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은 남지운이 왕타오와 한기태를 번갈아 쳐다봤다.
‘가게 이름이 [서풍] 이라고? 그게 말이 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기 이름을 [서풍] 으로 할거라는 말씀입니까?”
“네. 들어오면서 간판 못 보셨어요? 베트남어로 [서풍]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작게 한글로도 적어놨는데요?”
“제가 베트남어는 전혀 몰라서요. 그래서 간판은 유심히 보지 못했습니다. 이건 좀…. 가게 이름을 똑같이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한기태가 가볍게 웃음을 웃었다.
“서울에서도 동네마다 같은 이름 식당이 얼마나 많은데요, 셰프님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마시고 무조건 지금처럼 최고의 맛만 내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어쩐지 좀 신경이 쓰여서요.”
“셰프님 실력을 믿고 시작하는 겁니다. 왕타오가 셰프님 요리를 맛보면 손님들이 열광할 거라고 기대가 엄청나요.”
남지운은 목덜미가 쭈뼛해지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찬사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왠지 서인우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불편했다.
“가게 잘 봤습니다. 약속대로 내일까지는 확답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 같이 있는 왕타오가 저와 중식당을 계획하고 준비한 건 백화점에 [서풍]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남지운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남 셰프님 요리를 접하고 나서 우리도 저런 멋진 요리를 대접해 드리자는 의미에서 이름도 [서풍]으로 하자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왜 애들 이름 지을 때 커서 저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똑같이 이름 짓기도 하잖습니까? 그런 부모의 마음하고 같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러기도 하죠.”
한기태의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 남지운의 얼굴이 약간 편해졌다.
“오늘 시원하게 확답을 해주시면 좋겠는데….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하루 더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가게를 한 번 쭉 둘러본 남지운이 짧은 숨을 뱉으며 쩝 입소리를 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루 더 고민해봤자 머릿속만 복잡하고 여기서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니 남 셰프님 아주 화끈한 상남자시네. 좋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계약서 작성은 언제 하게 되나요?”
“오늘 당장 하고 싶지만, 미처 준비가 안 되어있으니 내일 바로 계약서 작성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남 셰프님 계약만 끝나면 나머지 오픈 준비는 이미 다 되어있습니다. 이번 주말에 바로 오픈할 예정입니다.”
‘내일 계약서 작성하면 [서풍]도 바로 그만두어야 하겠네. 떠날 때는 말없이 미련도 남기지 말아야지.’
막상 마음의 결정을 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40대라는 나이를 먹는 동안 여러 번 이직 경험이 있었다.
망설였다가 좋은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좋은 일자리를 버리고 최악의 곳으로 이직한 적도 있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면 참 쉬울 텐데….
절대 예상대로 살아가지지 않는 게 인생이니 이번 결정도 결국 시간이 지나 봐야 판단이 가능할 거였다.
‘잘했어. 잘한 거야. 이미 중식은 자신 있다고. 단지 나는 절대 듣지 못했던 감동의 맛, 최고의 요리라는 말을 듣는 [서풍]의 요리를 배우고 싶었던 거였지.’
남지운은 이미 자신의 요리에 그런 찬사를 아끼지 않는 왕타오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줄 자신이 있었다.
* * *
한국에서처럼 항상 제일 먼저 가게에 도착해 재료 손질 및 이것저것 점검을 하고 있던 서인우는 누군가 주방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핸드폰 시간을 확인했다.
직원들 출근 시간은 아직 1시간도 넘게 남아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왔네.”
강진수가 걸치고 온 얇은 카디건을 벗어들었다.
“이제 3월인데 한국은 좀 따뜻해지겠죠? 여기 있으니까 계절감을 전혀 모르겠어요.”
“뭐 봄맞이 계획이라도 세웠어? 좀 더 자지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제가 아무리 일찍 와도 사장님이 항상 와 계시네요.”
서인우가 피식 웃고는 채소 손질을 이어갔다.
“엊그제 양장피 만들었을 때 결심했어요.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나와서 더 연습해야겠다 하고 말이에요.”
