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남성재와 만나기로 한 저녁 7시 30분.
백화점 길 건너에 있는 조용한 카페 이층에 도착한 서인우와 이준형이 남성재를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내 동업자입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준형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 요리 협회 서울 지부장 남성재라고 합니다.”
주문한 음료를 앞에 놓고 서인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북경에서 보고 온 중식당 규모가 정말 엄청나던데요? 협회에서 그렇게 크게 [서풍]을 준비하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협회 회장님의 강력한 바램입니다. 반드시 그곳에 [서풍]을 열어 그 맛과 분위기를 중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거요.”
“그러면 결국 그곳이 [서풍] 체인점이 되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서풍]의 모든 레시피를 정확히 숙지한 전문 요리사가 [서풍]이라는 간판을 걸고 요리를 할 거니까요.”
이준형이 자신이 나설 때가 됐다고 느꼈는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가 서인우 대표님과 긴 시간 의논하고 고민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성재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북경에 우리 [서풍] 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거니, 이건 정식 절차를 밟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정식 절차요?”
“사실 우리 대표님은 [서풍]이 프렌차이즈화 되는 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그럼요. 이미 업계에서 유명하죠.”
이준형이 오늘 서인우에게 보여줬던 파일 중에서 MS 백화점 [서풍]의 매출표를 서류 봉투에서 꺼내 건넸다.
“먼저 이걸 한 번 봐주시죠.”
“이게 뭔가요?”
궁금한 눈빛으로 서류를 살펴본 남성재의 눈썹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저희 서풍이 MS 백화점에 입점한 이후부터 지난달까지 매출을 볼 수 있게 정리한 서류입니다.”
“아! 백화점 매출 1위를 차지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대단하네요.”
“이런 [서풍]을 북경에 연다고 하시니까 저희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조건을 내걸지 않을 수 없어서요.”
남성재가 대화의 맥락을 이해했는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이런 대단한 [서풍]이니까 우리 협회에서도 욕심을 내는 거죠.”
“그 점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북경을 시작으로 이런 비슷한 제안이 또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확실한 절차를 밟아야 할 것 같다는 게 저희 쪽 입장입니다.”
“그 절차라는 게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준형이 또 다른 서류를 한 장 꺼내 보였다.
“앞으로 이런 똑같은 제안이 있을 때 저희 [서풍]에서 제시하는 조건입니다.”
“모든 레시피, 그리고 [서풍] 이름에 대한 로열티로 5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가게 규모와 요리사 교육을 고려해서 책정한 비용입니다.”
남성재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시다시피 그런 좋은 위치에 [서풍]을 열게 되면 서인우 셰프님에게 큰 이익이 될 텐데요?”
“네, 그래서 저도 욕심이 납니다. 하지만, 결국 [서풍]의 모든 레시피를 제공해야 하고, 저와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는 요리사를 배출해야 합니다.”
“협회에서 인정받은 실력 있는 요리사들이라 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분명 [서풍]의 요리를 똑같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서류에서 보여주듯이 협회에 엄청난 매출을 올려 줄 겁니다.”
이준형이 말을 보탰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 베트남 돈도 우리 대표님이 싹싹 긁고 계십니다. 원하시면 여기 백화점에서 지난달 매출표를 요청해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성재가 입술 안쪽을 계속 깨물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던 이준형이 바로 말을 이었다.
“저희가 제안한 로열티 및 레시피 전수비에 해당하는 5억이 입금되면 바로 교육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쪽에서 말한 대로 나머지 비용은 똑같이 부담해서 공동 투자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입을 꾹 닫고 말이 없던 남성재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웃었다.
“한 가지 간과하신 부분이 있는데요. 지금 그 건물은 협회 소유입니다. 임대비용을 고려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당연히 임대비용도 똑같이 반반 투자하는 걸로 해야 정확한 공동 투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그냥 임대료 없이 20퍼센트 지분을 받게 해드린다고 했는데도 굳이 그 큰 액수를 투자하고 공동사업으로 진행하시겠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서인우가 남성재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안심을 시켜주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날려 주었다.
