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장민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더니 서인우에게 작게 말했다.
“빨리 여기를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중식도를 통해 들은 말을 아는 체할 수 없는 서인우는 애써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세한 건 자리를 옮겨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일어나시죠.”
식사도 어느 정도 마친 상태라 둘이 자연스럽게 계산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사장은 통화가 길어졌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저기 있는 술집에서 맥주 딱 한 잔만 하고 일어납시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러시죠.”
장민을 따라 들어온 곳은 시끄럽지 않은 라이브카페였다.
얼핏 필리핀 계 사람들로 보이는 여자 하나와 남자 둘이 코러스를 멋지게 넣어가며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여기 분위기 좋은데요?”
“라이브 카페인데, 주로 잔잔한 노래들을 많이 불러서 조용히 술 마시고 대화하기 좋은 곳입니다.”
“오늘 장민씨 덕에 북경에서 유명한 곳들은 다 가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어째 다 먹는 곳만 갔네요. 관광은 다음에 길게 한 번 오세요.”
병맥주에 레몬 슬라이스가 하나 올려 나왔다.
상큼한 레몬 향이 첫맛에 들어오며 시원한 맥주가 목젖을 적셨다.
“왜 갑자기 일어나신 건가요?”
중식도가 말한 내용이 맞는지 궁금했던 서인우가 장민이 맥주병을 내려놓기를 기다려 바로 질문했다.
“방금 통화 내용이 얼핏 들렸습니다.”
“그래요? 뭐라고 하던가요?”
장민이 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전화한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한국에서 온 [서풍] 이라고 말하고, 약속 지키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중식도가 한 말이 맞았다.
사장이 [서풍]이라는 말을 했다는.
“한국에서 온 [서풍]이요?”
“네, 틀림없이 그랬습니다.”
장민이 목이 타는지 남은 맥주를 금세 비워버리고 다시 한 병을 시켰다.
“내가 여기 들어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베트남에서 왔다고 해서 그 사장이 아무 생각 없이 사실대로 다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조금 전에 저를 베트남에서 비행기 타고 왔다고 하셨죠.”
“저 사장은 서인우 셰프의 얼굴을 모른다는 얘기죠.”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식당에 한국 사람도 많이 있었으니 사장이 순간 방심한 것 같습니다. 우리한테는 아주 잘된 일이죠.”
서인우도 남은 맥주를 마셔버렸다.
누군가 의도하고 접근했다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지면서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맥주를 한 모금 길게 마신 서인우가 아무 말 없이 병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제 좀 상황이 정리된 것 같습니다.”
“네? 저는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요.”
“누군가 저한테 접근해 저 자리에 [서풍]을 열 수 있게 투자하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건물이 중국 요리 협회 거라고 해서 안심을 시켜주려 했지만, 그 준비 비용이 엄청날 겁니다.”
“그럼요. 서인우 셰프가 큰 돈을 투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네, 그겁니다. 내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아주 큰 돈을 잃게 만들려는 계획이요.”
장민의 긴장된 눈빛, 크게 들리는 마른침 삼키는 소리와 달리 서인우는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그렇게 해맑게 웃고 계실 때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감사해서요.”
“네?”
“오늘 하마터면 빠질뻔한 수렁에서 저를 건져 주셨잖습니까?”
“내, 내가요?”
“모두 장민 씨 덕분입니다. 특히 마지막에 사장의 통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나, 나도 알아들었거든?
‘사부는 이따가 조용히 다시 얘기해.’
-야! 그러니까 겁난다. 나 잘못한 건 없지?
코를 벌름거리며 신이 나 웃고 있던 장민이 티슈로 입을 쓱 닦았다.
“베트남으로 돌아가셔서도 여기서 알아볼 일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본사에서 많은 직원 중에 나를 콕 찍어 오늘 이 일을 맡긴 건 다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네? 뜻이라면….”
“나한테 서인우 셰프님을 도우라는 하늘의 뜻인 거죠. 방송에서 셰프님 스토리 듣고 감동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서동수 셰프님이 저를 여기 보낸 것 같단 말입니다.”
장민이 과하게 감정몰입이 된 듯했다.
오늘 하루 만에 일어난 이 엄청난 일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벅찼을 거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평생 오늘 이 감사함은 잊지 않겠습니다.”
“네, 그건 약속하셨잖아요. 언제든 저는 곱빼기로 주신다고.”
“아! 그럼요. 곱뺴기는 기본에 장민씨와 가족분들은 평생 무료입니다.”
“히야. 정말요? 우리 애들 엄청나게 좋아하겠네.”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서로 나누고 장민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우선 여기서 볼 일은 다 봤어. 빨리 돌아가서 일해야지.”
-그다음은?
“준형이 연락 기다렸다가 둘이 작전을 짜야겠지? 누군지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겠어.”
-너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거지?
“제시카 씨가 계속 주의하라고 해서 신경 쓰고 있기는 해.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누가 걸려들지 이번엔 내가 함정을 만들어 보려고.”
중식도가 둥둥 떠서 말을 이어갔다.
-이제 여기에 다시 올 일은 없는 거냐?
“글쎄.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지금은 알 수 없어서. 그건 왜?”
-아니다. 베트남 돌아가서 나도 뭣 좀 알아봐야겠다.
“뭘 말이야?”
-별 거 아니야.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노력을 좀 해보려는 것 뿐이다.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거였어? 순간순간 떠오른다며?”
-응. 지금은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돌아가면 차분히 생각 좀 해보려고.
“그래. 어쨌든 오늘은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빨리 [서풍]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런 그의 바램과 달리 늦은 시간에 핸드폰이 급하게 울었다.
“준형아. 아직 안 잔 거야?”
-지금 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너도 자다가 받은 건 아니지?
