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이렇게 사부의 기억이 돌아오는 걸까?
‘사부! 우선 이곳을 잘 봐봐. 그리고 다시 차분하게 얘기하자.’
-그래,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이곳이 처음은 아니라는 거야.
궁금하고 답답했다.
사부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다는 사실이 기쁘면서 당황스러웠다.
뭔지 모를 막연한 불안함이 서인우의 등골을 순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선 지금 상황부터 마무리 해야 했다.
“여기 사장님은 어디 계신가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최근에는 안 나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쉽네요. 몇 말씀 나눠보고 싶었는데요.”
아쉬워하는 서인우와 달리 남자는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둘러본 후 식당 밖으로 나왔다.
“정말 멋진 건물입니다. 이곳에서 [서풍]을 운영한다는 게 지금으로는 믿기지 않습니다.”
“서인우 씨에게 특별히 주는 기회입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장민이 서인우의 인사말을 통역해 주었다.
“그러면 마음의 결정은 하신 건가요?”
“이렇게 좋은 기회인데 당연히 잡아야지요. 조금만 더 고민해보고 남성재씨와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협회 남자가 아쉬운 듯 자리를 뜨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서인우와 장민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왜 안 가고 그냥 있을까요? 인사 제대로 전하신 거죠?”
“네, 잘 봤다고 고민 더 해보고 연락하겠다고 분명히 전했는데,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장민이 협회 남자를 보며 일부러 더 크게 웃어 보였다.
“여기 정말 근사합니다. 긍정적으로 고민 충분히 한 후에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시간도 냈는데, 뭐라도 좀 확답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무슨 확답이요?”
“최소한 언제까지 답을 주겠다는 약속이라도….”
남자의 눈에 조급함이 실려 있었다.
말을 전해 들은 서인우는 그런 그의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 최소한의 경비를 투자해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면 서로 하고 싶어 난리일 텐데….’
-너무 목맨다는 느낌이지? 반드시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적인 느낌?
‘맞아. 다른 건 다 이해가 되는데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되네. 왜 꼭 나인지 말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서인우가 협회 남자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중국 요리 협회 회장님이 제가 출연했던 요리 경연 대회 방송을 보신 후 반드시 우리 [서풍]이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맞습니까?”
“그, 그럼요.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이렇게 감사한 일이…. 그래서 말입니다. 그 회장님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네? 회, 회장님을요?”
남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남성재씨 말로는 쑥스럽지만, 협회 회장님이 저한테 완전히 반하셨다고 그러더군요. 너무 감사해서 꼭 얼굴 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남성재 씨와 의논한 후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성재 씨 하고요? 회장님이 아니라요?”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씩 닦아내며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당연히 회장님께 여쭤봐야죠. 서인우 씨 담당이 남성재 씨라서 그 사람하고도 의논을 해야 하거든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갑자기 장민이 손바닥을 '탁' 쳤다.
“말 나온 김에 지금 중국 요리 협회를 가봅시다. 협회 본점이 북경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 아닙니다. 약속도 안 하고 바로 찾아뵙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에 꼭 약속 잡아서 연락해 주세요.”
서인우가 살짝 눈짓하며 말을 바꿨다.
“그럼요. 제가 꼭 약속 잡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위치며 식당 외관이며 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렇게 꼭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서인우의 긍정적인 대답에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간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왜 갑자기 달라지신 겁니까? 제가 보기에도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요?”
“확실히 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니 그게 누구인지, 왜 나인지 이제부터 알아내야죠.”
웃고 있는 서인우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장민을 보고 서인우가 다시 한번 멋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웃지만 마시고 얘기 좀 해보세요. 저 사람 왠지 조급해 보이는 것 같던데, 아닌가요?”
“맞아요. 오늘 나한테서 뭔가 확답을 받아 가야 했던 것 같았어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해외 진출을 꿈꾸던 한국 사람 중에 사기당하고 쫓겨나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거든요.”
그러고 보면 남성재가 서인우를 찾아와 내민 명함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지금은 그가 정말 중국 요리 협회 서울 지부장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이번 중국 진출 제안 건은 확실히 뭔가 냄새가 납니다. 조건부터가 너무 파격적이었어요.”
