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186화 (186/200)

제186화.

-장안좌문(長安左門)을 나서서 동쪽으로 가면 옥하교(玉河橋)를 지나 10왕부의 서쪽까지 이어진 좁은 길 가운데 남북으로 뻗은 문이 있는데 이를 동안문(東安門)이라고 한다.

“사부! 뭐라고? 무슨 문?”

-여기 북경은 영락 4년 황제가 북평(北平)을 수도(京都)의 지위로 승격하고 북경(北京)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한 것이야.

“사부! 왜 이래? 왜 자꾸 모르는 말만 하는 거야?”

서인우는 놀란 눈으로 중식도를 손에 쥐었다.

“사부! 나 누군지 알겠어?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냔 말이야?”

-내가 기억 상실증이냐?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니까 오히려 나를 더 이상한 사람 취급하네.

“놀랐잖아.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그냥 떠들어 본 거다. 아주 오래전인 것 같은데, 그때의 기억이 순간순간 떠올라. 나 혹시….

“혹시 뭐?”

-몇백 년을 죽지 않고 살아온 영생의 상징,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인가?

“뭐? 내가 자꾸 드라마 보지 말라고 했지?”

중식도가 다시 한번 빙그르르 돌았다.

-이건 드라마를 보고 남은 기억인가? 이제 막 뒤죽박죽 섞여서 뭐가 현실인지, 뭐가 기억인지 모르겠군. 참으로 난감하군.

“못 말려 정말. 또 뭐 기억나는 거 없어?”

-밀크공주 제이.

“뭐? 제이 씨?”

-그 제이가 혹시 도깨비 신부….

“그만하라 했다!”

-나도 긴장돼서 농담 좀 한 거야. 아직은 더 기억나는 건 없어.

농담이라며 웃고 넘어갔지만, 중식도가 내놓은 말들을 전혀 알아들을 방법이 없는 서인우는 걱정이 앞섰다.

만약 사부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온 거라면 뭐든 도와주고 싶은데…. 현재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사부! 어디에 가든 조금이라도 기억이 떠오르면 꼭 말해. 내가 뭐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

-그래. 그건 그렇고 낮에 갔던 그 식당에 다시 갈 거지?

“응. 처음 남성재라는 사람이 찾아온 그 순간부터 다시 되짚어가며 따져보려고.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가슴이 답답한 게 이번 일은 더 신중하게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시간을 확인한 후 가방에 중식도를 잘 넣어 호텔을 나왔다.

로비로 내려가자 벌써 장민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방금 도착했어요. 그럼 가볼까요?”

거리로 나온 서인우는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인파에 놀라 주춤했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네. 여기는 북경 사람뿐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과 외국인도 엄청 많습니다.”

“그러네요. 제가 생각했던 중국 분위기와는 너무 달라서 적응하기 힘듭니다.”

“여기 중심가를 벗어나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아마 세상에서 빈부 차가 가장 큰 곳이 중국일 겁니다.”

“그런가요?”

“중국은 상위 5프로의 사람이 중국 돈의 95프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어요. 그 정도로 엄청난 차이죠.”

대화하며 도착한 식당은 벌써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안내를 따라 들어가 자리를 잡은 서인우는 사람들이 즐겨 먹고 있는 요리를 하나하나 유심히 쳐다봤다.

“우리 중화요리와는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 요리들이 많네요.”

“역시 직업은 못 속이네요. 벌써 사람들이 먹는 요리들을 살펴보신 건가요?”

“아! 죄송합니다.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든 음식들인지 궁금해서 그만.”

“아닙니다. 서인우 씨가 메뉴를 골라 보세요. 이 중에서 혹시 [서풍]의 메뉴로 만들고 싶은 게 있을 줄 어떻게 압니까?”

메뉴판에는 요리가 나오는 순서대로 차가운 요리부터 정리가 되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요리가 있었지만, 서인우가 읽을 수 있는 건 한 글자도 없었다.

다행인 건 그림과 함께 영어로 설명된 재료들이었다.

