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중식도의 소리가 낮게 깔린 게 장난은 아닌 듯 느껴졌다.
‘사부! 자세히 얘기해봐. 기분이 어떻게 이상해?’
-그냥 차가 이곳으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가슴이 뛰기 시작하더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공중에 계속 떠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아무래도 비행기를 오래 타서….’
서인우는 장난기가 완전히 빠진 중식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북경이 처음이라고 하니까 그럼 오늘 점심은 제가 제일 유명한 베이징 카오야를 대접하겠습니다.”
“베이징 카오야를요?”
“네, 유명한 집이 이 근처거든요.”
“그러면 제가 너무 큰 신세를 지게 되는데요?” “나중에 이곳에 [서풍]이 들어오면 그때 맛있는 요리 한 번 해주세요. 그럼 괜찮겠죠?”
장민이 안내한 식당은 예약하지 않으면 먹기 힘들 정도로 유명하다는 오리요리 전문점이었다.
마치 고적 답사를 나온 듯 예전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식당은 겉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다행히 한 테이블이 남아 있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서인우는 가방 안에 넣어둔 중식도가 계속 신경 쓰였다.
빨리 일을 마치고 어디든 사부와 둘이 있을 곳으로 가서 얘기하고 싶었다.
“여기가 150년 전통의 가장 오래된 북경 오리구이 전문점입니다. 주문은 제가 알아서 시켰습니다.”
“감사합니다.”
“술은 하시나요?”
“네? 술이요?”
“중국 사람들은 낮에도 일하며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사이에 술병이 꽤 보였다.
“3시에 사람도 만나야 하고 술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러네요. 다음에 꼭 술 한잔하도록 하죠.”
떨떠름한 차를 마시고 있다 보니 장민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요리사가 직접 바싹하게 잘 구워진 오리를 가지고 나와 먹기 좋게 썰어 주었다.
같이 나온 가늘게 채를 친 파와 오이를 동그란 밀전병에 싸서 춘장에 찍어 먹는 요리였다.
“언젠가 뷔페식당에서 비슷하게 나온 오리요리를 먹어본 적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러 훈제오리를 이렇게 싸 먹게 나오는 곳이 있더라고요.”
“오늘 드디어 원조 베이징 카오야를 먹어보네요. 장민씨 덕분입니다.”
“어서 드셔보세요. 오랜 시간 잘 구워서 껍질이 아주 바삭할 겁니다.”
진한 갈색을 띠는 오리 껍질은 콰삭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바싹하게 구워졌다.
느끼할 수 있는 기름기는 같이 먹는 파채와 오이 덕분에 많이 없앨 수 있었다.
“맛있는데요? 진짜 바삭합니다.”
“화덕에 오래 구워서 그렇답니다.”
-원래 이 요리는 아주 옛날 황실에서 즐겨 먹던 궁중의 고급 요리다.
‘사부! 그걸 사부가 어떻게 알아?’
-나 왜 이러냐? 이 내용을 내가 어떻게 알지?
‘사부! 뭔가 기억이 나는 거야?’
-몰라. 자꾸 속이 울렁거리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
“이런 귀한 요리를 먹어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베이징 카오야 만드는 걸 봤습니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면 정말 도전해보고 싶은 요리죠.”
“맞아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라서 그날 준비한 재료가 끝나면 여기도 문을 닫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운이 좋았네요.”
“네, 중국 사람들은 특히 오리요리를 아주 귀하게 생각하고 즐겨 먹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오리고기와 양고기는 찾아다니며 먹으라는 말이요.”
-그렇지. 닭고기는 그냥 눈에 보이면 먹고, 돼지고기는 될 수 있는 대로 덜 먹으면 좋다. 그리고, 쇠고기는 아예 안 먹는 게 가장 좋다고 하지.
‘사부?’
-내가 방금 뭐라고 떠들어댔냐? 나 진짜 왜 이러지?