“그랬습니까?”
“아무래도 무슨 조건을 걸어서든 내가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 누가 말입니까?”
“그건 모르죠. 누구든 오늘 만난 사람과 남성재라는 인물을 움직이는 배후겠죠. 우선은 그 배후가 움직일 때까지는 저들의 판에 놀아줘야겠습니다.”
장민이 재밌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손에 난 땀을 바지에 쓱쓱 닦았다.
“이거 손에 땀이 다 납니다. 긴장되지만 또 나중에 밝힐 걸 생각하니 짜릿한데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너무 황당한 상황을 접하게 해드린 건 아닌지….”
“아니요. 내가 또 이런 게임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뭐든 여기서 알아봐야 할 일이 있으면 저를 시키세요.”
“네?”
마치 탐정 놀이라도 하는 듯 신이 난 장민이 명함을 하나 꺼내 들었다.
“여기에 제 메일 주소와 개인 핸드폰 번호 적어 드릴 테니까 뭐든지 부탁할 일 있으면 하도록 하세요. 참고로 저는 믿어도 됩니다.”
“이미 믿으니까 다 오픈한겁니다.”
“사실 믿으라고 해놓고 뭘 보고 믿나 싶긴 한데 …. 우리 딸 이름을 걸고 서인우 씨를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든든하네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의 딸 이름까지 걸고 뭐든 부탁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방금 만난 협회 사람 말이 사실인지부터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식당에 대해서 좀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여기를 좀 더 둘러보겠습니다.”
장민이 나가고 혼자 남은 서인우는 식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협회 남자와 함께 식당을 소개해줬던 남자가 다시 들어온 서인우를 보고는 재빨리 다가왔다.
“뭐 도와 드릴까요?”
이런!
통역해 줄 사람이 없다.
서인우는 간단한 영어를 섞어 좀 더 구경하고 싶다고 전했다.
이번에는 상대방 남자가 못 알아듣는지 답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로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어색한 웃음만 나왔다.
그때였다.
-워샹취칸칸. 커이마? 따라 해!
‘뭐?’
-조금 보고 싶은데, 괜찮냐고 묻는 거야.
서인우가 어설프게 중식도가 한 말을 따라 흉내를 냈다.
어라!
남자가 서인우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뭐라는 거야?’
-편하게 보래. 저녁 장사 때까지 아직 시간 있다고.
‘사부!’
-왜?
‘정말 여기 살았었나 보다. 이 유창한 중국어 실력은 뭐야?’
-제자야! 나도 지금 내가 무섭다. 그냥 말이 술술 나온다.
잠시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는 직원들이 서인우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사부! 사장님은 안 계시냐고 물어봐 줘!’
-니라오반부짜이마? 워샹탄이탄니더라오반.
‘뭐가 이렇게 길어. 천천히 해봐. 따라 하게.’
서인우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다른 직원에게 중식도의 말을 하나하나 천천히 따라서 말했다.
남자가 더듬거리는 서인우의 말을 듣고 잠시 가만있더니 물었다.
“우리 사장님 찾는 겁니까?”
“네.”
“사장님은 저녁에만 나오십니다. 나중에 6시 이후에 다시 오세요.”
“네? 그러면 오늘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럼요. 우리 사장님이 워낙 부지런해서 하루도 빼지 않고 나오십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둘러 인사하고 식당을 빠져나온 서인우는 바로 장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후 5분 정도 지나자 장민이 급하게 달려왔다.
“어디 좀 들어가서 차분히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민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서인우 역시 할 말이 많았다.
한국에도 있는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반가워서 들어간 서인우와 장민이 음료를 앞에 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모르니 작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주변을 의식하던 장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 좀 이상합니다. 주변에 알아봤는데, 지금 사장이 이곳을 사서 시작한 곳이라는데요?”
“네? 중국 요리 협회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좀 이상하다는 겁니다.”
“사실 저도 직원들과 얘기를 해봤는데요.”
“네. 네? 서인우 씨가 어떻게요?”
아차차!
중식도의 존재를 알릴 수 없으니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핸드폰에 깔아 놓은 번역 앱으로 대충, 아주 간신히 대화했습니다.”