-저놈 볼수록 기특하단 말이야. 내가 맘잡고 특훈을 시키고 싶지만, 나설 수 없는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나도 친동생처럼 이뻐하니까. 내가 사부한테 받은 특훈을 그대로 전수해 줄 테니까 지켜보기나 해.’
-그 재미도 쏠쏠하겠네.
셰프복으로 탈의하고 돌아온 강진수가 서인우 앞에 놓인 양배추 통에서 큼직한 양배추를 집어 칼질을 시작했다.
타다다다닥!
나쁘지 않았다.
기본적인 손맛이 있는 데다, 미각도 정확한 편인 강진수의 유일한 단점이 속도였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경험이 적다 보니 노하우도 부족한 듯했다.
“강진수. 그거 다 썰고 나면 잠시 나한테 와봐.”
“네. 빨리 썰어 놓겠습니다.”
최대한 가늘고 일정하게 채를 썰어 모아놓은 강진수가 서인우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 뭐 할까요?”
“냉장고에서 연두부 하나 꺼내와 봐.”
“연두부요? 아! 마파두부!”
-너 드디어 내가 전수해 준 필살기를 가르쳐주려 하는구나!
‘응, 진수는 그럴 자격이 충분해.’
“마파두부 만들어 보라는 얘기죠? 사장님 마파두부 워낙 끝내주니까….”
“아닌데?”
“그럼 저 뭐 잘못했어요? 두부 먹이시려고….”
강진수의 농담에 잠시 크게 웃은 서인우가 연두부의 반을 잘랐다.
부드러운 연두부가 스르르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잘 봐!”
연두부를 가늘게 편으로 썰어 다시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간격으로 최대한 얇게 채를 썰었다.
마치 머리카락처럼 잘린 연두부 채를 보고 있는 강진수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있었다.
-저, 저놈 턱 빠진 거 같은데?
“이거 저 봤어요. 그 방송 경연대회에서 보여 주셨던 사장님 필살기 맞죠?”
“봤냐?”
“우와! 혹시 이거 저한테 알려 주시려는 거에요? 이 비법 드디어 제가 전수받는 거냐고요?”
흥분한 강진수의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턱은 안 빠졌나 보다. 겁나 시끄럽네.
“이렇게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고 오늘부터 죽어라 연습하면 언젠가는 꼭 해낼 겁니다.”
“좋아. 그러면 내가 오늘 이 요리 과정을 다 보여줄 테니 정확히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봐.”
“네! 셰프!”
“그것 좀 고만하라니까!”
“싫습니다! 셰프!”
잠시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인 서인우가 당근과 표고버섯을 얇게 편으로 썰어 가늘게 채썰어 놓았다.
그리고는 만들어 놓은 닭 육수를 꺼내 냄비에 부었다.
전분물도 넣고 간을 해 놓고는 다른 그릇에 물을 담아 가는 실처럼 채를 썰어 놓은 연두부를 살살 풀어주었다.
“이제부터가 제일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야. 이 연한 두부를 확 저으면 안 되고 이쑤시개로 살살 풀어주어야 깨지지 않고 잘 풀려. 명심해!”
“네! 셰프!”
“못 말린다.”
서인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이제 그릇에 있는 물을 버리고 두부만 이 육수에 잘 넣어 살살 풀어줘. 웍을 흔들어가며 조심조심.”
“우와! 이건 그냥 예술작품이에요.”
“나머지 채소들을 넣고 이렇게 살살 저어줘. 아기 다루듯 살살. 알겠지? 그럼 이제 맛을 봐봐!”
-인우 너 내가 가르쳐준 대로 아주 잘 기억하고 있네. 저놈도 너처럼 잘 기억하고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궁금하군.
‘오늘부터 매일 연습한다니까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작은 그릇에 덜어놓은 연두부 탕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강진수가 조심스럽게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
“대박! 이거 너무 부드러워요. 어떻게 이런 식감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사장님, 저는 정말 영원히 사장님한테 충성 할 겁니다.”