당황하는 사부의 목소리와 줄줄 나오는 얘기를 들으며 서인우의 머릿속도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사부, 빨리 일보고 나중에 둘이 얘기하자. 사부가 그러니까 나도 자꾸 머리 아파지려고 그래.’
-인우야! 나…. 지금 떨고 있냐? 알았다. 잠시 입 닥치고 있을 테니까, 일 봐!
서인우는 유명하고 귀한 요리를 먹으면서도 생각은 온통 사부에게 가 있었다.
중국 요리 협회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식당에서 나와 크고 고급스러운 카페로 이동했다.
“여기 카페도 대단히 크네요?”
“중국 서민들 점심값의 세 배가 넘는 커피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즐기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3층으로 된 카페에 거의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뭐 자금성 안에도 별다방이 들어올 정도니까요.”
“별다방이요?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오늘 약속은 어떻게 잡으신 건가요?”
“서인우 셰프님 연락받고 바로 중국 요리 협회에 전화했더니, 이 일을 전담하고 있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서인우 셰프님 이름을 말하니까 바로 흔쾌히 시간을 내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정말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본사를 통해 [서풍]하고 관련된 일이라는 얘기를 미리 들었기 때문에 잘되기를 바랐죠.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오리고기의 기름기를 단번에 씻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장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뭐라 중국어로 짧게 말하며 손을 흔들자 체구가 작고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그들 앞에 다가왔다.
“니하오!”
“니하오!”
서인우를 바라보며 반갑게 인사하는 남자에게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인사말을 내놓았다.
그 뒤의 모든 대화는 장민이 통역을 맡아 주었다.
[서풍]의 중국 진출을 결정하기 전에 남성재를 통해 들었던 중식당을 직접 보기 위해 왔다는 얘기를 전하자 남자가 준비해온 서류를 꺼내 보였다.
“이곳이 지금 협회에서 준비 중인 중식당이라고 하네요.”
서류에는 3층짜리 커다란 건물 사진과 그 아래 남성재가 제안한 조건들이 적혀 있었다.
“서인우 셰프님께 [서풍]의 요리를 완벽하게 마스터한 전문 요리사 두 명을 중심으로 총 열 명의 전문 요리사가 일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너무 큽니다. 이렇게까지 크게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서인우의 질문에 협회 남자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바로 답을 내놨다.
“이곳은 보다시피 북경에서 상권이 가장 크게 발달한 곳입니다. 세계 각국의 볼거리, 먹을 거리, 즐길 거리가 다 모여있는 곳이죠. 그런 곳에 중국 요리 협회와 서인우 셰프의 이름을 걸고 하는 식당은 이 정도 규모는 돼야 합니다.”
잠시 당황한 서인우는 구체적인 투자 액수나 규모 등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남성재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성재 씨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서울 지부장이니 서울에 있죠.”
“중국에서는 일을 하지 않습니까? 서울만 전담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그 사람은 거의 한국에서만 일합니다.”
“그러면 지금 준비 중인 식당은 또 다른 직원이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 건가요?”
협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큰 규모의 사업이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서인우 셰프와 일하기 편하게 언어가 되는 남성재씨가 사업 추진을 한 거고요.”
“만약 내가 투자를 포기한다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이 거대한 사업도 접으시는 겁니까?”
남자가 당황한 듯 콧등에 난 땀을 닦았다.
“남성재씨가 자신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에 [서풍]을 열도록 책임지고 일을 진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서인우는 여러 번 찾아와 처음에는 요리만 전수해 주면 된다고 하더니 이런 큰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좀 께름직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더 알아보고 결정해야겠네.’
-내가 보기에도 그래. 지금 저 사람 눈빛이 불안해.
‘통역을 통해 대화하니까 그 사람의 마음을 읽기 힘드네.’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다.
‘사부는 이제 좀 괜찮아?’
-조금 편해졌어.
‘다행이다.’
“그러면 지금 준비하고 있는 그 식당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네, 감사합니다.”
