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남성재가 카페를 나가고 둘만 남아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계약서를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 일을 진행하려고 하네. 계약금까지 보내면서 말이야.”
“오늘 5천만 원 보냈지만, 내일이면 20억을 받을 수 있는 계약이 성사될 건데 이 정도는 투자라고 생각하겠지.”
“내일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걱정된다. 그냥 사실을 알았을 때 조용히 끝낼 걸 그랬나 싶기도 한데…. 그러면 또 다른 수작을 부릴 것도 같아서 끝까지 해보는 거다.”
이준형이 커피잔이 빈 걸 확인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물을 마셨다.
“그나저나 오늘 북경에서 메일이 온다는 게 무슨 소리야?”
“며칠 전에 북경 갔을 때 통역을 도와준 여기 백화점 파견 직원이 있었어. 장민씨라고 정말 도움 많이 받았거든.”
“그래? 다행이네.”
“장민씨가 그 식당 관련된 자료와 중국 요리 협회에 확인한 내용들을 증거가 될 수 있게 정리해서 보내주기로 했어.”
이준형이 기쁜 눈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정말? 너무 감사하다. 그분은 거기에 오래 계셨나 보네?”
“원래 전공도 중국어고, 주재원으로 올해가 2년 넘어간다고 하더라고.”
“해외 주재원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해. 넌 베트남 생활 재미있냐?”
서인우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바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난 내 요리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래 있고 싶지는 않다.”
“왜? 새롭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
“엄마도 걱정되고 안 셰프님도 잘하고 있는지 한 번씩 보러 가고도 싶고.”
“그래. 처음부터 오래 있을 생각으로 온 건 아니니까. 그래서 나한테 마포 건물 계약을 알아보라고 한 거 아니냐?”
이준형이 서인우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맞아. 지금 같이 일하는 셰프 중에 누구라도 여기를 책임지고 할 만큼 실력이 되면 다시 한국으로 갈 생각이다.”
“오늘 봤던 그 어린 친구?”
“강진수? 진수는 나랑 같이 한국 들어가야 해. 여기서 나한테 일대일로 제대로 배우고 돈도 많이 모아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지.”
“그럼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거네?”
“처음부터 해외지점 근무를 원했던 셰프가 있어. 지금 열심히 레시피를 알려주고 있고.”
서인우가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준형에게 물었다.
“마포 건물 지금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있냐?”
“아버님이 하시던 [서풍]이 있을 때보다 워낙 큰 쇼핑몰로 바뀐 상태라 매입가가 너무 높아서 계속 지켜보고 있어. 사실 그 얘기도 하려고 이번에 급하게 온 거거든.”
“힘들 거 같아?”
“그게 아니고, 최근 상권이 그 아래쪽으로 바뀌고 있어서 매매가가 조금씩 내려가고 있어. 내가 알아보니까 그 아래로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거리가 조성된 게 원인인 것 같아.”
“그래? 잘됐네.”
이준형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손을 가로저었다.
“아니지. 우리도 상권을 따라 움직여야 장사가 잘되지 않겠냐? 점점 죽어가는 상권에 거액을 투자하는 게 맞나 싶어서 말이야.”
“너도 잘 알겠지만, 그 건물을 사서 [서풍]의 본사를 만들어 직접 운영하는 게 내 목표였어.”
“당연히 잘 알지. 그런데, 네가 목표를 세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이지.”
서인우가 이준형을 보고 멋진 미소를 날렸다.
“왜 오랜만에 설레게 그런 미소를 날리고 그러냐? 난 이미 우리 서영씨가 있는데?”
“미친놈. 네가 또 오래 진지했지?”
“너 막 제대하고 우리 처음 너희 집 옥상에서 맥주 마셨던 날 생각나네. 참 재미있었는데….”
“한국 들어가면 또 그렇게 보낼 건데 뭐. 우린 달라진 건 하나도 없잖아, 안 그래?”
이준형이 서인우를 보고 픽 소리를 내 웃었다.
“너 한국 들어와도 난 연애하느라 바쁠 텐데…. 너랑 놀아줄 시간이 있을랑가 모르겠네.”
“농담 그만하고, 그래서 마포 건물은 언제쯤 계약 가능할 것 같은데?”