“그래요? 저랑 같이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졸지에 번역 앱이 된 거냐?
‘그러네.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지?’
-그래, 지금 나도 정신이 없어서 더 길게 따지고 싶지도 않다.
“혹시나 하고 여기 사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그랬더니 뭐라고 하던가요?”
장민이 두 배는 더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꼴칵 삼키고 있었다.
“매일 저녁 장사 때 나온답니다. 6시 이후면 만날 수 있다네요. 거의 하루도 안 빠진다고 오늘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건, 확실히 뭔가 냄새가 납니다. 누가 이런 짓을 꾸몄을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좀 더 알아보고 날 물 먹일 생각이 확실하다면 이번에는 내가 제대로 갚아 줄 생각입니다.”
서인우가 눈빛을 매섭게 빛내며 말했다.
“네? 갚아 준다고요?”
“네. 그것도 곱절은 더 갚아 줘야겠죠?”
서인우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좀 ….”
“오늘 저녁 7시에 여기서 술 한잔하는 거 어떻습니까?”
장민이 마치 서인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듯 먼저 제안했다.
“부탁드리려 했는데, 죄송해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야 한다면서요. 본사에서 전화 왔을 때 시간이 금인 사람이라고 최대한 빨리 일보고 돌아가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민씨 이름 반드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네, 그래서 언젠가 제가 [서풍]에 가면 뭐든지 곱빼기로 주셔야 합니다.”
장민의 선한 눈이 반달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아 놨습니다. 우선 잠시 짐을 풀고 쉬고 계세요.”
“정말 너무 큰 신세를 집니다.”
“비싸지도 않고 깨끗한 곳입니다. 저처럼 현지에 사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정보죠.”
장민의 도움으로 들어온 숙소는 단출한 싱글 침대 하나와 간단한 화장대, 텔레비전과 작은 냉장고가 있는 비즈니스 호텔이었다.
종일 긴장을 해서인지 온몸이 땀에 젖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핸드폰에 저장된 이준형의 번호를 눌렀다.
“준형아! 지금 통화 가능해?”
-그럼. 거긴 지금이 몇 시더라?
“여기 북경이야.”
-뭐? 중국 북경? 갑자기 왜 북경이야?
“전에 내가 말했었지. 중국 요리 협회에서 제안한 중국 진출 문제.”
-그럼 기억하지. 협회 서울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보낸 제안서 아직 가지고 있어. 나도 나대로 조사를 좀 하려고.
서인우가 아직 젖어있는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지자 핸드폰을 침대에 놓고 스피커 폰으로 돌렸다.
-그런데, 너 아직 생각 없다고 하지 않았어? 베트남만도 정신 없다고. 그래서, 나도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그랬는데, 그 사람이 베트남까지 찾아왔어.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달라고.”
-거기까지? 그래서, 네가 받아들였구나?
“응, 그런데, 이쪽에서 처음 제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어. 이미 나만 오케이 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식당을 북경에 준비 중이라고.”
-알겠다. 네 성격에 그걸 확인하러 급하게 갔고, 분명히 뭔가 찜찜한 게 있어서 나를 찾은거고, 맞냐?
“그래, 우선 여기 식당이 생각보다 너무 크고, 너무 좋은 조건인데 무조건 내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뭔가 이상하고, 무엇보다 처음 접근했던 남성재라는 사람 자체를 믿지 못하겠어.”
-오케이. 접수 완료.
이준형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쪽에서 너한테 접근했으니까, 이제 우리 쪽에서 사실 확인을 하면 되겠지.
“응. 확실하게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서.”
-너는 우선 그곳에서 최대한 정보를 모아와. 내가 여기서 남성재라는 사람을 조사해보고, 또 중국 요리 협회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볼게.
“고맙다. 이런 일 믿고 의논할 사람이….”
-이 엉아밖에 없지? 우리는 시작부터 함께 한 동업자라는 사실을 잊었냐? 이 브레인 엉아가 확실하게 조사해서 연락해 줄게. 기다리고 있어!
이준형과 통화를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안정됐다.
“사부! 왜 또 이렇게 조용해?”
중식도가 가방에서 쓱 나와 빙그르르 한 바퀴 돌더니 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말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