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남지운은 그중 한 명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어제 식당에 왔던 왕타오였다.
처음으로 자신의 요리가 맛있다고 칭찬해줬던 남자이기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짜오!”
“신짜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인사를 하고 멍하니 서 있는 남지운에게 반가운 한국어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기태라고 합니다. 베트남에 온 지 올해로 5년 됐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무슨 일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지운을 향해 한 번 웃어 보인 한기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이분이 셰프님과 꼭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제가 통역도 해드릴 겸 같이 나왔습니다. 어디 가서 잠시 시원한 거 한잔하시죠.”
“제가 출근하는 길이라 시간이 별로 없는데요.”
“잠시면 됩니다.”
남지운은 계속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으로 흔들어 보이며 인사하는 왕타오를 보고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간 세 남자 앞으로 주문한 시원한 음료가 나왔다.
“시원하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신가요?”
“이분 성함은 왕타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업을 크게 하고 있어요.”
말은 못 알아들어도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인 왕타오가 남지운을 향해 연신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이분이 [서풍] 오픈하자마자 연사흘을 가서 식사하셨다고 하네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특히 남지운 셰프님 요리에 반하셨다고….”
“과찬이십니다. 어쨌든 맛있게 드셔 주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한기태가 잔에 맺힌 물방울을 휴지로 닦아내고는 목이 말랐는지 잔에 담긴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여기 왕타오가 최근에 중식당을 하나 차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중식당이요?”
“네, 본인도 중국 사람이라 어느 정도 요리가 가능한데, 특히 한국식 중화요리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남지운은 한기태의 말을 듣다 보니 어느 정도 이어질 스토리가 예상되었다.
‘이건 분명 우리 가게의 레시피를 욕심내거나, 아니면 나를 빼내 가려는 속셈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정말 출근해야 해서….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아! 바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가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셰프님 실력이 꼭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 우리와 함께합시다. 남지운 셰프님!”
“네?”
“셰프님의 실력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지났다.
여기 오기 전 준비 과정까지 다 해도 [서풍]에서 일한 지는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남지운이었다.
“여기 오픈한 지 이제 이 주째 들어갑니다. 그런 저에게 스카우트 제의는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닌가요?”
한기태가 베트남어로 남지운의 말을 통역해주자 왕타오가 두 손을 크게 흔들어가며 뭐라 대답했다.
“여기 왕타오도 요리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한 번 맛보면 바로 실력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분명 훌륭한 실력을 갖춘 셰프님이라 특별히 제안하는 거라네요.”
[서풍]에 지원할 때부터 이곳에서 일을 익혀 자신의 가게를 열 계획인 남지운이었다.
지금 이들의 제안을 쉽게 떨치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생각이 복잡해진 남지운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우선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언제까지 답을 해드리면 되나요?”
“저희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고민 충분히 해보시고 연락해 주세요. 여기 제 명함입니다.”
남지운은 처음 보는 회사 이름 아래 컨설팅 담당이라 적혀있는 한기태의 명함을 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해보고 이 번호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작정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으니 일주일 내에 전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왕타오가 준비하는 중식당은 네 개의 룸에 테이블이 스무 개가 넘는 제법 큰 규모입니다. 셰프님만 오케이하면 그 주방은 셰프님 지휘하에 돌아가게 될 겁니다.”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카페를 빠져나온 남지운은 출근길을 재촉했다.
생각할수록 너무 엄청난 기회였다.
[서풍]도 조건이며 같이 일하는 직원들 모두 좋지만, 이제 한 달도 안 된 자신이 총괄 셰프가 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어제 보니 [서풍]의 레시피도 뭐 특별한 것도 없는 것 같던데…. 나처럼 실전 경력 많은 사람이 사실 밑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도 좀 꼴이 우습긴 하지.’
뛰다시피 걷던 남지운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내가 [서풍]의 맛을 완벽하게 낼 수 있을 때까지 바닥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가겠다고 하고 여기까지 온 거였는데….’
생각이 많아진 남지운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러다 늦겠네. 고민은 나중에 하고 우선 출근부터 하고 봐야지.’
남지운이 백화점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조금 늦은 남지운 까지 도착하자 주방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모두 경력, 나이 따지지 않고 재료 손질부터 직접 하며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사장님, 오늘도 해물이랑 채소랑 정말 싱싱하고 좋은데요. 미스터 탄이라는 사람이 한 번 더 부탁해준다고 하더니, 제일 상급으로 보내준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도착하자마자 확인해봤는데, 물건이 아주 좋아서 다행이야.”
강진수와 서인우가 재료들을 꼼꼼히 살피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 사장님.”
서인우에게 다가간 남지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무슨 일….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건가요? 잠시 나갈까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남지운이 서인우를 따라 주방 뒤쪽 직원 통로로 나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사실 어제 제가 만든 요리를 너무 맛있다고 해주신 일이 기분 좋아 잠을 다 설쳤습니다.”
“남지운씨야 원래 기본 실력이 있으신 분인데, 당연한 칭찬을 듣고 무슨 잠까지 설치십니까?”
서인우가 웃으며 남지운에게 엄지를 치켜올려 보였다.
“그런데, 어제 그 칠리 새우가 그동안 수없이 했던 제 요리와 아주 약간의 차이밖에 없었거든요.”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고 하잖아요. 신선한 재료와 정확하게 밸런스 맞는 소스를 만드셔서 최고의 맛이 된 거죠.”
“그게 바로 [서풍]의 맛인 거군요?”
서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서풍]의 맛을 다 배우고 싶습니다. 어제와 같은 감동을 또 느끼고 싶어서 말이에요.”