협회 남자의 차를 타고 10분 조금 넘게 이동했다.
차가 멈춘 곳은 조금 전 카페에서 사진으로 본 중식당 앞이었다.
마치 궁궐을 축소해 놓은 듯 높다란 3층 건물에 꽤 넓은 정원을 끼고 있는 식당이었다.
“실제로 보니 규모가 더 크네요. 이 정도 크기의 사업이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사실 이런 규모의 건물을 사서 식당을 오픈하려면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난 돈이 들어가죠.”
“네, 그래서 저는 자신 없습니다.”
“남성재씨와 아직 구체적인 얘기를 나누지 못하셨나 보네요?”
“네?”
남자가 씩 한 번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건물은 중국 요리 협회 건물입니다. 그래서 직원 고용과 광고, 식자재 같은 부수적인 부분들만 투자하면 되는 특별한 조건이라 서인우 셰프님께 제안을 한 겁니다.”
계속해서 열심히 통역해 주던 장민의 눈이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완전 대박 조건이네요. 이런 위치에 이 크기의 식당이라면 분명 엄청난 돈을 긁어모을 것 같은데요?”
“그러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요….”
서인우가 둘의 대화를 전혀 못 알아듣는 협회 남자를 향해 살짝 웃어주었다.
“그런데, 왜 우리 [서풍]일까요?”
“네?”
“이런 엄청난 조건으로 대박을 낼 수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왜 나인가 말이죠.”
서인우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서인우 셰프님이야 워낙 유명하니까요.”
“그건 한국에서 방송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아닐까요?”
“막상 여기에 와보니 좀 걱정이 돼서요. 너무 큰 규모와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뭐가 있는지 같이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장민의 눈빛 또한 묘하게 반짝였다.
“지금 이곳도 식당을 운영하는 것 같은데요?”
“중국 정통 요리를 하는 식당입니다. 분위기도 좋고, 규모도 커서 인기가 아주 많아요.”
“여기 사장님은 그렇게 인기 많은 식당을 왜 그만두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남자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거야 여기 사장님이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얼핏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정말 안타깝네요. 너무 멋진 식당인데….”
“그래서 이런 곳에 서인우 씨의 [서풍]을 열려고 계획하는 거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다 셰프님이 능력이 있어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3층짜리 건물, 그것도 중국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른 고풍스러운 건물에 굳이 한국식 중화요리인 [서풍]을 오픈하고자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성재씨 통해 얘기 들으셨죠? 우리 협회에서 이번 기회에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본받아 식당을 열게 되는 모든 과정을 중국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줄 생각이라는 거요.”
마치 서인우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부연 설명을 했다.
“아! 그래서 [서풍]을 찍은 거군요. 저도 방송에서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맞아요, 맞아. 말이 금방 통해서 다행이네요.”
장민의 반응에 남자가 웃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잠시 쉬는 타임이라 오늘은 대충 보시고, 다음에 확실히 결정되면 그때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세요.”
“알겠습니다.”
남자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간 서인우는 마치 중국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꾸며 놓은 실내 장식에 또 한 번 놀랐다.
“정말 근사합니다.”
“네, 우리 협회에서도 이 식당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큽니다.”
“입구로 들어가서 정원이 있는 게 특이하네요?”
“이게 중국 전통 주택인 사합원(四合院)입니다. 가운데 정원을 두고 네 개의 면에 방이 있는 모양이죠.”
작은 정원을 끼고 있는 조그만 궁궐 같은 모습에 푹 빠진 서인우의 입에서 감탄사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때였다.
-인우야! 나 뭔가 또 떠올랐어!
‘뭐? 그게 뭔데?’
-나 분명히 이런 구조의 집에서 살아봤어. 가운데 있는 정원 한쪽에 나무로 되어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서 차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사부! 이제 정말 기억이 돌아오려나 봐.’
-모르겠어. 순간순간 장면이 떠올라.
사부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다는 사실에 서인우도 점점 긴장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