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황제 폐하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응, 분명히 그랬어.
“그 남자가 혹시 사부의 과거일까?”
-그걸 모르겠어. 내 기억 속에 있으니 나인 것 같기도 한데, 그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여서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겠어.
“이름을 불렀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
-전혀.
서인우는 답답한 마음에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 남자가 사부일까? 아니면, 그 남자 지휘하에 요리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을까?”
-아! 답답해. 차라리 아무 기억도 나지 않을 때가 더 편했던 것 같다. 오히려 기억이 뒤엉켜 뭐가 뭔지 더 모르겠어.
“사부! 너무 조급해하지 마. 우선 빨리 [서풍]으로 돌아가자. 그곳에서 천천히 기억이 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그래, 나도 빨리 [서풍]으로 가고 싶다.
몇 가지 꺼내놓은 짐을 챙겨 호텔을 나온 서인우는 장민에게 전화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북경을 떠나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창밖으로 붉게 노을이 지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김원상이 창문을 열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통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지금 서인우가 북경에 있다는 얘긴가?”
-잠시 우리가 알려준 식당 구경하고 오늘 비행기로 다시 돌아갔다고 합니다.
“뭐 실수한 건 없었겠지?”
남성재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식당 주인한테도 다 얘기해놨고, 협회에도 미리 사람을 심어놨습니다. 내가 일을 맡았다 하면 워낙 철저하게 하는 성격이라서요.
순간 김원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면 곧 서인우 측에서 먼저 연락이 오겠군. 북경 한 중심에 그 정도 규모의 식당이라면 욕심내지 않을 사람이 없지.”
-그럼요. 회장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막상 보니까 흥분하는 것 같다고 하던데요.
“그 허물어져 가는 시장통 가게에서 시작한 놈이 그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멋진 식당을 봤으니 눈이 돌아가지.”
-네. 분명 며칠 내로 연락이 올 겁니다. 그러면 바로 작업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김원상이 엄지손톱으로 눈썹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니니 하나라도 실수가 있는 날에는 다 끝장나는 줄 알아, 명심하라고!”
-염려 마십시오. 철저하게 대비하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서인우 한테서 자금만 끌어오면 됩니다.
“그럼 연락 오는 대로 보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김원상이 막 의자에 앉으려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동생 김서원이 왔음을 알렸다.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인데, 연락도 없이 여긴 무슨 일로 온거야?”
“같이 퇴근하려고.”
“우리가 그렇게 사이가 좋았나?”
“오늘은 같이 아버지 뵈러 가자.”
김원상이 오른쪽 입술을 삐죽 올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넌 그런 범죄자를 아버지라고 자주 보고 싶은가보다?”
“나도 죄는 용서 못 해.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잖아?”
“가족? 필요하면 자식도 정신병자로 만들고, 능력 없으면 아들도 바꾸고 싶다는 사람이 가족이라고?”
김서원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오빠. 그러지 말고 아버지 회사에 다시 나오시게 해. 아직 정정하신데 모든 인맥 다 끊어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건 너무했어.”
“노후에 얼마나 편하고 좋아. 골치 아픈 일은 이 아들이 다 해주겠다는데 말이야.”
“오빠!”
김서원이 버럭 화를 냈다.
“이게 여기가 어디라고 소리를 질러!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내 한 마디면 모든 임원진과 가맹점 사장들이 다 바짝 엎드린다고.”
“왜 그런다고 생각해?”
낮게 깔린 김서원의 목소리가 조금 전 화를 낼 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제야 내 능력을 알아주는 거지.”
“아니, 오빠의 인성을 알게 된 거지. 필요하면 자기 아버지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멋지잖아? 그게 너일 수도 있어. 그러니 까불지 말라고.”
“그래. 기대하고 온 건 아니지만, 역시 이제 오빠는 완전히 남이 되어버렸네.”
“뭐?”
김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낮게 깔린 소리로 한마디 더 했다.
“제발 이 정도로 끝내. 더는 누구에게도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아줘.”
“재수 없는 계집애. 끝까지 잘난 척이군.”
