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핸드폰에 뜻밖의 이름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제시카 씨.”
-잘 지냈어요?
“오픈 준비부터 정신이 없었네요. 우리 가게 제시카 씨가 구상해준 컨셉대로 아주 잘 나왔어요. 내가 나중에 사진 찍어 보내드릴게요.”
-목소리 들으니 안심이 좀 되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가끔 지영 언니 얼굴 보고, 사업도 잘되고 있고. 하여튼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낸다는 말이 전혀 섞이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축 처진 목소리에 요즘 전혀 잘 지내지 않고 있다는 속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가 잘 지내고 있지 않은데요?”
-네? 아닌데요, 정말 잘 지내요. 단지….
“편하게 얘기해요.”
-솔직히 말하면 서인우 씨가 궁금했어요. 혹시 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는데…. 내가 걱정을 해도 되는지도 몰라서.
“미안합니다. 내가 먼저 연락해야 했는데….”
-누가 연락하는 게 뭐 중요한 일인가요? 내가 더 궁금하고 더 걱정되니까 먼저 전화하는 거죠.
김서원의 작은 웃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죠? 우리 오빠가 또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했던 말이요.
“네. 기억하고 있고, 항상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 걱정하지 말고 밝고 에너지 넘치는 원래의 제시카씨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서인우 씨한테 별일 없으면 나도 이제 걱정하지 않고 잘 지낼게요.
“네, 제발요.”
이번에는 제법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언제 꼭 놀러 갈게요. 그럼 잘 지내요.
“네. 꼭 오세요. 그리고, 다음엔 내가 전화하겠습니다.”
-그 말 기억하고 있을게요.
짧은 통화가 끝나고 액정은 다시 까맣게 변해 있었다.
서인우는 뭔지 모를 먹먹한 기분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늘도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빨리 정리하고 들어가 쉬도록 하세요.”
“사장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주방에 항상 그렇듯 서인우 혼자 남아 있었다.
아니, 중식도와 둘이.
-무슨 생각 하냐? 조금 전 핸드폰 가지고 나간 후부터 너 왠지 좀 센티 해보인다.
‘김서원씨 전화였어.’
-왜? 보고 싶대?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래 별 사이 아니니까, 굳이 시차 따져가며 마감 시간 기다렸다가 멀리 베트남까지 전화하고 그러겠지. 응, 절대 별 사이 아니지.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며 괜히 심통을 냈다.
-강진수 말대로 빙구같은 놈. 여자 마음도 몰라주고.
‘그냥 나한테 별일 없는지 걱정되고 궁금해서 전화한 것뿐이래.’
-그러니까 별 사이 아닌데 걱정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냐? 이 빙구야!
서인우가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중식도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거야?’
-제발 좀 요리 말고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져봐.
‘여기 자리 잡느라 정신이 없었잖아. 이제 전화도 하고 그래야지.’
-잘 생각해봐. 이곳에 와서 적응하느라 힘들고 외로울 때 누가 떠올랐는지.
중식도의 말에 멍하니 상념에 빠진 서인우가 조금 전 통화하면서 들은 김서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 들으니까 반가웠어. 그러면서 목소리가 편해 보이지 않아 걱정도 됐고.’
-그런 게 사랑이라는 건데…. 요리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리나 떠들어대는 네가 사랑을 알겠냐?
중식도의 말에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 * *
오상준에게 [서풍]의 요리를 본격적으로 가르쳐주기 시작한 지 오늘이 5일째 되는 날이다.
탕수육, 누룽지탕, 칠리새우 등 인기 메뉴는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오상준이 맡아서 요리했다.
“정말 머리 좋은 사람이 노력까지 하니까 무섭게 발전하네요.”
강진수의 얼굴에 부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오상준 씨가 워낙 특출난 거고, 우리는 평범한 거야.”
“사실 제가 일주일 동안 천천히 반복해서 알려주려고 했는데, 다음 날 이미 똑같이 만들어 내더라고요.”
