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180화 (180/200)

제180화.

“이 시간에도 이렇게 손님이 많네. [서풍]은 벌써 문 닫았는데 말이야.”

한기태와 얘기하고 있는 서인우의 뒤에서 왕타오가 신나 떠들어댔다.

“사장님이시죠?”

서인우의 얼굴을 보고 놀란 왕타오가 그의 유창한 베트남어에 한 번 더 놀란 듯 뒤로 주춤해 보였다.

“아니 우리 가게에는 무슨 일로?”

“내가 본 적도 없는 요리 스승님이 여기 계신다고 해서 너무 궁금해서 얼굴이라도 보러 왔습니다.”

왕타오와 한기태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눈짓을 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중국에서 내게 요리를 가르쳐준 스승님이라고 하던데요. 본인 맞습니까?”

“나도 그 소문은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내가 아니라고 반박할 방법도 없고 말이야.”

왕타오가 그 소문의 출처를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시군요. 그러면 앞으로 그런 소문에 적극적인 해명 바랍니다. 사실 제 스승님이 그 소문을 듣고 굉장히 불쾌해하시거든요.”

“네? 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그,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인우가 한기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남지운 셰프 불러주세요.”

“아! 네.”

한기태가 주방으로 들어가 남지운을 데리고 나왔다.

다들 예상하였지만, [서풍]에서 함께 일했던 남지운이 등장하자 하나같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지운 씨. 좋은 조건으로 가시게 됐다더니 그곳이 여기였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이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조건이 더 좋다면 당연히 그곳을 선택해야죠. 하지만!”

서인우가 남지운과 한기태, 왕타오를 하나씩 쳐다봤다.

“적어도 남지운 셰프 자신의 요리를 할 줄 알았습니다. 왜 이런 요리에 서풍이라는 이름을 걸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혹시 그게 이직 조건이었습니까?”

남지운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내 요리를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달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이런 짝퉁 서풍을 만들고 계셨다니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짝퉁 서풍이요?”

“양심에 손을 얹고 지금 만들고 있는 요리가 서풍의 맛이 맞나요?”

남지운이 말을 잇지 못했다.

“서풍이라는 이름에 무슨 특허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건 우리 자유 아닙니까?”

“한국분이시죠?”

서인우가 화가난 듯 반발하는 한기태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게 뭐요?”

“그러면 서풍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이름 지었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겠네요.”

“그건….”

잠시 주춤하던 한기태가 왕타오와 뭐라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목소리를 한결 부드럽게 해서 말을 이었다.

“네. 그 방송 봐서 저도 잘 압니다. 여기 사장님도 그런 유명한 서풍이 들어온다는 걸 알고 이름이라도 똑같이 지어서 서인우 셰프님같은 그렇게 멋진 요리를 하고 싶으셨다고….”

서인우가 주절주절 변명해대는 한기태의 말을 잘랐다.

“어떤 이유에서든 같은 간판은 손님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요즘 이곳이 [서풍]체인점이냐는 문의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냥 우연히 같은 이름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왕타오씨! 간판에 서풍 이름 우연입니까? 우리가 백화점에 입점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올린 거냔 말씀입니다.”

왕타오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기 건너편 백화점에서 일하는 친구가 알려주긴 했습니다. 그래도 워낙 작게 써놔서 뭐 문제가 될 건 ….”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서풍] 체인점으로 오해받는다고 말입니다. 괜히 더 문제 되기 전에 최소한 한국어는 없애 주시죠.”

한기태가 왕타오의 답을 기다린다는 듯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풀이 죽은 한기태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한글 부분은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간판뿐 아니라 어디에도 서풍 이름은 더는 나오지 않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내일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지운씨.”

“네?”

계속 고개만 숙이고 있던 남지운이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놀란 듯 쳐다봤다.

“[서풍]의 맛을 포기하고 선택한 만큼, 남지운 씨 맛을 내도록 하세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요리를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

“그나마 그동안 알고 지낸 정을 생각해서 이 정도로 얘기 끝내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서인우는 고개를 조아리는 남지운이 애처롭게 보였다.

처음 면접 때 [서풍]의 맛을 제대로 배워서 이곳에 자기 이름의 가게를 차리고 싶다는 그가 왜 그토록 성급한 결정을 하게 됐을까 답답했다.

누구의 강요도 없었던 그의 선택이었다.

서인우는 말없이 남지운의 눈을 한 번 더 지그시 쳐다보고는 직원들과 함께 가게를 빠져나왔다.