무표정한 얼굴로 오빠 김원상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던 김서원은 짧은 한숨을 한 번 더 내뱉고 회장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차성철이 김서원 앞에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얘기는 잘 되신 겁니까?”
“아니요, 예상했던 대로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그럼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지금 내가 알아보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확실해지면 도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차성철이 손가락으로 안경을 올리며 그 너머로 김서원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네, 저한테 꼭 부탁하십시오. 뭐든지, 어떤 일이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사람이 아닌 회사에 득이 되느냐를 판단합니다. 그리고, 제 판단을 믿습니다.”
“곧 연락할 일이 있을 것 같네요. 그때 뵙도록 하죠.”
“네, 그럼 운전 조심하세요.”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김서원의 차를 차성철이 한참 쳐다보고 서 있었다.
* * *
막 저녁 장사가 시작됐을 때 [서풍]에 도착한 서인우는 입구에 비스듬히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강진수의 지휘 아래 열심히 주문 들어온 요리를 하는 직원들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이거 탕수육 완성해주세요. 칠리 새우는 내가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칠리 새우를 만들면서 동시에 오상준이 탕수육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강진수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더 빠르게 볶아서 접시에 담아 주세요.”
“굉장히 바싹하게 잘 튀겨졌는데?”
“어! 사장님!”
서인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주방 직원들의 눈이 동시에 입구 쪽으로 향했다.
“뭐해? 완성된 음식 빨리 내놓지 않고?”
“아! 네.”
띵!
띵!
요리를 완성해 벨을 누른 강진수와 오상준, 베트남 직원이 서인우에게로 모여들었다.
“사장님! 어떻게 벌써 오셨어요? 우리를 그렇게 못 믿으셨던 겁니까?”
“사실 걱정 많이 했는데, 잘하고 있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급하게 돌아왔어요. 자, 자. 빨리 음식 만듭시다.”
주문지를 확인한 서인우는 바로 셰프복으로 갈아입고 깨끗한 앞치마를 단단히 묶었다.
“삼선 짜장, 백 짬뽕, 삼선 우동 바로 들어갑니다.”
“네, 셰프!”
서인우의 빈자리가 전혀 티 나지 않게 재료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제법인데? 나 없이도 너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쬐끔 서운하려고 하네.’
-참 대단한 스승을 둔 제자답네.
‘내 칭찬해주는 거야?’
-아니, 나 같은 스승은 둔 제자답게 직원 교육을 잘했다는 얘기지. 내가 말을 할 때는 행간을 잘 읽도록 해!
‘기가 막혀서. 내가 웃음이 다 나온다.’
-그치. 기막힌 스승이지.
‘말장난 그만해. 나 이제 일해야 해.’
-어차피 몸으로 뛰는 건 나거든!
사부의 말대로 중식도를 바로 잡은 서인우는 채소를 기분 좋게 썰었다.
이틀 만에 돌아온 [서풍]에서 중식도와 대화하며 직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는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배운 대로 정확하게 백 짬뽕을 완성해 내놓은 오상준이 서인우가 만들어 놓은 삼선 짜장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장님, 오자마자 쉬지도 않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내가 하루만 이 중식도를 잡지 않으면 몸이 간질간질하거든요.”
“저도 사장님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요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장담할 일은 아닌데요?”
“느낌이 딱 옵니다. 요즘 요리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과학 실험처럼 정확하게 재료를 다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흥미롭습니다.”
서인우는 아직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중식을 만들면서 과학 실험과 비교를 한 사람은 오상준이 처음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 흥분한 듯 볼을 씰룩이고 있는 그의 눈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사람의 미각은 정말 예민하죠. 아주 작은 차이도 금방 알아챌 수 있어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사람들이 더 맛을 중시하고 있죠.”
“그래서 우리 [서풍]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는 거 아닙니까? 저는 이 맛을 기본으로 새로운 메뉴도 꾸준히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오상준의 눈에 열정이 뿜어져 나왔다.
뭔가에 꽂히면 며칠 밤을 새우면서 꼭 해내고 마는 성격이라고 했던 첫 면접 때가 문득 떠올랐다.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서 오상준 씨의 가게를 열게 되면 꼭 자신만의 시그니처 메뉴를 개발해보세요. 그 열정이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네, 서풍 만두처럼 전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메뉴를 꼭 개발해서 사장님께 제일 먼저 선보일 겁니다.”
