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영수증을 한참 노려보고 있던 서인우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오픈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방금 찍은 사진 나한테 전송해 줘.”
“네.”
한 두 가지 더 사진을 찍은 후 서인우가 거래처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작했다.
“[서풍]의 서인우입니다. 오늘 보낸 해물들이 처음 나와 약속한 최상급 상품들 맞습니까?”
-그, 그럼요. 아주 좋은 특급….
“지금 사진 보냈으니 확인하고 통화하시죠.”
서인우가 잠시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사진 보셨죠? 다시 묻겠습니다. 나와 계약한 특급 상품 맞습니까?”
-오늘 해물들 가격이 좀 올라서 ….
“분명 가격이 달라지면 미리 통화하기로 했었습니다. 기억하시죠?”
-네.
해물 가게 사장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이 답에 따라 계속 거래할지 정하겠습니다.”
핸드폰으로 크게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해물 가격이 올랐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보내준 해물이 나와 계약한 최상급 상품입니까?”
-….
대답이 넘어오지 않았다.
“오늘부로 거래는 없던 걸로….”
-죄송합니다. 오늘 보내드린 해물은 최상급 아닙니다. 지금 바로 다시 보내겠습니다.
서인우는 당장이라도 거래를 취소하고 싶었지만, 지금 바로 보내도 오픈 준비하기 빠듯할 수도 있었다.
“최대한 빨리 나와 계약한 최상급 상품으로 보내주세요. 물건 받고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네.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서인우가 채소 박스를 가까이 가지고 왔다.
“강진수, 채소 꼼꼼히 체크해서 조금이라도 안 좋은 건 옆으로 빼놔.”
“네. 알겠습니다.”
통화 내용은 못 알아들었지만, 서인우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낀 강진수가 묵묵히 채소를 살폈다.
서인우 또한 전과 달리 물러 있거나, 신선도가 떨어진 재료들을 한 쪽으로 골라내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되어가면서 오상준을 비롯해 막내와 막내가 새로 소개한 새 베트남 직원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이명옥과 김명순까지 모두 출근을 끝냈다.
“오늘 해물이 좋지 않아 새로 주문했습니다. 지금 이건 그대로 반품할 겁니다.”
“빨리 보내준다고 했나요? 오픈 준비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는데….”
“지금 오고 있을 겁니다.”
해물뿐 아니라 채소까지 둘로 나뉘어 있는 모습에 직원들이 강진수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있었다.
“오늘 납품받은 채소도 싱싱하지 않은 것들이 조금씩 섞여 있어서 골라내고 있었습니다. 박스에 들어있는 재료들만 사용하도록 하세요.”
“이거 실수가 아닌 거 같은데요? 번번이 안 좋은 것들을 속에 숨겨서 보내는 게 고의적인 짓 같은 느낌입니다.”
“새로 보낸 해물 확인하는 대로 내가 거래처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다른 분들은 더 부지런히 재료 손질을 해야 할 겁니다.”
“네. 걱정하지 않게 최대한 빨리 손질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이명옥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두소 준비할라믄 시간이 겁나 오래 걸리는디, 사장님까지 안 계시면 저 혼자 억수로 거시기 한디요.”
-그라지. 내가 샤사샥 오징어를 다져줘야 만두소를 완성하는디.
먹물 만두의 특별한 재료 중 하나인 갑오징어는 서인우가 중식도로 부드럽게 다져주면 이명옥이 정해진 레시피대로 만들었다.
‘그러네. 우리가 오징어를 다져줘야 만두소를 완성하지. 그건 해놓고 가야겠다.’
-식자재 장난치는 놈들 혼내주러 가는 거지?
‘응. 그건 절대 용서 못 한다고.’
-무기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사부는 한 번도 무기인 적 없었어. 그런 하찮은 일에 사부를 이용하지는 않을 거야.’
-심쿵!
중식도의 농담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거래처 모두 다른 곳보다 주문량도 많고 가격도 많이 깎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을 들었던 곳이었다.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속임수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을 더는 신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직원들과 채소 손질을 함께 하고 있을 때 새로 주문한 해물이 도착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이번에는 처음 계약한 대로 크고 싱싱한 해물이 꽉 차 있었다.
“사장님. 이건 제대로 왔네요.”
서인우도 속까지 들춰 확인하고는 바로 갑오징어를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
오픈 전에 거래처에 다녀올 생각을 하자 서인우의 마음이 급해졌다.
샥샤샥!
다다다다닥!
평상시에도 칼끝이 보이지 않을 속도로 손질을 하던 서인우가 마치 화면 빨리 감기를 하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오징어를 다져 놓았다.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이명옥이 작게 한마디 했다.
“사장님 칼솜씨 징허네이.”
서인우가 손을 씻고 앞치마를 가지런히 벗어 서랍에 넣었다.
“거래처에 다녀오겠습니다. 오픈 준비 부탁합니다.”
주방을 나가는 서인우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 * *
거래처에 서인우가 도착하자 해물 가게 사장이 쏜살같이 뛰어나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사장님.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항상 내가 직접 물건을 고르는데, 오늘따라 몸이 안 좋아서 직원을 시켰더니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오늘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당황한 사장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금세 붉게 변했다.
“항상 최상급으로만 보내 드렸는데, 맘에 들지 않으셨나요?”
“지금까지 보내준 물건들이 정말 최상급이라면 오늘로 거래를 그만두겠습니다.”
“거래를 끊는다고요? 오늘은 큰 실수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제발 거래를 끊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내 말을 못 알아듣나 본데, 오늘 한 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닙니까?”
사장이 뭐라 말을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서인우가 핸드폰을 켜서 그동안 조금씩 눈속임을 했던 재료들 사진을 펼쳐 보였다.