“사진 아니면 정말 하나도 못 알아먹겠네요.”

장민이 웃는 눈으로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메뉴에 있는 그림으로 골라도 되고, 주위 사람들이 먹는 음식 중에 맛있어 보이는 걸 골라도 됩니다. 주문은 당연히 제가 해야죠.”

“사진으로 보나 사람들 먹는 걸로 보나 다 맛있어 보입니다. 장민씨가 알아서 주문해 주세요.”

“그럼 그럴까요?”

-제비집 수프나 하나 시켜봐!

‘뭐? 제비집 수프? 그게 얼마나 비싸고 귀한 요리인 줄 알아?’

-그렇지. 예전 황제는 아침을 제비집 수프로 시작했었다.

‘혹시, 사부가 그 요리를 만들었던 걸까? 황제가 먹는 제비집 수프를?’

-그랬었나? 나 어쩌면 네가 생각했던 것보더 훨씬 대단한 사람 이었을수도 있겠다. 아니면….

‘아니면, 뭐?’

-내가 아침마다 제비집 수프를 먹었던 황제는 아니었을까? 왠지 기품있는 자태며 목소리….

‘응, 그건 아니야.’

중식도와 속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음식을 주문한 장민이 직원에게 뭐라고 덧붙였다.

“뭐라고 하신 겁니까?”

“사장님이 나오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요?”

“우리 들어올 때 입구에 서서 인사하던 저기 저 사람이 여기 사장이라는데요?”

장민이 가리키는 곳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제법 덩치가 있는 남자가 중국 전통 의상을 입고 서 있었다.

“나중에 나가면서 몇 마디 나눠봐야겠습니다.”

“네, 지금 한국에 있는 제 동료가 저한테 접근했던 중국 요리 협회 사람을 조사하고 있을 겁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죠.”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짐작이 가는 사람은 있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

궁금함과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장민이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알겠습니다. 더는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일일수록 신중해야 하니까요.”

“네, 그래서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본사에도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혼자 처리하시려고요?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렇게 일을 키울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라면 쉽지 않을 텐데요?”

“도움이 필요할 때 그때는 바로 부탁드려야죠. 우선은 제가 더 알아보고 대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여러 가지로 감사할 일만 생깁니다.”

그 사이 직원이 주문한 요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오이와 곁들인 차가운 반찬 같은 음식과 이제 한국에서도 제법 알려진 경장육사가 나왔다.

춘장에 볶은 채 썬 고기를 파채와 오이 채, 가는 지단 등과 함께 두부피나 밀전병에 싸서 먹는 경장육사는 서인우도 곧잘 만드는 요리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새우와 닭고기, 소고기가 함께 볶아져 나온 요리, 윤기가 자르르한 가지와 푸른 콩 볶음이 나왔고, 마지막을 장식한 건 생선을 꽃 모양으로 튀겨서 새콤달콤한 소스로 맛을 낸 요리였다.

“이미 한국에서도 꽤 알려진 요리도 있네요?”

“지금 제가 주문한 음식들이 한국 사람들 입맛에 가장 맞는 것들입니다. 다 서인우 셰프님도 하실 줄 아는 요리죠?”

“해본 것들도 있고, 처음 보는 요리도 있습니다. 중국 요리는 같은 재료로도 종류가 워낙 많아서요.”

“맞아요. 이 가지 요리만 해도 몇 종류인지 모릅니다.”

장민의 말대로 모든 음식이 다 입에 맞았다.

아니, 그냥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맛있었다.

특유의 향도 많이 나지 않는 게 이미 외국인들의 입맛에 많이 맞춰진 음식들인 듯했다.

음식이 다 나왔나 했는데, 직원이 동그란 왕만두 같은 걸 가지고 와 테이블에 올렸다.

“여기 교민들 사이에 제일 인기 많은 만두입니다. [서풍]도 만두로 유명하니까 드셔보시라고 주문했습니다.”

“이건 왕만두네요.”

“중국에서는 이런 걸 빠오즈라고 부릅니다.”