“그럼. 이제 호텔에 돌아와서 쉬는 중이야. 내일 바로 돌아가려고.”
-있잖아.
이준형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남성재라는 사람 말이야, 중국 요리 협회 서울 지부장이 맞긴 맞아.
“그래?”
분명히 남성재라는 사람이 그 협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던 서인우는 잠시 당황했다.
“사실 오늘 여기서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까 확실히 누군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걸 느꼈어. 그래서, 나는 남성재라는 사람을 의심했는데….”
-그 사람이 협회 직원인 건 맞는데, 중요한 건 이름만 올라가 있고, 실제로 협회에서 일 한 내용이 전혀 없어.
“그래? 그러면 뭐지? 누가 손써서 이름만 올려놓은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형식적으로 직원으로 올려놓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
남성재.
그 남자가 수없이 찾아와서 했던 말들이 다 거짓이라는 건가?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답답했다.
-내가 박정원 대표님 아는 분께 부탁해서 더 자세히 알아봤더니, 아주 흥미 있는 내용이 발견됐어.
“그래? 자세히 좀 얘기해봐.”
-김형식이 철창신세를 지고 있었을 때, 남성재가 김형식이 사주했던 범죄를 밝혀서 그때 기간이 더 연장됐던 거였어.
“뭐? 잠깐 생각 좀 해보자. 그러면….”
-뭘 생각해봐? 답이 딱 나오지 않냐? 내가 흥분돼서 이 늦은 시간까지 잠도 못 자고 너한테 바로 전화 한 거잖아.
이준형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살짝 커졌다.
“김형식이 그곳에 있는 동안 모든 것을 바꿔놓고 자기만의 세상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딱 한 명 있지. 너도 같은 생각인 거지?”
-그렇지. 이건 분명히 김원상이 벌인 짓이야. 김형식이 거기 있을 때 남성재를 찾아서 내놓은 것도 분명 김원상 짓일 거야.
“….”
-듣고 있어?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서인우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김서원씨 목소리가 왜 이렇게 힘들게 느껴졌는지 알 것 같다. 분명히 자기 오빠가 아빠한테 한 짓들을 다 알게 된 거야.”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지영씨랑 통화했는데, 그때도 제시카씨 걱정 많이 하더라. 뭔지 몰라도 많이 힘들어 보인다고.
김형식의 죄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단언컨대, 김서원도 자신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친오빠가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의 숨겨진 범죄를 찾아내서 가중 처벌을 받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왜 그렇게 그녀가 힘들어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한 거야?”
-남성재와 김형식이 관련 있다는 건 확실해. 지금 이 일이 김원상이 계획하고 벌인 일인지는 심증만 있는 거지.
“더 정확한 증거를 찾아줘. 그리고, 그게 누구든 이 일을 꾸민 사람에게 어떻게 갚아 줄 건지도 고민해봐야지.”
-김원상이 분명해. 지금 그놈이 회사를 차지하고 자기 아버지를 완전히 방구석에 처박아 버렸어. 팔다리를 다 잘라버려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게 말이야.
“나도 대충 얘기는 들었어. 그래도 확실하게 알아보고 대비해야지.”
-알았어. 어째 아들놈이 김형식보다 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도 항상 조심하고, 어떻게든 우리도 철저히 계획을 세워서 갚아 주자고.
통화를 마친 서인우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요리 대회에서 처음 만난 김원상은 적어도 자신의 요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아버지 김형식을 두려워하며 절절매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말 김원상이 벌인 일이 맞는다면 왜일까?
이제 모든 감정 다 지우고 잊고 살고 싶었는데….
“사부! 나와 김형식, 김원상 부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얽히는 걸까?”
-그거야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김원상도 그 아버지처럼 너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겠지. 그걸 김형식이 더 부추겼으니까.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셈이냐?
“우선 이 제안은 받아들여야지. 그것도 아주 만족해하면서.”
-그리고 역습?
“응. 아주 은밀하고 치밀하게 쳐들어가야지.”
밤새 몸을 뒤척이며 고민에 빠진 서인우는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누군가가 애타게 서인우의 이름을 불렀다.
-인우야, 일어나! 서인우, 잠 좀 깨보라고!
방안을 가득 채운 듯한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떠보니 중식도가 둥둥 떠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잇, 깜짝이야. 무슨 일이야, 사부!”
-나 아무래도 이곳에 뭔가 있는 것 같아. 조금 전에 지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갔어.
놀라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난 서인우가 졸린 눈을 비비며 중식도를 쳐다봤다.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거야?”
-내가 누구였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야. 하지만, 조금 전에 어제 봤던 시내 고궁 같은 건물이 보이면서 그 안에서 누군가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어.
“혹시 전에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또 요리하고 있었던 거야?”
-응, 그때 본 장면하고 아주 비슷했어. 아마도 중국 전통 의상 같은데, 그런 희한한 옷을 입고 사람들이 만든 요리를 내가 하나하나 맛보고 그랬어.
서인우는 어제부터 부쩍 많은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사부를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
“뭐든 기억에 남는 이름이나 장소, 아니면 음식명이라도 없어? 아무거나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봐.”
-그게 말이야.
“왜? 뭐가 있었어?”
-그 사람이 그 많은 사람이 만든 음식을 일일이 체크하고 걸러서 수를 세지도 못할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빨리 좀 말해봐!”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더니 순간 탁 멈췄다.
-그가 준비한 음식들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사람이 황제 옷을 입고 있었어.
“황제 옷? 금빛 찬란한 중국 황제 의상 말이야?”
-응! 그리고, 그 남자가 한마디 건넸어.
서인우가 질문 대신 마른침을 삼키며 중식도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 잠깐이 무지 길게 느껴진 서인우가 중식도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황제 폐하! 연회 준비가 끝났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