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샥샥샥샥!
다다다다닥!
베트남에서도 여전히 인기 메뉴인 양장피를 만드느라 중식도를 잡은 서인우가 쉴 새 없이 채소와 해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너 그거 아냐?
‘뭐 말이야 사부?’
-방금 채소와 해물 손질할 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거.
‘에이, 무슨 말이야? 전처럼 엄청난 속도로 채 썰어놓은 이 재료들을 보며 그 말을 믿으라고? 게다가 크기까지 똑같잖아?’
-그러니까 나도 지금 당황해서 말하는 거 아니냐?
여느 때처럼 가늘게 썰어진 오이와 당근 오징어, 버섯들을 보며 서인우는 사부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내가 사부가 하는 말은 뭐든 다 믿는데, 이건 누가 봐도 사부 실력이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지.’
-너 자꾸 부정할래? 그럴수록 내가 더 혼란스럽다니까. 너 왜 이러냐? 드디어 득도한 거냐? 내 수준까지?
사부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서인우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접시 위에 가지런히 차려놓은 재료들을 빤히 쳐다본 서인우가 서랍 안쪽에 놓여있는 여분 중식도 중 하나를 꺼냈다.
샥샥샥샥!
다다다다닥!
조금 전 했던 것처럼 각종 채소와 해물, 고기 등 양장피 재료를 순서대로 채썰기 시작했다.
평상시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는 가지런히 다른 접시에 담아보았다.
-이제 너도 알겠지?
‘사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너 그 말 알지? 식당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뭐?’
-너는 나를 잡고만 있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그 속도와 내가 움직이는 모든 게 네 손 감각으로 익혀진 거지. 완벽하게 네 실력이 된 거란 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오늘은 내가 컨디션이 아주 좋은가 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사장님! 왜 똑같은 걸 두 개나 만드셨어요? 양장피 주문은 하나 아니었나요?”
강진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두 개의 접시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말대로 두 개의 접시에 찍어낸 것처럼 완전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재료들이 담겨있었다.
“강진수씨!”
“네! 셰프!”
“[서풍]의 양장피 완성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서인우는 한 접시는 그가 직접 만들고, 다른 접시는 강진수에게 완성하게 시켰다.
훨씬 먼저 완성한 서인우가 강진수에게 몇 가지 설명을 추가해주고는 요리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서인우 셰프다.”
“안녕하십니까? 주문하신 양장피 나왔습니다.”
가벼운 인사 후 소스를 부어 양장피를 잽싸게 섞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직접 소스를 섞어주시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정말 방송에서 본 요리하고 사진 찍은 것처럼 똑같네요.”
“저희 [서풍]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는 똑같은 맛을 내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일 맛있을 때이니 바로 드세요.”
다시 주방으로 들어온 서인우는 그제야 완성한 강진수의 양장피를 꼼꼼하게 살펴봤다.
아직 서인우 만큼 균일한 모양이나 속도를 내지는 못했지만, 제법 비슷하게 만들어 냈다.
“다음에는 속도를 좀 더 올려보도록 해보세요. 특히 재료 볶을 때 화력과 속도 조절을 잘해야 식감이 살아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던 남지운이 슬며시 다가왔다.
“사장님. 저도 [서풍]의 양장피 배우고 싶습니다.”
“양장피는 워낙 재료 수가 많고 손이 많이 가는 메뉴라서 다른 것부터 익히고 천천히 배우도록 하죠!”
“그래도 제일 배우고 싶었던 메뉴라서….”
항상 웃으며 얘기하던 서인우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걸 눈치챈 남지운이 바로 말을 바꿨다.
“하지만, 배움에도 다 때가 있는 거겠죠? 저도 언젠가는 [서풍]의 양장피를 사장님처럼 만들어 내고 싶어서 해본 말입니다.”
“맞습니다. 여기 강진수 씨도 오랜 시간 거쳐 체계적으로 익혔습니다. 속성으로 익혀서는 절대 변하지 않는 맛을 내기는 힘듭니다.”
“네. 지금 할 줄 아는 요리부터 완벽하게 익히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하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남지운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틀 후면 한기태와 약속한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오늘은 결정해서 연락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괜히 서인우 에게 밉보이게 된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하긴 내가 나가버리면 끝이긴 하지. 또 볼일도 없을 거야. 이렇게 하다가는 내 가게 차리는 게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한기태가 말한 가게를 직접 봐야 할 것 같았다.
화장실로 들어간 남지운이 조심스럽게 한기태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남지운 셰프입니다. 지난번 제안에 답을 드리기 전에 왕타오라는 분이 준비하고 있다는 가게를 직접 보고 싶습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답이 넘어왔다.
[당연합니다. 가게 위치와 규모 등 자세히 보고 결정을 해야 후회가 없죠.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마침 내일 휴무일이라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오후 2시, 지난번 그 카페에서 보도록 할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네,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자를 마친 남지운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다.
‘뭐 내가 죄지었나? 누구든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따르는 게 당연한 거지.’
괜히 헛기침을 크게 하고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 * *
“다음 주쯤에 다시 한번 찾아가세요.”
-너무 자주 만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만큼 적극적이라고 생각하고 더 좋아 날뛰겠지. 질질 끌지 말고 이제 뭔가 행동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네. 다음 주에 바로 만나서 회장님이 원하시는 확답 받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에 워낙 전문가라 내가 특별히 맡긴 거니까 하나라도 실수가 있으면 재미없을 겁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쪽 일에는 내가 딱 적임자라니까요.
능글맞게 웃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은 김원상이 꿈틀거리는 눈썹을 손톱으로 슬쩍 긁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거 제대로 배우게 해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 서인우.’