“네,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 거잖아요. 시간도 기회도 아주 많습니다. 천천히 하나하나 익히시면 언젠가 [서풍]의 맛을 전부 만들어 낼 수 있는 셰프가 되어있을 겁니다.”
남지운이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계속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뭐 또 다른 할 말이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그냥 빨리 [서풍]의 맛을 배우고 싶어서요. 오늘도 주문 들어오면 많이 가르쳐 주세요.”
“네. 그럼 들어갈까요?”
서인우는 남지운이 평상시 같지 않게 유독 조급해 보였다.
둘이 주방으로 들어오자 강진수뿐 아니라 오상준, 하물며 막내까지 힐끗힐끗 쳐다봤다.
“자 곧 오픈입니다. 재료 준비는 다 된 것 같고…. 오늘도 파이팅 넘치게 해봅시다.”
“네! 아자아자!”
화라락!
여기저기서 웍을 달구는 불길이 멋지게 올라오며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됐다.
* * *
오랜만에 [서풍 만두]를 찾은 김서원이 잠시 잊고 있었던 먹 기량을 그대로 뽐내고 있었다.
“내가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 배 속에 있는 위는 도대체 얼마나 큰 거야?”
이미 먹물 만두 2인분과 고기 만두, 비건 만두를 시켜 다 먹고 아직 부족한 듯 입맛을 다시는 김서원을 보고 윤지영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 왜 이렇게 먹어도 허기진 지 모르겠어요.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
“제시카씨, 무슨 스트레스 받는 일 있나 보다.”
같이 듣고 있던 박은선 홀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잠시 쳐다보고는 김서원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요. 매번 올 때마다 언니들이 건네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나는 너무 좋아요.”
“다 먹었으면 커피 사줄 테니까 잠시 나가자.”
윤지영이 박은선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김서원을 데리고 가게 옆 카페로 들어갔다.
“언니 가게 비워도 돼요? 그 만두 명인 주방장 없어서 바쁘잖아요.”
“그래서 오래는 못 있어. 지금 조금 한가한 시간이야. 뭔데?”
“네?”
윤지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물었다.
“얼굴에 다 쓰여있어. ‘언니, 나 요즘 너무 힘들어요’라고.”
“그래요?”
김서원이 괜히 볼을 쓰다듬으며 픽 기운 없는 웃음을 내보였다.
“통통 튀고 당당한 제시카는 어디 가고, 푹 익은 시래기 같은 얼굴로 앉아 있어? 사람 적응 안 되게.”
“시래기요?”
김서원이 소리 내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뭐가 그렇게 힘들게 하는데?”
“우리 오빠…. 언니도 알죠? 지금 본사에 회장 자리 앉아 있는….”
“잘 알지. 그런데 제시카 오빠가 왜?”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커피만 마시고 있는 김서원을 윤지영은 묵묵히 기다렸다.
“오빠가 그렇게 한 거였대요. 우리 아빠를 그곳에서 못 나오게…. 끔찍한 범죄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친아버지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김형식 회장이 그렇게 오래 갇혀 있었던 게 제시카 오빠가 손 써서 한 짓이라고?”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서원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오빠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어요. 심지어 아빠가 돌아와서 회사로 복귀하지 못하게 임원들도 다 오빠 사람으로 물갈이를 했더라고요.”
“대박! 뭐라 해줄 말을 못 찾겠다.”
“오빠가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서 요즘 잠을 잘 자지 못해요. 지난번 만났을 때 이상한 얘기를 듣기도 해서….”
윤지영의 얼굴이 순간 살짝 굳었다.
“무슨 얘기인지 물어봐도 될까?”
“서인우 씨 잘 지내고 있죠?”
“그럼, 갑자기 오빠 얘기는 왜…. 혹시 인우 오빠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거야?”
“어쩌면 내가 괜히 오빠를 못 믿어서 불안해하는 걸 수도 있어요.”
“뭔데? 뭐라고 했는데?”
잠시 하던 말을 멈춘 김서원이 떨리는 듯한 숨을 내뱉었다.
“어쩌다 서인우 씨 베트남 진출에 대해 잠시 얘기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조금 좋아해 주니까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게 배가 아프겠지. 특히 제시카 오빠라면 방송 때부터 은근히 경쟁하고 있지 않았겠어?”
“저도 처음엔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괜히 부러우니까 험담한다고요.”
“그런데?”
“그 뒤에 오빠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아요.”
윤지영이 급기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겁 없이 날뛰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냐고 …. 인생 선배로 뭔가 제대로 가르쳐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뭘? 그놈이…. 아! 미안. 제시카 오빠가 도대체 뭘 가르친다는 거야?”
“나도 그걸 모르겠어요? 무슨 얘긴지 자세히 말하라고 몇 번을 집요하게 물었는데, 궁금하면 잘 지켜보라는 말만 하고 헤어졌어요.”
입술을 물어뜯는 윤지영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며 굴러다녔다.
“서인우 씨 베트남 가기 전날 인사한다고 만났을 때 고민하다가 이 얘기를 해줬어요. 혹시 모르니까 항상 조심하라고요.”
“그래? 오빠는 뭐래?”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같다고, 거기서 무사히 잘 지내다 올 테니까 제발 좀 편해지라고 오히려 저를 걱정하더라고요.”
결국 김서원의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아무래도 나는 서인우 씨 주변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그 판단은 누구도 하지 못해. 둘만의 시간이 정해주겠지. 오빠 말대로 별일 없을 거야.”
입으로 내뱉은 말과 달리 윤지영의 눈 속에는 뭔지 모를 불안함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