“제가 북경에서 그 식당을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큰 투자를 욕심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곳은 분명히 돈이 되는 위치였습니다.”
“그, 그렇죠.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런 곳에 [서풍]을 열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겁니다.”
“네, 그래서 저도 이 기회에 [서풍] 레시피의 가치를 확실히 정해 절차를 밟아가며 투자를 하려는 겁니다.”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성재에게 이준형이 마지막 정리를 해주었다.
“우리 대표님이 원래부터 [서풍]의 프렌차이즈 계획이 없으셔서 일의 순서가 바뀐 게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해드리자면 중국 요리 협회에서 우리 대표님에게 [서풍]의 체인점을 열기 위한 로열티 및 레시피 전수비용을 지급해 먼저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
“그리고요?”
“그러면 중국 요리 협회는 북경에 말 그대로 [서풍] 을 열게 되는 겁니다. 단, 그 북경점에 우리 대표님도 반을 투자해 협회와 대표님이 공동 투자자가 되는 거죠.”
“무슨 얘기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너무 달라져서 저도 협회와 다시 의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제가 이런 계약 같은 거에는 경험이 없어서 일 처리가 미흡했습니다. 여기 이준형 공동대표가 이런 일은 다 맡아서 해줬거든요.”
이준형을 바라보는 남성재의 눈빛이 달갑지 않아 보였다.
입소리를 쩝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해 들고 남성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이 일을 위해 베트남에 장기 출장을 나온 상황이라 협회측과 의논을 마치는 대로 다시 연락하고 찾아뵙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급하게 일정을 미루고 와서 오래 있지 못합니다. 최대한 빨리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이준형을 힐끗 쳐다본 남성재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두 사람에게 인사한 후 카페를 나섰다.
“느낌이 어때? 우리 제안을 받아들일까?”
“당연히 받아들이지. 그쪽에서는 5억 투자지만, 네가 공동 투자로 지출해야 할 액수는 못 해도 몇십억일 거다. 그 계산이 딱 떨어지자마자 바로 연락 올 거야.”
“그래? 난 뭐가 뭔지 복잡하다.”
“내가 좀 더 일찍 구체적으로 계산하고 너와 의논했어야 했는데, 난 저 사람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급하게 일을 진행할 줄 몰랐다 정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서인우가 이준형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기 온 걸 환영한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오케이?”
“그럼 그냥 자려고 했냐? 제일 맛나고 좋은 곳으로 나를 안내하도록!”
백화점에서 멀지 않은 호텔 라이브 카페에 도착한 서인우가 눈이 휘둥그레진 이준형을 보고 피식 웃었다.
“너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알았냐? 분위기 죽이는데?”
“며칠 전 북경 갔을 때 날 도와준 백화점 직원이 있었어. 그 사람이 맥주 한잔하자면서 데리고 간 곳이 이런 분위기의 라이브 카페였어.”
“여기 좋다. 데이트하기도 좋겠다.”
화려한 의상을 한 여자가수가 매력적인 목소리로 재즈를 부르고 있었다.
연주를 하는 사람들 모두 음악에 빠진 듯 몸을 흔들며 부드러운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장민이 소개해준 북경의 라이브 카페처럼 케쥬얼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가 또 나쁘지 않았다.
“준형이 너 여자친구 얘기 좀 해봐. 요즘 좋아 죽는다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쑥스러운 듯 웃는 이준형의 입술이 살짝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작년 가을에 백화점에 새우면 입점 과정에서 미팅하다 만난 거야. 드디어 내 짝을 찾은 것 같아.”
“정말? 뭐가 그렇게 좋은데?”
“이뻐.”
서인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네 눈엔 당연히 세상에서 제일 이쁠 거고, 또?”
“말하는 것도 이쁘고, 밥 먹는 것도 이쁘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준형의 눈이 반달을 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잘생겨서 너무 좋대.”