둘의 대화에 괜히 심통이 난 강진수가 가까이 다가오며 큰 소리로 주문지를 읊었다.
“2번 테이블 양장피, 새우볶음밥, 짬뽕 두 개요. 1번 룸에 코스 A 주문인데요? 사장님 그러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네, 다 같이 준비 합시다.”
강진수를 향해 씩 웃어준 서인우가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강진수씨, 양장피 준비합시다.”
“저, 저요? 사장님 오셨는데 제가 합니까?”
“네, 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해보세요. 물론 퍼포먼스까지 하도록 합시다.”
당황한 듯한 강진수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는 바로 양장피를 준비했다.
샥샥샥!
타다다다닥!
경쾌한 소리를 내며 가늘고 일정하게 채소들을 채 썰어놓는 모습이 이제 제법 안정되어 보였다.
잘 볶은 해물과 채소를 함께 담아 근사하게 완성한 강진수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서 있었다.
“뭐 합니까? 지금이 가장 맛있을 때라는 거 잊었습니까?”
“진짜 제가 나가요?”
“그럼, 내가 만들지도 않은 요리를 내가 한 척 손님을 속이라는 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음식 식으면 버리고 다시 만들어야….”
서인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진수가 양장피와 소스를 들고 홀로 당당하게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주문하신 양장피가 나왔습니다.”
“어머? 누구세요?”
“네?”
2번 테이블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 셋이 놀란 듯 강진수를 쳐다봤다.
“저는 [서풍]의 강진수 셰프입니다. 서인우 셰프님께 요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서인우입니다. 제 모든 요리를 똑같이 해내는 능력이 있는 셰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양장피를 맛보시고 제가 한 것과 맛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오늘 식사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서인우가 손님들에게 설명했다.
“정말요? 재미있겠다. 진짜 먹어보고 다르면 밥값 안 낼 겁니다.”
“네, 드셔보세요.”
자신만만한 서인우와 달리 강진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처음 양장피를 배우면서부터 유독 손님들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던 강진수였다.
서인우가 그런 그를 생각보다 더 빨리 손님들에게 선보인 까닭을 알 리 없는 강진수는 눈앞에서 양장피를 먹는 모습을 보며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우리 돈 좀 굳나 했더니….”
“네?”
강진수의 목소리가 말라 거칠게 튀어나왔다.
“돈 써야겠는데요. 너무 맛있어요. 서인우 셰프님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예요.”
“저, 정말요?”
“진짜 능력자 맞네요.”
“감사합니다.”
갑자기 허리를 크게 꺾으며 큰소리로 인사를 하는 강진수를 보며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젊은 사람이 대단하네. 아무래도 타고난 사람인가 보구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인우 셰프의 맛을 그대로 내다니 말이야.”
“그건 아닌데….”
강진수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꾹꾹 눌렀다.
“다음에 나도 이 총각이 만드는 양장피를 먹어보고 싶구먼. 그 맛이 아주 궁금해.”
몇 번이나 고개가 꺾일 듯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돌아온 강진수가 흥분해서 계속 떠들어댔다.
“들었죠? 나보고 타고난 사람이라고 한 말 들었냔 말이에요? 대단하다고…. 다음엔 내가 만든 양장피를 먹어보고 싶다고 그랬다니까요.”
-저놈 완전히 흥분했네.
‘실력은 충분한데 자신감이 부족했어. 그래서 오늘 그걸 채워주고 싶었어.’
계속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강진수에게 다가간 서인우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오늘 아주 많이 잘했어. 다음 주에 한국 가면 할머니한테 꼭 자랑하라고.”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일찍 양장피를 만들게 하신 거예요?”
서인우가 조용히 웃었다.
“사장님!”
커다란 어깨의 강진수가 달려와 서인우에게 매달렸다.
“더워! 떨어져!”
“아앙, 사장님!”
“빨리 다음 음식 준비하지 않으면 다음 주 휴가 취소다!”
그새 자리로 돌아간 강진수를 보며 주방 직원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 끝에 서인우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