왕타오는 약속한 이틀째 되는 날 간판을 새로 올렸다.

물론 베트남어로 서풍이라고 적혀 있지만, 작게라도 적혀 있던 한국어 서풍이라는 글자가 빠져 있어 누구나 원래 서풍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장님, 이 영상 좀 보세요.”

김예은 매니저가 불붙은 듯 정신없었던 점심 장사 후 잠시 정리하고 있는 서인우에게 달려왔다.

테블릿에 펼쳐진 화면에 서인우 얼굴이 버젓이 있었다.

“어? 우리 사장님 아니에요?”

“맞아요. 며칠 전에 우리가 짝퉁 서풍 찾아갔을 때 홀에 있던 손님이 촬영한 영상이래요.”

“매니저 누나? 이게 지금 조회 수가 엄청난데요?”

“우리 사장님이 이미 유명인이기도 하고, 지금 이곳 교민들 사이에서도 여기와 거기 원조 논란이 한참 이슈였다네요. 이걸로 일단락된 거죠.”

강진수가 화면을 스크롤하며 댓글을 읽어나갔다.

“댓글에서도 장난 아니네요. 우리 사장님 멋있다고 난리인데요? 이제 저쪽 서풍은 다들 짝퉁 서풍이라고 부른답니다. 고거 쌤통이다.”

-결국 한 방 먹이고 온 거냐? 나를 사칭한 놈은 제대로 혼내줬고?

‘자기도 그 소문은 들었는데,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나?’

-분명히 자기가 일부러 소문을 냈을 거야. 어디 이 신급 사부의 능력을 사칭하고 말이야. 내가 확 칼춤을 한바탕 보여줘?

‘이제 간판도 교체했고, 서서히 정리 될 거야.’

더는 백화점에 문의 전화도 없을 것이고, 이곳과 그곳을 비교하는 원조 논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인우는 마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았다.

이국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같이 잘해보자 맘먹고 들어온 남지운의 비참한 눈빛이 쉬이 잊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놈은 또 다른 살길을 찾게 되어 있어. 설마 그 일로 잘리기야 하겠냐?

‘사부가 자꾸 생각을 읽으니까 고민도 맘 놓고 못 하겠다.’

-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차피 내 손바닥 안이거든? 우리 둘은 한 몸이라는 거 잊었어?

‘그래, 잡생각은 버려야지. 한 몸으로 저녁 장사 준비나 해볼까?’

-이, 이상하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네.

‘매운 양파부터 썰어야겠다.’

-이런!

“2번 테이블 탕수육, 칠리 새우. 짬뽕 둘, 잡채밥 하나. 5번 테이블 누룽지탕, 먹물 만두 하나, 백 짬뽕 둘. 그리고 1번 룸 단체손님 코스 B 준비합시다.”

영상 때문인지, [서풍]은 오픈 후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장님. 이럴 때는 정말 손이 네 개면 좋겠습니다.”

-내가 좀 더 실력 발휘를 해주지.

중식도를 잡은 서인우가 대답 대신 현란한 칼솜씨를 보여 주었다.

“사장님, 방금 한 말 취소요. 손 네 개 말고 사장님 오른팔이 되고 싶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강진수의 농담 한마디로 주방에 잠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먹물 만두 포장 모두 다섯 개 들어왔습니다.”

포장 용기가 만들어지자마자 시작된 냉동 먹물 만두 포장은 시작부터 열풍을 일으켰다.

“우리 애들이 먹물 만두 사오라고 해서 내가 일부러 여기서 식사한다니까. 온 김에 나도 맛있는 요리 먹고 만두도 사가고.”

“우리 집사람은 도대체 여기 만두 몇 개를 샀는지, 일주일 내내 아침으로 시커먼 만두만 내놓더라고.”

“그거 아침 식사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속도 편하고 든든해서 나도 찍소리 안 하고 먹긴 하지. 솔직히 우리 마누라가 하는 밥보다 몇 배는 더 맛있긴 해.”

이곳에서 식사하고 냉동 만두를 사서 가는 게 이제 정해진 코스처럼 되어 버렸다.

“오늘 만두 남은 분량 체크 좀 해봐야 겠습니다.”

“사장님. 안 그래도 만두 소 더 맹글어야 하겄는디요. 얼마 안 남았어라.”

“그래요? 지금 바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 오징어만 쪼사 주시믄 나머지 재료는 저희가….”