서인우를 끌어안으며 계속 떠들어대는 강진수를 밀어내고 있는데, 남지운이 들어오다 멈칫하는 모습이 보였다.
“남지운 씨. 왔어요?”
“안녕하세요.”
강진수가 여느 때보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남지운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간신히 웃으며 인사했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아! 아닙니다. 강진수씨가 잠시 장난을 쳐서….”
그새 웍에 남아있는 요리를 본 남지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이건…. 사장님이 방송에서 보여 주셨던 그 필살기 아닙니까?”
“남지운 씨도 보셨나요?”
“방송할 때도 보고 또 여기 오기 전에 다 찾아서 몰아 봤습니다.”
“그러셨어요? 괜히 쑥스럽네요.”
웃으며 얘기하는 서인우와 달리 남지운은 굳은 얼굴로 웍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진수 저놈한테만 이 필살기를 알려줬다 이거지? [서풍]에서 좀 오래 있었다고, 경력이 채 3년도 안 된 저 애송이만 키워줄 생각이군.’
“강진수 씨가 요리 연습한다고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왔네요.”
“사장님이 저 필살기를 오늘 저한테 전수해 주셨지 뭐예요? 진짜 열심히 연습해서 반드시 똑같이 만들어 낼 겁니다. 두고 보세요.”
‘아니, 두고 볼 생각 전혀 없는데? 난 지금 막 새 계약서에 사인하고 오는 길이거든. 괜히 미안해하고 고민했던 내가 바보였어.’
남지운은 출근 전에 일찍 한기태와 왕타오를 만나 계약서를 작성하고 주방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만둔다는 말을 언제 해야 할지, 또 어떻게 말해야 이 무겁고 죄송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왔다.
그때의 감정이 한순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차피 저 어린놈한테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줄 생각이었어. 내가 저놈만큼 [서풍]의 요리를 다 배우려면 몇 년을 이곳에서 따까리 노릇을 해야 할지 모르지.’
“저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순식간에 어두워진 남지운의 안색을 살피던 서인우가 바로 대답해주었다.
“밖으로 나갈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해도 되는 얘기입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강진수가 조용히 자리를 옮겨 조금 전 배운 연두부 썰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더 심통이 난 남지운이 망설임 없이 말을 시작했다.
“저 내일부터는 여기 못 나올 것 같습니다.”
“네?”
“네? 갑자기 왜요?”
서인우와 강진수의 질문이 동시에 쏟아졌다.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게 미리 말씀드려야 도리인 건 아는데, 갑자기 정해진 거라서요.”
예상치 못한 남지운의 발언에 당황한 서인우의 귀에 중식도의 소리가 들렸다.
-저 인간 혹시 월급 올려달라고 그러는 거 아니냐? 아니면, 어디 딴 데서 돈을 더 준다고 했나?
“갑자기 왜 …. 혹시 다른 곳에 취직하셨습니까?”
“네.”
“그곳도 중식당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더 좋은 조건을 찾아가시는 거겠네요!”
남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정을 하고 말씀하신 거니 붙잡을 수도 없겠네요. 그 좋은 조건이라는 게 단지 돈만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그럼요. 제 경력에 맞게 총괄 셰프로 가게 됐습니다.”
서인우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서풍]의 요리를 전부 익히고 싶다고 했던 남지운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이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니까….’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감추려 애쓰며 남지운의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남지운 씨와 오래 함께하고 싶었지만, 인연이 여기까지면 할 수 없는 거죠. 어디서든 잘 하실 거라 믿고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지운이 자리로 돌아가자 슬금슬금 서인우 곁으로 다가온 강진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냥 보내주시는 거예요? 당장 우리 일손이 부족한데 말입니다.”
“이미 결정된 일이야.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돼. 걱정하지 말고 오늘 배운 거 연습 많이 해놔.”
“네.”
평상시와 다르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한 강진수가 다시 연두부를 채썰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홀 매니저 김예은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그거 알아요?”
“뭐 말씀입니까?”
“출근하면서 보니까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중식당이 오픈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이 주변에도 중식당은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곳 간판에 서풍이라고 적혀 있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