요리는 과학이라면서 새로운 메뉴를 하나씩 배울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는 오상준은 말 그대로 A.I 그 자체였다.
하나 아쉬운 건 강진수만큼 타고난 미각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오늘 주문은 강진수 씨와 오상준 씨가 전부 맡아서 하도록 할겁니다.”
-왜? 우리는 이제 놀 거야?
‘아니, 우린 재료 손질하고, 웍 청소도 하고 그래야지.’
-뭐야? 우리가 저 둘 시다바리 한다고?
‘적어도 우리 [서풍]에서는 그런 거 없어. 다 동등해.’
-그래봤자 시다바리 맞구만.
“오상준 씨는 오늘부터 우리 가게 대표 메뉴인 백 짬뽕을 만들어 보세요. 나는 딱 한 번 알려줄 겁니다. 자신 있죠?”
“네, 정확히 기억해서 완벽한 서풍의 맛을 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인우가 베트남 직원들에게도 간단히 설명했다.
“내가 여기 셰프들을 가르칠 때 주의해서 지켜보고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해 보세요. 때가 되면 여러분들에게도 요리비법을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네! 셰프!”
어느새 강진수의 대답을 따라 하는 새로운 직원을 향해 서인우가 활짝 웃어 보였다.
“주문 들어왔습니다. 탕수육 하나, 백짬뽕 둘, 새우 볶음밥 하나. 이제 시작해 볼까요?”
강진수가 바로 탕수육을 준비했다.
서인우가 백 짬뽕을 준비하고 있는 오상준 곁으로 다가갔다.
“매일 봐서 재료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겠죠?”
“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웍에 기름을 붓고 약한 불로 썰어놓은 파와 마늘을 은근하게 볶았다.
그러자 향긋한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태국 고추 두 개를 잘게 부숴 넣고 거기에 간장을 팬에 둘러 촤라락 부었다.
준비한 채소를 모두 넣어 최고의 화력으로 빠르게 볶다가 만들어 놓은 닭 육수를 부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해물파티.
“이 백 짬뽕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채소와 해물을 잘 볶아 무르거나 질기지 않게 하는 겁니다. 아삭아삭하면서 탱글탱글하게.”
소금과 굴 소스로 간을 한 후 완성된 백 짬뽕을 잘 삶은 면이 담긴 그릇에 담았다.
“다음에 주문 들어오면 혼자 만들어 보세요. 가능하죠?”
“네, 가능합니다.”
강진수가 탕수육을 완성해 벨을 누르고 바로 준비된 볶음밥 재료를 가져갔다.
이어지는 주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주방이 돌아갔다.
서인우는 재료 손질을 도우며 오상준과 강진수가 만드는 음식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잠시 한가해져 웍을 손질하고 있던 서인우에게 김예은 매니저가 조용히 다가왔다.
“사장님. 지난주에 오셨던 그분이 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해보니, 남성재와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나갈게요.”
강진수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바로 주방을 나간 서인우는 남성재와 함께 가까이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시원한 커피를 앞에 두고 남성재가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지난번 서인우 셰프님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보고하자마자 바로 작성된 계획서입니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가서 계약하라고 해서요.”
“오늘 계획서 설명 듣고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성재가 계획서를 펼쳐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중국 요리 협회 출신 경력 10년 이상인 셰프를 두 명 선출할 겁니다.”
“그분이 [서풍]의 요리를 배우게 되는 건가요?”
“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서인우 셰프님이 계시는 이곳으로 와서 직접 배워가도록 할 겁니다. 물론, 그 셰프들에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저희 쪽에서 지급할 겁니다.”
서인우는 경력 10년 이상이라는 말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대신 기본기는 확실히 갖췄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 기간은 어느 정도 예상하시나요?”
“아시다시피 배우는 사람이 얼마나 성실한가에 달려있죠. 이미 중식을 10년 이상 하신 분들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 합니다.”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 좀 자세히 읽어봐 주세요.”