“푸흡! 뭐?”
웃음이 튀어나와 입안에서 씹고 있던 과일을 뱉을 뻔한 서인우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너 죽을래?”
“미안, 둘이 정말 인연인가보다.”
“우리 서영인 정말 예쁜 거 맞고,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이 다 이뻐 보인대.”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너네 서영씨.”
이준형이 핸드폰을 꺼내 슬쩍 내밀었다.
“내가 정말 너한테만 보여준다. 너도 자극받아 빨리 연애하라고.”
핸드폰에 웃고 있는 둘의 사진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이준형의 말대로 그의 서영씨는 커다란 눈에 작은 얼굴이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둘이 정말 잘 어울린다. 진짜 미인이네.”
“그렇지? 그래도 매일 내가 더 잘생겨서 예쁘게 하고 오는 거라고…. 난 이 여자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빨리 결혼하려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
“사실 우리 부모님께도 소개해줬어.”
부모님이라는 말에 이준형의 부모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라 웃음이 또 터질 뻔했다.
‘그녀도 여자 이준형을 만났겠구나. 웃음 참기 쉽지 않았을 텐데….’
“부모님은 뭐라셔?”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정도가 아니라, 뭐 전 세계를 구했던 것 같다고 하시더라. 내 부모 맞냐?”
“다행이네. 아주 맘에 드셨나 보다.”
“그러니까 너도 빨리 연애하고 결혼도 하고 그래. 어머니가 정말 좋아하실 거다.”
“무슨 벌써 결혼을….”
항상 가슴 한쪽이 아리는 단어, 어머니.
이번 주말에는 엄마와 통화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한 서인우가 조용히 잔을 부딪쳤다.
“이 얘기는 그만하고, 남성재가 어떤 답을 가지고 올지 정말 궁금하다. 그걸 끝내야 내가 다시 돌아갈 텐데.”
“아마 내일 연락이 올 거야.”
베트남의 밤이 깊어갈수록 서인우와 이준형의 대화도 더 깊어졌다.
* * *
숙소로 돌아온 남성재가 이준형에게 받은 서류를 들고 좁은 방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저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네.”
이준형으로부터 넘겨받은 서류들을 사진 찍어 보내놓고, 김원상과 통화를 하기로 한 시간까지 5분 정도 남아 있었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생수를 한 병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전화를 기다리며 자꾸만 목이 타는 걸 느낀 남성재가 내려놓은 물병을 다시 마시려 들어 올릴 때였다.
김원상으로부터 기다리던 전화가 들어왔다.
“난데, 오늘 서인우를 다시 만났다고? 그리고, 그 서류는 왜 보낸 건가? 지금 매출 1위 하고 있다고 나한테 자랑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네, 서인우와 동업자라는 이준형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건넨 서류입니다.
“이준형이라면 서풍의 새우면 사업으로 잘 나가시는 분이 거기까지 갔다는 말이야?”
-원래 계약 관련된 일은 이준형 공동대표가 거의 맡아서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계약을 끝낸 건가? 어떻게 얘기된 건지 자세히 말해봐.”
남성재가 오늘 셋이 만나 나눈 얘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지금 뭐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서인우 그놈한테 투자를 받아오라니까 나한테 돈을 보내라는 거야? 그것도 5억 씩이나?”
-회장님, 그렇게 역정 내시지 말고 제가 드린 얘기를 다시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목표는 서인우한테 거금을 투자하게 해서 망하게 만드는 거 아닙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일을 처리한 건가?”
귀밑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남성재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북경에 [서풍] 이라는 이름으로 가맹점처럼 내는 거로 알고 있으니 절차를 거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회장님. 잘 생각해보십시오.
“뭘 말인가?”
-그 5억은 서인우의 모든 걸 뺏기 위한 미끼에 불과합니다.
“뭐? 미끼라고?”
핸드폰으로 들리는 김원상의 말끝에 작은 웃음소리가 섞여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