무엇을 상상했는지 금세 얼굴이 밝아진 김원상이 테이블 위 유선 전화를 연결했다.
-네, 회장님.
“차 팀장 올라오라 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노크 소리와 함께 재킷 단추를 여미며 차성철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앉으세요.”
항상 습관처럼 왼쪽 소파에 앉은 차성철이 김원상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H 백화점 매출 실적은 어떤가요?”
“꾸준하게 실적이 오르는 추세입니다. 지난달 매출은 강남점보다 1.5배 올랐습니다.”
“아무래도 차은석 셰프의 콴탕빠오 인기가 한몫했겠죠?”
바로 답을 내놓지 않고 잠시 입술을 꾹 붙이고 있던 차성철이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지난달은 죄송하지만, 오픈 행사 등의 영향이 있었을 거라 판단되어 아직 정확하게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이번 달 매출도 꾸준히 상승하는 걸로 봐서는 계속 지켜보시면 좋은 결과 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 만두 말이에요.”
“콴탕빠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걸 우리 [만가복]의 대표 만두로 해서 다른 지점에도 하나씩 시도하도록 해봤으면 하는데….”
차성철이 바로 말을 덧붙였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말씀하신 이후로 차은석 셰프를 만났습니다.”
“그래요? 역시 차 팀장이군. 뭐라던가요?”
“레시피만 정확히 익히면 그 맛은 쉽게 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대신 만두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만두 빚는 기술과 찔 때의 특별 비법을 배우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합니다.”
“각 지점에 아예 만두 담당 직원을 하나씩 두도록 합시다. 만두만 전담하는 직원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차은석이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펼쳐 보였다.
“지난번 차은석 셰프 만났을 때 찍어온 동영상입니다. 거기에서도 지금 김도영 보조 셰프가 만두를 전담하고 있습니다.”
김도영이 만두를 만드는 과정이 담겨있는 영상을 끝까지 지켜보던 김원상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탁 튕겼다.
“우리 [만가복] 다음 광고에 이 장면을 넣도록 합시다. 편집은 광고회사에 알아서 하라고 맡기고, 우리 [만가복]을 대표하는 만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 주자는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 광고를 각 지점에서 수시로 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래야 더 제대로 광고효과가 나는 거지.”
“그럼 말씀하신 대로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홍보부로 가서 잘 의논해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차성철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김원상이 낮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이 얘기를 잊어버렸네. 다음 달부터 부장 자리에 앉게 될 겁니다. 내가 차 팀장을 너무 아껴서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차성철이 회장실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건방진 놈. ‘감사합니다.’ 가 끝이야? 어디 한 번 실수만 해봐. 그냥 안 넘어갈 테니까.”
못마땅한 표정에 혼잣말을 내뱉던 김원상이 조금 전 통화했던 다음 주를 떠올리며 달력을 쳐다봤다.
그의 입꼬리가 다시금 슬며시 올라가고 있었다.
* * *
왕타오의 중식당은 [서풍]이 있는 백화점에서 대략 10분 거리에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는 중식당을 본 남지운이 당황해 머뭇거렸다.
그런 그의 손을 덥석 잡은 왕타오가 그를 끌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장식이 첫눈에 확 띄는 고급 중식당이었다.
금색 테두리가 반짝이는 테이블과 세트로 맞춰놓은 의자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고무나무로 된 미닫이문이 인상적인 룸에는 베트남어로 화려하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기태가 말한 대로 규모도 크고 새로 장식해서인지 깨끗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어떻습니까, 셰프님? 마음에 드십니까? 왕타오가 정말 투자를 많이 한 곳입니다.”
“고급스럽고 좋은데요. 혹시 주방을 좀 봐도 될까요?”
“그럼요, 이쪽으로.”
그들을 따라 들어간 주방 또한 지금의 [서풍]만큼 크고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벽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웍들과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 도구들.
화구와 물 나오는 수도까지 편하게 설치가 되어있었다.
“주방도 상당히 크네요?”
“그래야 최고의 음식이 나오죠. 작업 환경에 신경 많이 썼습니다.”
남지운의 눈빛이 이미 마음이 많이 넘어왔다는 걸 보여 주는 듯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빛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왕타오가 남지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이 주방에서 직원들을 맘껏 지휘하며 실력을 발휘해보세요. 월급은 지금 받는 것의 두 배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한기태가 왕타오의 말을 그대로 통역해주었다.
“네? 두 배요?”
[서풍]과도 업계 평균보다 월등히 많은 연봉으로 계약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액수의 두 배를 준다는 말에 남지운이 살짝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혹시 저에게 바라는 게 따로 있습니까? 어떤 특별한 조건 같은 게 있냐는 말씀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다른 이유 없이 남지운 씨의 능력을 높이 사서 드리는 제안입니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그냥 제 맘대로 최선을 다해 요리만 하면 되는 거란 말씀입니까?”
한기태가 왕타오를 슬쩍 쳐다봤다.
왕타오가 그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남지운 씨는 지금처럼 최고의 맛을 내주시면 됩니다. 특히 [서풍] 과 같은 메뉴들이니 그 맛을 그대로 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메뉴가 [서풍]과 똑같다는 말씀입니까?”
“한국식 중화요리 집 메뉴는 다 거기서 거기니까요.”
“그렇긴 하죠.”
“게다가 식당 이름도 [서풍]이니 당연히 메뉴도 같이 해야죠. 그게 남지운 씨를 스카우트하는 가장 큰 이유니까요.”
“네?”
남지운의 두 눈이 초점을 잃고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