남성재가 계획서의 중간 부분을 가리켰다.
“서인우 셰프님이 그 두 셰프의 요리를 서풍의 맛이라고 인정하는 바로 그때 지금 준비하고 있는 중식당을 오픈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혹시 그 중식당을 [서풍]의 체인점으로 운영해도 될까요?”
“저희 [서풍]은 따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쭤보는 겁니다. 서인우 셰프님께 직접 배운 셰프가 요리하는 [서풍] 중국 지점으로 사업을 확장해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서인우 또한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서풍의 맛을 낼 수 있는 셰프가 서풍의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면서 다른 이름의 간판을 걸고 장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말씀은 북경에 준비하고 있다는 중식당 이름을 [서풍]으로 하고 싶다는 건가요?”
“네, 우리 협회에서는 서인우 셰프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피나는 노력 끝에 [서풍]을 이어간다는 그 스토리를 그대로 살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다른 간판을 걸고 서풍의 맛을 내는 건 아니라는 판단이에요.”
“저도 그 부분은 같은 생각입니다. 서풍의 맛을 확실하게 배워 똑같이 만들 수만 있다면 당연히 [서풍] 이라는 이름으로 해야 하겠죠.”
남성재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같은 생각이라니 정말 다행입니다. 우린 [서풍]의 맛을 중국에 선보이고 싶은 겁니다. 그 뜻을 이해해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중국에 [서풍] 체인점을 만들려면 가게 임대부터 인테리어, 광고에 직원 채용까지 모두 신경써야 할 부분들일 겁니다.”
서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번 베트남 진출로 경험해봐서 아는 일이었다.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를.
“하지만, 이번 제안은 우리 협회에서 [서풍]의 맛을 선보이고 싶어 시작한 일이니, 서인우 셰프님은 공동 투자로 계약을 하시고 복잡한 실무는 협회 쪽에서 일괄 처리하는 걸로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공동 투자요?”
“네. 처음엔 협회에서 욕심을 부려 서인우 셰프에게는 요리만 전수해 주고 지분을 정해 일정 수익만 나누는 걸로 말씀 드렸었죠?”
“네, 사실 저도 그렇게 되면 [서풍]이라는 이름을 걸 수 있을까 고민을 하기는 했습니다.”
남성재가 눈에 힘을 주며 계획서를 다시 한번 가리켰다.
“맞습니다. 확실하게 서풍의 맛을 낼 수 있게 지도해 주시고 서인우 셰프님과 우리 협회가 공동으로 투자해서 중국 진출을 이뤄보도록 합시다.”
서인우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남성재의 얼굴 또한 불안해 보였다.
“갑자기 또 다른 제안을 해서 더 복잡하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우리 협회는 [서풍]의 중국 진출을 계획했던 거라서요.”
서인우가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한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서인우 셰프님께 서풍의 맛을 확실히 전수하여 중식의 본거지인 중국 북경에 [서풍]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걸어보고 싶다는 게 협회의 뜻입니다.”
“제 생각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투자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결정이 쉽지는 않네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동료분들과 다시 의논해보시고, 확실히 마음이 정해지시면 다시 얘기 나누도록 합시다. 저희는 서인우 셰프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심사숙고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던 서인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의아한 듯 쳐다보던 남성재가 물었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지금 준비하고 있다는 북경 중식당의 위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적어도 어떤 곳에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요. 잠시만요.”
남성재가 가방에서 다른 서류를 하나 꺼내 펼쳤다.
“사실 오늘 계약까지 진행하게 될지 몰라 준비해온 서류입니다. 여기에 북경 식당 주소가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뭐든 다 알아보시고 충분히 고민한 후 연락해 주십시오. 한 말씀만 더 드리자면 우리 협회는 서인우 셰프님과 [서풍]의 중국 진출을 진심으로 염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기다리시지는 않게 하겠습니다.”
카페에서 나와 남성재와 헤어진 서인우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서 북경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