“몰라서 가만히 있었던 거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서인우가 강렬한 눈빛으로 사장을 쏘아봤다.
“하지만, 티 나지 않게 반복해서 식자재로 장난치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분명 그랬는데…. 끝까지 신용을 지켰어야 했는데….”
두 손을 모아 흔들어가며 사장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뭐라고요? 방금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니, 누구한테 말입니까?”
서인우의 눈이 더 매섭게 사장을 노려봤다.
“사장님이 거래처는 다 그자한테 맡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외국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자가 누구냐고?”
서인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잠시 움찔하던 사장이 웅얼거리듯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사장님 식자재 관리를 맡아서 하고 있다는 후인퀑탄이요.”
“후인퀑탄? 미스터 탄?”
“네. 한국어를 잘해서 거기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 하나도 빼지 말고 사실대로 다 말하세요.”
사장이 입술을 몇 번 씹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티 나지 않게 한 단계 아래 해물을 보내고, 그 차액은 월말에 계산해서 그자한테 주기로 했습니다.”
“뭐요? 이미 나와 모든 계약을 다 끝냈는데, 왜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 준 겁니까?”
“그래야 계속 거래하게 해준다고 그래서….”
‘나한테 확인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믿었다는 건가? 분명 둘만의 거래가 또 있었겠지.’
화가 난 서인우가 김예은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매니저, 오늘 받은 해물 대금 보냈습니까?”
-아! 사장님 오시면 여쭤보고 보내려고 했는데요.
“지금 바로 보내세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무서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서인우를 향해 가게 사장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고 있었다.
송금 완료 문자를 확인 한 서인우가 가게 사장을 쳐다봤다.
“방금 오늘 받은 해물 대금 보냈습니다. 앞으로 이곳하고 거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한 번만….”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그럼요. 사실 나도 이렇게 사람 속이는 거 정말 싫어합니다. 워낙 큰 거래처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그만….”
서인우가 사장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럼 딱 한 번만 기회를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네? 조건이요?”
서인우가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후인퀑탄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월말에 그에게 돈 보낸 걸 찍어 나에게 보내 주세요.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사장의 눈빛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조금이라도 꺼려지면 오늘로 거래 끝내시면 됩니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우리 둘만 알고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두 번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와 계약한 최상급 재료가 아니면 절대 받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 없습니다.”
다시 한번 확답을 받은 후 해물 가게를 나와 다른 거래처인 채소 가게를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서인우의 방문에 당황한 듯한 직원이 사장을 불렀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인가요? 오픈 시간 아닌가?”
몇 번 봤다고 친한 척 서인우에게 웃으며 다가오는 사장에게 말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것 좀 보시죠.”
“이게 무슨 사진인데….”
자기가 납품한 채소에서 안 좋은 것들을 죄다 골라낸 사진을 보고 놀란 사장이 조금 전 직원을 노려봤다.
“설명해 보시죠.”
“네? 뭐, 뭐를….”
“나와 처음 거래를 틀 때 계약한 채소 맞나요? 다른 곳보다 비싸지만, 싱싱하고 좋은 것들만 보내준다는 약속 지키고 있었냐는 말입니다.”
떡하니 사진을 보이니 뭐라 잡아떼지도 못한 듯 사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물건들이 섞여 들어갔는지…. 참, 기가 막히네.”
어떻게 하나같이 발뺌 먼저 하고 보는지.
화가 난 서인우가 그전에 찍어놓은 사진들까지 쭉 펼쳐 날짜를 확인시켜 주었다.
“오늘 한 번 실수인 듯 넘어갈 생각 마십시오. 이렇게 티 안나게 무른 양파와 누런 파들을 섞어 보낸 거 다 알고 왔습니다.”
“정말 나는 몰랐다니까요. 내가 [서풍]같은 큰 거래처에 그런 장난을 하겠습니까?”
뻔뻔하다고 생각한 사장의 눈빛이 정말 억울한 듯 보였다.
반면에 안쪽에서 조용히 엿듣고 있던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가게에 납품할 때 사장님이 직접 하신 게 아닙니까?”
“내가 제일 좋은 것들로만 추려 놓으면 우리 직원이 박스에 잘 담아서 그쪽으로 배달합니다.”
“그럼 그 직원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군요.”
안쪽에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려는 서인우를 사장이 급하게 막아섰다.
“비록 작은 가게지만 내 직원 관리는 내가 합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되는 대로 연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부족한 물건은….”
“매일 납품하던 분량만큼 바로 준비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미 처리하셨겠지만, 안 좋은 재료들은 폐기처분 해주시길 바랍니다.”
서인우는 놀라는 모습을 보고 의심부터 했던 사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이런 사람이라면 오래 함께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잘 모르고 사장님부터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여기 사장이니 내 잘못 맞습니다. 혹시 염치없지만, 계속 주문을 넣어 주신다면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사장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인우를 간절히 쳐다봤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가게 문 앞까지 따라 나오며 연신 사과를 하는 사장을 뒤로하고 급하게 백화점으로 향했다.
오픈 시간이 막 지나 백화점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벌써 도착한 채소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사장님, 제가 이미 확인 다 했습니다. 아주 싱싱하고 깨끗합니다.”
“다행이네요. 자, 첫 주문 들어왔습니다. 양장피, 유산슬, 백짬뽕, 짜장면 둘. 바로 요리 시작합시다.”
서인우가 중식도를 잡고 양장피 재료를 채 썰기 시작했다.
주방에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와 비슷한 속도로 또 한 명이 내는 도마소리가 경쟁하듯 주방에 울렸다.
-저놈 완전 칼잡이가 다 됐는데?
중식도의 소리에 궁금해진 서인우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