“한, 두 달 흐름만 더 조사해보고 알려줄게. 계속 지켜보고는 있는데, 네 생각을 더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았어.”
“상권은 내가 바꿔놓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볼게. 중요한 건 아빠의 [서풍]이 있던 자리 그 건물이어야 한다는 거야.”
“오케이. 확고한 네 생각 알았으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진행해야겠다.”
“그래, 그 건물을 우리 회사 본사 건물로 운영하면서 다른 곳들도 같이 신경 써줘야지. 그래야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이 되지 않겠냐?”
말을 하는 서인우의 얼굴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언젠가 네가 그런 네 목표를 말했을 때 나는 참 답답하다고 생각했었다.”
“왜? 뭐가?”
“보통 돈을 벌어야겠다, 성공해야겠다고 목표를 세우면 거기에 다른 사람은 없지 않나? 내 성공만을 목표로 삼기 마련이지.”
“결국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는 게 더 큰 기쁨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그래서 직원 복지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 나도 잘 알거든?”
이준형이 쑥스러운 듯 어깨를 들어 올렸다.
“나야 네가 하는 거 흉내만 좀 내는 거지. 그래도 우리 직원들이 만족도는 높다고 하더라. 다행이지.”
“너희 회사 하반기에 또 직원 채용한다면서?”
“지방에 있는 백화점과 마트까지 확장하려니까 직원이 더 필요해서 몇 명 더 채용하려고.”
“그러면 이제 직원 20명이 넘네. 네 어깨도 무겁겠다.”
“결국 대표님인 님의 어깨 무게이기도 합니다.”
둘이 잠시 쳐다보고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서인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시 가서 저녁 장사 준비해야겠다. 너 구경할래, 아니면 들어가서 쉬고 있을래?”
“네가 교육하고 있는 셰프들 실력 한 번 볼까? 방해 안 되게 잠시 구경하다가 백화점 근처 좀 돌아다닐게. 바쁜 시간 끝나면 연락해.”
“그러자, 그럼.”
둘이 같이 [서풍]으로 돌아왔을 때 막 저녁 식사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희가 할 수 있습니다. 친구분도 오셨는데, 왜 또 들어오셨어요?”
요즘 부쩍 자신감이 생긴 오상준이 서인우가 급하게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한마디 건넸다.
“우리 별로 안 친해요.”
이준형의 농담에 다들 한바탕 크게 웃고는 바로 요리에 들어갔다.
“2번 테이블 누룽지탕, 짜장, 짬뽕 둘. 5번 테이블 탕수육, 서풍 만두, 백 짬뽕 둘. 마파두부 덮밥. 바로 시작합시다.”
마치 훈련 시작종이 울리기라도 한 것처럼 각자 자기가 맡은 일들을 뚝딱 알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오상준씨, 오늘은 누룽지탕 완성해보세요. 강진수 씨가 5번 테이블 탕수육 완성하도록 하고.”
“네, 셰프!”
베트남 직원들이 요리하기 편하게 재료들을 준비해 주었다.
두 개의 웍에 짬뽕과 백짬뽕을 동시에 만들고 있는 서인우를 한참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던 이준형이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너 어째 더 대단해진 것 같다? 중식의 고수가 아니라 이제 거의 신급 경지인데?”
-지금 네 친구가 나 불렀냐?
‘사부도 들었지? 지금 내 실력이 신급 경지라잖아?’
-내가 하는 칼질을 보고 하는 말인 거 모르겠냐?
‘에이, 아무리 사부와 제자 지간이지만 말은 바로 해야지. 지금 두 개의 웍에 두 가지 요리를 동시에 하는 나를 보고 하는 소리지.’
-내가 전에도 이 말 했지?
‘뭐?’
-재수 없다고. 흥 칫 뿡이다.
‘못산다 정말.’
여전히 웃는 얼굴로 두 개의 웍에 맑은 백 짬뽕과 빨간 기름이 자르르한 짬뽕을 완성해놓은 서인우가 바로 마파두부 덮밥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띵!
탕수육을 완성해 벨을 누른 강진수가 다가왔다.
“마파두부 덮밥 바로 만들겠습니다.”
“오케이.”
그동안 연습했던 부드러운 연두부 썰기를 서인우의 친구 이준형 앞에서 선보이고 싶은 듯했다.
