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김원상의 목소리가 누그러진 걸 느낀 남성재가 목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지금 입점하는 백화점마다 매출 1위를 찍고 있는 [서풍] 과 같은 중식당을 열기 위해 5억을 투자해야 한다고 하면 아마도 투자자가 줄을 섰을 겁니다.
“그래서?”
-단지 그 5억만 투자하면, [서풍]의 모든 레시피를 전수해준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다고 속인 북경의 그 식당 임대료까지 정확히 반으로 나눠 투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서인우가 요즘 잘 나간다고 아주 간이 커졌군. 북경 제일 중심가에 있는 3층짜리 건물 임대료를 낼 정도로 [서풍]의 성공을 자신한다는 거지?”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남성재가 대답했다.
-네, 이번에 북경에서 그 건물을 본 후 이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너무 욕심이 난다고 몇 번을 그러더라고요.
“멍청한 자식. 이번 기회에 그동안 벌어들인 재산을 모두 빼앗아버려야겠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말이야.”
-네, 이미 한국과 베트남까지 사업을 벌여놓은 상태라 자금에 문제가 생기면 절대 회복하기 어려울 겁니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김원상이 ‘씁’하는 입소리를 냈다.
“서인우가 이번 기회에 갑자기 프렌차이즈를 시작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제안이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매뉴얼을 만들어 놓으려는 것 같긴 했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거면 우리가 그놈을 도와주게 되는 꼴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 그것도 잘 지켜보도록 해!”
-하지만, 회장님. 그러기 전에 우리에게 큰 재산을 넘기게 될 텐데요. 무슨 돈으로 프렌차이즈 사업을 하겠습니까?
“자신 있나? 끝까지 끌고 가서 그놈 돈을 뺏어올 자신이 있냔 말이야?”
남성재가 옆에 놓은 물을 들이마셨다.
-처음부터 회장님 계획이 워낙 잘 먹혔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서인우가 북경 식당을 보고 와서 야망이 커진 것 같습니다.
“매번 남들 도와주기나 앞장서고 자기 앞길은 챙길 줄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역시 돈맛을 보고 나니 사람이 달라지는군.”
-그럼요. 그런 돈맛을 봤는데 어떻게 멈추겠습니까?
“역시 돈은 사람을 움직이지. 알았으니까 일 진행해! 내 돈이 들어가는 만큼, 서인우의 투자도 확실히 계약서에 적도록 명심하고!”
-네, 그럼 내일 연락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라도 실수하면 재미없을 거야. 당신 목줄은 내가 잡고 있다는 거 잊지 않았겠지?”
통화를 마친 남성재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린놈이 회장직에 앉았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이네, 말투까지 제 아비 흉내 내면서 재수 없게. 하긴, 뭐. 나야 이 일로 돈만 받으면 끝이니까.”
거의 마셔버린 생수병을 잠시 쳐다보던 남성재가 냉장고를 열어 맥주캔을 하나 꺼내 마셨다.
“내일 계약서 작성하고 나면 중간 성과금을 좀 뜯어내야겠어. 나도 중간중간 뭐 생기는 게 있어야 더 열심히 할 거 아니야.”
다시 맥주를 들이켜는 남성재의 입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오랜만에 만난 이준형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서인우는 평상시처럼 출근해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왜 혼자 왔냐? 네 동업자는?
“더 자라고 조용히 나왔지. 술도 많이 마시기도 했고.”
-일어나면 해장 타령 하겠구만.
“백 짬뽕 달라고 할 거야. 배추랑 조개, 매운 고추 더 넣어 시원하게 끓여주려고.”
중식도와 대화하고 있는데 누군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강진수.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사장님, 혼자 계셨어요? 분명히 누구랑 얘기하고 계신 것 같았는데….”
-딱 걸렸다. 얘기 잘해라. 까딱하면 한순간 이상한 사람 된다.
서인우가 잠시 당황하다 핸드폰을 가리켰다.
“친구랑 막 통화 끝났어. 그나저나 넌 아직 출근 시간까지 1시간도 더 남았는데 왜 벌써 나온 거야?”
“사장님 도와 재료 준비도 하고, 또 저 휴가 가면 감각 잃을까 봐 연습도 하려고 겸사겸사 일찍 나왔어요.”