-고거 참 맛있겠다. 내가 좋아했었는데….

‘그래? 기억 나?’

-저 빠오즈 아주 익숙해. 북경은 말이야 위쪽에 있어서 쌀보다 밀가루가 주식이지. 주로 면이나 빵, 만두를 많이 먹고, 튀기거나 센 불에 요리한 칼로리 높은 음식이 주를 이룬다.

‘사부?’

-라고 알고는 있는데…. 어떻게 아냐고 묻지는 마라. 나도 혼란스러우니까.

멍한 눈으로 만두만 쳐다보고 있는 서인우를 한참 빤히 보고 있던 장민이 웃으며 물었다.

“맛보셔야죠?”

“아! 네.”

큰 만두를 하나 가져와 한 입 베어 물자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고기와 파가 주를 이룬 고기만두네요.”

“네. 옆에 있는 것도 한번 맞춰보세요.”

마치 게임을 하는 듯 재미있어하는 장민이 겉보기에는 똑같이 보이는 만두를 서인우 접시에 올려 주었다.

“이건 고기와 새우, 부추…. 음, 그리고 목이버섯, 표고버섯 그렇게 들어 있네요.”

“잠시만요.”

장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서인우에게 알려준 사장이라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같이 서인우 곁으로 다가온 두 사람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사장님은 왜 모시고 온 건가요?”

“내가 서인우 셰프가 누군지 말 안하고 만두소에 뭐가 들어갔는지 맞혀보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따라 오던데요.”

당황한 서인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는 처음입니까?”

사장이 중국어로 묻자 장민이 통역해 주었다.

“이분은 베트남에 사시는데, 오늘 비행기 타고 처음 왔습니다. 이 만두가 맛있다고 권해줬더니 만두소를 줄줄 맞춰서 제가 사장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확인 좀 해주십사 하고요.”

사장이 큰 소리를 내며 웃더니 아예 의자를 빼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치 시작해 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서인우는 짧게 한 번 더 웃고는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건 다진 돼지고기와 다진 대파, 소금, 후추, 기름이 들어갔습니다.”

장민의 통역에 눈썹을 꿈틀 움직여 보인 사장이 자세를 바꿔 앉으며 다른 만두를 건넸다.

“이건 재료가 좀 많은데….”

망설임 없이 한 입 베어 문 서인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만두도 다진고기가 들어갔네요. 그리고 새우, 부추, 목이버섯, 표고버섯이 주재료인 듯합니다.”

사장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 말씀하신 겁니까?”

“이 만두에도 아주 소량이지만 다진 파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금과 후추,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갔네요.”

짝짝짝!

갑자기 벌떡 일어난 사장이 난데없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아주 대단한 미각을 가지고 계시네요. 혹시 직업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장민의 통역에 서인우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가게를 그만둔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내가요?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오셨습니까? 여기는 올해 최고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도 내 아들놈이 이어서 할 겁니다.”

대답하면서 뭔가 이상하다 느껴졌는지 사장이 눈을 치켜올렸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겁니까?”

“사실 저도 베트남에서 요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연히 이곳에서 식사하게 됐는데, 이런 맛집은 오래오래 유지됐으면 해서 여쭤본 겁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가게는 내가 눈 감는 날까지 영업할 거니까 자주 오십시오. 그나저나 이런 특별한 미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는 요리도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장민과 잠시 눈빛을 교환한 서인우가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이런 번화한 거리에 멋진 내 가게를 내보고 싶습니다.”

“이 근처는 힘들죠. 어쨌든 오늘 대단했어요. 맛있게 드시고….”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사장이 주머니에서 강하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가 왔네요. 그럼 식사하고 가세요.”

돌아서며 사장이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한국에서 온 [서풍]의 서자만 들려도 내가 알아서 시킨 대로 할 테니까 약속이나 지켜.”

-저, 저 사장이 방금 [서풍]이라고 했는데?

서인우와 장민의 눈이 번쩍이는 빛을 내며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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