“잠시도 쉬지 못하시고 바쁘신데, 제가 금방 만들어 준비해놓겠습니다. 지금 좀 한가합니다.”

“쉬지도 몬하고 우짜야 쓸까나?”

서인우는 대답 대신 활짝 웃어 보이고는 바로 만두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샤사사사삭!

타다다닥! 타다다다닥!

그저 소리만 들리고 쌓여있는 재료만 보일 뿐 서인우가 잡고 있는 중식도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재빠르게 재료를 손질했다.

“정말이지, 다시 봐도 징허네요. 로케트여, 로케트.”

이명옥의 구수한 멘트에 중식도가 꿈틀거렸다.

-나 우짜야 쓸까나? 저 만두 누님 말투가 겁나 재미나부러. 매일 배우고 잡은디….

“푸훕!”

“사장님. 갑자기 왜 웃어요? 미친 듯이 칼질을 하시더니 설마 진짜 미치신 건….”

“아, 아니야. 혼자 딴생각 하느라.”

‘내가 정말 사부 때문에 돌아버려. 사투리는 언제 그렇게 익힌 거야?’

-아직도 나를 너처럼 평범한 인간으로 보느냐? 이 몸은 뭐든 배움이 빠르다는 사실 잊지 말도록!

“사장님은 항상 사리 분별 정확하고, 능력 쩔고, 그런데 가끔 이렇게 빙구같이 웃는단 말이에요. 이해 안 되게.”

“뭐 같이? 빙구?”

강진수와 서인우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이제 베트남 [서풍] 주방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나중에 언젠가 이 장면을 떠올리며 웃는 날이 있겠지?’

-다 귀한 추억들이니 소중히 간직해야지.

‘모두 사부의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 만들어진 추억들이야. 그래서 난 항상 사부에게 감사해.’

베트남 MS백화점에서 [서풍]을 오픈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이제야 좀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서풍]은 MS백화점 입점 식당 중에서 첫 달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다.

-안녕하세요. 본사 유현주에요. 지금 좀 한가한 시간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그럼요, 덕분에 할아버지한테 칭찬 많이 들었어요.

“네?”

-어제 회장님이 오랜만에 회사에 들르셨거든요. 베트남 백화점 한 달 매출 현황 보고가 있어서요.

서인우는 갑자기 회장님 안부를 들으니 반가운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회장님은 여전하시죠?”

-네, 그래도 한 해 한 해 건강이 걱정이긴 하죠. 그러고 보면 서인우 대표님이 우리 할아버지에게 약이네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제 보고 들으시고는 오늘 기분이 좋으셔서 장 비서님하고 백 짬뽕 드시러 [서풍] 가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안부 전화 한 번 드려야겠습니다.”

-네,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 MS 백화점 베트남점을 위해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서든 항상 최선을 다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요. 매출 1위 축하 겸, 안부 전화 한 거였는데, 믿음이 팍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이른 시일 내에 전화한다는 말씀도 꼭 같이 전해주시고요.”

-네!

갑작스러운 전화가 반가웠다.

주방으로 들어간 서인우가 오상준 곁으로 다가갔다.

“오상준 씨. 오늘 저녁 메인 요리 맡아서 해보도록 합시다.”

“네? 저는 아직 준비가….”

“오늘부터 한 달간은 오상준 씨가 혼자 한다고 생각하고 요리를 만들어 주세요. 물론 나와 강진수 씨가 도울 겁니다.”

당황하기는 강진수도 마찬가지였다.

오상준과 강진수가 쌍으로 눈만 깜빡거리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 달 말에 강진수 씨 일주일 휴가받아 한국에 다녀올 겁니다.”

“제가요? 나도 모르는 휴가를요?”

“할머니 뵈러 가야지. 자주 찾아뵙는 조건으로 여기 따라온 거 기억 안 납니까?”

“거의 매일 전화 통화 해요.”

“내가 강진수 씨 할머니와 한 약속입니다. 나 약속 깨는 거 아주 싫어하니까 그런 줄 알아요. 그리고 오상준씨!”

“네?”

“오상준 씨가 강진수 씨 대신 요리할 수 있어야, 여기 강진수 씨가 할머니 뵈러 갑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갑자기 군대 훈련소인 듯 착각을 일으킬 만큼 오상준이 큰 소리로 대답하자 주방으로 막 들어오던 김 매니저가 주춤하고 멈춰 섰다.

“사장님! 한국에서 만났던 분이시라면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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