게까지 상대방을 넘어트려야만 성공하는 건가?”
-넌 너를 따라가고 싶어 눈이 뒤집힌 그 사람들의 열등감을 몰라서 그래. 특히 김원상 그놈은 제 아비한테 늘 너와 비교되면서 살았으니까.
다음날 오후 한국시간 7시.
이준형이 말한 대로 저녁 뉴스 시간에 김원상이 남성재를 사주해서 벌인 사기극이 전국에 방송을 타고 나왔다.
곧 시작될 저녁 장사를 위해 막 준비하고 있던 서인우와 [서풍] 직원들은 홀에 있는 대형 화면으로 뉴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 사장님. 저게 사실이에요? 그동안 사장님을 찾아왔던 그 협회 지부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사, 사기꾼이었던 거에요?”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똑소리 나는 김예은 매니저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네, 저 뉴스에서 보도한 내용은 다 사실입니다. 다행히 저와 전에 왔던 제 친구가 미리 눈치채고 대처를 한 상태라 손해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나쁜 놈들. 저 [만가복]이 맞죠? 사장님 아버지….”
눈이 벌겋도록 흥분한 강진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서인우 또한 착잡한 마음에 조용히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뉴스가 나가는 순간부터 서인우의 핸드폰이 정신없이 울어댔다.
한국에서 이모부가 전화를 걸어 간단히 통화하며 놀라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어머니에게 다시 한번 안심시켜 드리는 통화를 했다.
그 후로 최만수 회장을 비롯해, 유현주 팀장, 안상훈 셰프까지 전화와 문자가 줄줄이 이어졌다.
-네 핸드폰 불난다.
‘응, 가족들이 많이 놀란 것 같아. 특히 엄마가 아빠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줄 알고 충격을 받았나 봐.’
-이런 나쁜 개새. 맘먹고 요리만 하고 산다는데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굴어!
‘도대체 무슨 악연인지…. 나도 이제 지겨워. 정말 더는 이런 일 없겠지?’
-그래야지. 에이 쯧.
중식도가 계속해서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시 잠잠하던 서인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상하게 그 진동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해? 전화 안 받아?
‘받아야지.’
핸드폰에 떠오른 이름은 이준형이었다.
“준형아! 뉴스 봤어. 이제 다 끝났다.”
-인우야. 내 말 잘 들어. 아무래도 이게 끝이 아닌 것 같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이준형의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서인우의 ‘쿵’하고 내려앉은 가슴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