샥샥 샤사샥!
부드러운 연두부를 깨지지 않게 네모 모양으로 잘라 놓은 강진수가 바로 파와 당근을 다져 준비해 놓았다.
화력을 세게 올린 웍에 고추기름을 넣고는 다진 파와 당근을 볶다가 다진 고기를 넣어 볶았다.
간장과 물, 청주를 넣은 후 조심스럽게 연두부를 넣고 두반장과 굴 소스 등을 넣어 보글보글 끓였다.
“왜 저렇게 보고만 있냐? 바로 저어주지 않고?”
이준형이 또다시 귓속말로 물었다.
“연두부는 소스가 끓기 전에 저어주면 다 으깨져. 이제 끓기 시작하니까 저어주잖아.”
“끓으면 뜨거워져서 더 으깨지는 거 아니냐?”
“두부는 단백질이라 끓고 나면 응고돼서 단단해지거든.”
“그래서 네가 만들어준 마파두부는 연두부를 사용했는데도 모양이 살아있었구나. 내 친구 대단한데?”
이준형의 목소리가 커지자 서인우가 팔을 잡아끌었다.
“너 이제 가봐라. 내가 바쁜 시간 좀 지나면 다시 연락할게.”
“방해되냐?”
“응, 그것도 많이.”
“알았다. 나도 더워서 막 나가려고 했거든!”
웃으며 나가는 이준형을 따라 나가지는 못했다.
그 뒤로도 주문이 정신없이 몰려 들어왔다.
시간이 갈수록 이준형의 말대로 펄펄 끓는 주방이 되어갔다.
* * *
카페에서 나온 남성재는 조용한 곳을 찾아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김원상에게 둘이 서로 사인한 계약서를 사진 찍어 보내고 바로 연락을 달라는 문자를 함께 보냈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들이켰다.
“진땀을 뺐더니 목만 계속 마르네. 설마 서인우가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하긴 그러면 계약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겠지만.”
연신 물을 마시며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김원상으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회장님, 방금 서인우측에서 제시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왔습니다. 사진 보셨죠?”
-내 돈이 들어갔는데, 실수는 없었겠지?
“네, 오늘 정식 계약서 작성해서 내일 계약하면 이제 다 끝입니다.”
-계약서 작성해서 바로 나한테 먼저 보내. 그리고 다시 통화하자고.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남성재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좀 쉬다가 저녁이나 먹고 시작하려고 했더니, 사람 쉬는 꼴을 못 보네. 아비나 아들이나 일 시켜 먹고 부려 먹는 데는 도가 텄구먼.”
살짝 짜증이 난 남성재가 노트북을 켜며 물 대신 맥주캔을 하나 따서 한꺼번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오늘 가져간 약식 계약서에 서인우가 요청한 문구를 넣어 새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성한 계약서를 프린트해 다시 방으로 들어온 남성재가 사진을 찍어 김원상에게 보냈다.
“아무래도 이 문구가 걸리기는 하는데…. 계약서에 반드시 있어야 할 내용이긴 하지 뭐.”
계약서를 살피며 중얼거리고 있던 남성재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회장님. 계약서 보셨죠?”
-단 한 가지라도 사실과 다른 사항이 있을 경우 이 계약은 무조건 파기한다고? 그 자식 뭔가 아는 눈치였나?
“아닙니다. 투자 계약에서 반드시 들어가야 할 문구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걸 굳이 꼬집어서 말한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서인우를 호락호락하게 보면 큰코다친다고 하지 않았나?
남성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거의 다 마셔버린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서인우가 워낙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하나하나 짚어가며 다 따져봤습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요구한 문구는 마음 놓고 투자하게 하려면 더 보란 듯이 적어놔야죠.”
-그래서 그 문구처럼 계약을 파기해버리면 어쩌려고?
“아무것도 모르는 서인우가 뭔가를 의심하고 눈치챘을 때는 저는 이미 잠적하고 없는데요, 돈을 되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저를 못 찾을 거니까요.”
-계약 성사돼서 돈 들어오는 대로 착수금 넣을 테니까 바로 얘기된 대로 멀리 떠나라고.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숨어있겠습니다.”
김원상과 통화를 마친 남성재가 바로 서인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계약서 완성됐습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는 개운한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위해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