-어쭈, 제법이다.
‘그러게. 나이와 다르게 볼수록 듬직하단 말이야.’
-인생을 얼마나 일찍 알게 되느냐지,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네가 경험해봐서 잘 알잖아.
-맞아, 그래서 더 기특하네요.
옷을 갈아입고 앞치마를 단단히 묶고 나온 강진수가 서인우 앞에 놓인 재료들을 알아서 척척 손질하기 시작했다.
“피곤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더 자고 천천히 나와도 되는데….”
“사장님은 안 피곤하세요? 사실 어제 친구분 오셔서 오늘 좀 늦으실 줄 알고 일찍 나왔는데, 역시 서인우했네요.”
“뭘 해?”
“사장님이 사장님답게 행동하셨다고요.”
둘이 동시에 재료를 손질하며 나는 도마소리가 유난히 경쾌했다.
제법 서인우의 칼질 속도를 따라오기 시작한 강진수가 싱글벙글 입이 가로로 크게 찢어졌다.
“왜 그렇게 웃어?”
“지금 여기 봐봐요. 이제 사장님하고 속도가 거의 비슷해졌어요.”
“그래, 나도 인정한다. 정말 하루가 무섭게 발전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휴가 다녀오면 손 굳을까 봐 할머니한테 가서도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드리려고요.”
“좋은 생각이야. 할머니께 맛있는 것도 많이 해드리고, 휴가비로 좋은 곳도 많이 모시고 가.”
서인우가 칼질을 멈추고 강진수를 쳐다봤다.
“김 매니저가 비행기표 끊어놓고, 휴가비도 입금했으니까 확인하도록 해. 그리고, 지난번 쓰라고 했던 차는 정다운 매니저한테 맡겨놨으니까 할머니 고생하지 않으시게 편하게 모시고 다녀.”
“사장님….”
눈시울이 붉어진 강진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세요? 혹시 제가 불쌍해서….”
“뭐? 강진수가 불쌍한 사람이었나? 그건 몰랐네.”
“네?”
“세상천지에 혼자도 아니고 손자라면 끔찍하신 할머니에 우리 [서풍] 요리를 이렇게 짧은 경력으로 다 해낼 만큼 천부적인 재능까지 갖춘 강진수가? 게다가 키도 크고 젊고 거기에 멋진 여자친구까지 있는 주제에?”
강진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나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었네요.”
“그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들여다볼 줄 알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지금처럼 항상 성실하게만 살아. 젊은 패기답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이 제 롤모델이에요.”
“그건 좀 곤란한데….”
서인우가 장난기 있는 눈으로 피식 웃었다.
“왜, 왜요?”
“다른 건 몰라도 내 이 비쥬얼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
“헐. 사장님이 그런 소리도 할 줄 알아요?”
“응, 원래 은근히 잘난 척이야.”
갑자기 나타난 이준형이 불쑥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잇, 깜짝이야. 너 그 몰골로 여기 들어온 거야? 입구에서 안 잡든?”
둘로 딱 갈라진 머리에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이준형은 그야말로 며칠 밤을 새운 고시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우야. 백….”
“백짬뽕 특별히 더 시원하게 만들어놨다. 잠시만 기다려.”
“두 분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이인가 보네요.”
이준형과 서인우가 잠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내가 몰골이 이럴 때는 여기 사장님이 끓여주는 백 짬뽕이 제일 잘 듣거든요.”
이준형이 이제 좀 창피한지 머리를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 내렸다.
서인우가 매콤한 향이 코끝을 자극하는 백 짬뽕을 가지고 나왔다.
“으억. 국물 끝내준다. 이제 살 것 같다. 그런데, 너 언제 나갔냐?”
“나야 항상 같은 시간이지. 넌 완전 시체던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알람은 맞춰놨지. 내가 사실 이틀 동안 거의 두 시간씩밖에 못 잤어.”
“서류 준비한다고?”
“뭐 이것저것 알아볼 게 많았어. 괜히 내가 게으름피워서 너한테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니까 잠이 오지 않더라.”
강진수가 알아서 둘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게 멀리 떨어져 재료를 손질했다.
“연락은 아직이지?”
“응,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
“그래, 난 해장하고 다시 들어가서 좀 씻고 나올게. 다른 직원들 오기 전에.”
“그래. 내가 연락 오는 대로 알려줄게. 같이 다니지는 못해도 어디 구경이라도 하고 있던지.”
“구경은 됐다. 이번엔 비즈니스로 온 거니까 다음에 같이 하자.”
백 짬뽕 한 그릇으로 해장을 한 이준형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직원들이 출근했다.
각자 알아서 오픈 준비를 하는 동안, 서인우가 먹물 만두를 위한 갑오징어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이제 이 손질도 저희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시는지 한 번만 보여주세요.”
-하긴, 저 친구들이 [서풍] 3호, 4호를 책임질 건데, 대표 메뉴인 먹물 만두 손질은 할 줄 알아야지.
‘그렇긴 한데, 이건 사부의 능력이라….’
-내가 전에 얘기했지? 이제 내 능력이 아니라 네가 이미 그 단계에 도달한 거라고.
서인우가 깨끗하게 손질해놓은 갑오징어를 해물용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중식도를 손에 들고 빠른 속도로 다지듯이 으깨놓았다.
“이건 거의 으깨는 거네요?”
“이렇게 으깨놓은 걸 고기와 섞어서 사람들이 고기만두와는 다른데 부드럽다고 느끼는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이명옥이 다가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따가 잘 쪼사놓은 부추와 소금, 후추, 참기름을 넣고 맨 나중에 생강즙까지 살짝 넣어서 비린내를 없애는 거지라.”
“아! 매일 보면서 정말 궁금했는데, 그게 비법이었네요.”
“그라고 중요한 건 만두를 저을적에 젓가락으로 한방향으로만 저어야 거시기 헌당께.”
“네? 거시기….”
-왜 만두 누님 말을 못 알아듣냐? 그래야 잘 뭉쳐진다는 얘기지. 아따, 답답해부러.
서인우가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강진수와 오상준에게 물었다.
“방금 서풍 만두 총주방장님이 말씀하신 거시기는 뭘까요? 한 방향으로 저어야….”
“속이 잘 뭉친다는 얘기죠?”
“맞아. 이제 좀 알아듣네?”
“그건 아니고, 전에 만두 공부할 때 알아뒀던 내용이에요.”
강진수와 오상준이 배운 대로 열심히 만두소를 만들고 있을 때 드디어 남성재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점심 장사 끝내고 3시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바로 이준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여느 때처럼 백화점을 찾은 많은 사람이 [서풍]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장님, 갈수록 손님이 많아지는데 다음 주에 강진수 씨 휴가 가면 감당이 되겠어요?”
양장피를 선보이고 주방으로 돌아가는 서인우 곁으로 급하게 달려온 매니저 김예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신없겠죠. 그래도 약속은 지킬 겁니다. 내가 더 바쁘게 움직이면 가능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뭐 할 얘기 있어요?”
주문이 밀려 정신없는 서인우를 보고 우물쭈물하던 김예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자리로 가겠습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너무 바쁜 시간이라 물어볼 여유는 없었다.
주방은 요리하는 소리 외에 모두 한마디 할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저기 화구에서 내뿜는 불길과 직원들의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는 시간이었다.
간신히 점심 주문을 끝낸 서인우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잘할 수 있죠?”
“그럼요. 저희가 실수 없이 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일 보시고 오세요.”
“네, 저희만 믿으세요.”
강진수와 오상준, 베트남 직원들이 하나같이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준형과 전에 남성재와 갔던 백화점 카페에 도착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던 남성재가 그들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또 뵙네요.”
이준형을 보고는 반갑다는 듯 인사하는 남성재의 눈동자에 진심은 없어 보였다.
“협회 측하고 얘기가 빨리 됐나 봅니다. 어떤 답을 가지고 왔을지 긴장되는데요.”
서인우의 말에 남성재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보였다.
“제가 협회 측에 서인우 대표님의 뜻을 정확히 전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제안한 가맹비 및 교육비 조의 5억이라는 돈에 다시 회의를 거쳐 최종 결정이 났습니다.”
서인우와 이준형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결정이 됐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