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서인우의 낮지만 강한 힘이 느껴지는 말이 이어졌다.
“이중장부로 장난친 부분은 다시 원상태로 돌려 깔끔하게 정산하도록 하세요.”
“그건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절대 거짓은 없어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매, 맹세합니다.”
“이번 일 처리하는 거 봐서 백화점 차원의 회의는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 완벽하면서 깔끔하게, 거짓 없이 처리해 주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계산해서 바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미스터 찐이 눈치를 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듯 뛰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이영찬이 애써 소리를 죽여가며 급하게 물었다.
“우리 백화점 차원에서 처리하면 제대로 처벌할 수 있을 텐데 왜 기회를 주는 겁니까?”
“기회를 준 건 아닙니다. 단지 잠시 시간을 주는 겁니다.”
“시간을 주다니요?”
“오전에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저 작자 누군가와 또 뭔가를 모의하는 것 같았습니다.”
“네? 저런 나쁜….”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분명 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가도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이 득이 된다고 판단되면 또 빠져들겠죠.”
서인우가 말없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서풍]하고 관련 있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서풍]하고 관련 있는 사람이라 …. 너무 광범위하네요. 그런데, 언제 그렇게 베트남어는 익혔습니까?”
“사실 저 사람 말은 눈치로 알아듣는 정도지 정확히 이해는 못 했습니다. 너무 빠르고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요.”
“그래요? 아주 그럴싸하게 말씀을 하시던데요?”
“제가 한 말들은 상황별로 노트에 적어서 며칠을 외운 내용입니다. 이번에 다시 한번 느끼지만 저는 요리가 제일 쉽네요.”
서인우가 웃으며 눈썹을 긁적였다.
이영찬이 양손 엄지를 높이 치켜세웠다.
숙소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우엔 민 찐 으로부터 새로 작성된 영수증이 메일로 날아왔다.
서인우가 가지고 있는 처음 영수증 그대로.
확인을 마치는 대로 남은 금액을 보내는 걸로 인테리어 건은 우선 일단락이 되었다.
오전에 우연히 들은 통화 내용이 신경 쓰이는 서인우는 다시 한번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서풍 만두]를 책임져 줄 이명옥과 김명순은 사정이 있어 하루 늦게 도착했다.
각자 낯선 타지 생활에 불편하지 않게 이것저것 준비를 하면서 서인우의 오픈 준비를 도왔다.
2월 13일.
이틀 후면 백화점 오픈이다.
윤지영과 안상훈이 답사 왔을 때 큰 도움을 주었던 미스터 탄이 오픈 준비를 도와주었다.
“채소와 해몰, 고기 등 식자재 옵체는 이전에 말한 곳으로 정핸 겁니까?”
“처음 안상훈 셰프님이 골라놓은 곳하고 제가 다시 찾은 곳으로 해서 예약 넣어놨습니다.”
“대단해요. 내 나라도 아닌데….”
“미스터 탄이 많이 도와주세요.”
“예약한 곳 영수증 나 보여줍니다. 내가 한 번 더 당부하면 실수 없어요.”
“감사합니다.”
서인우가 채소가게와 해물, 고기를 예약한 가게의 영수증을 보여주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저장한 미스터 탄이 어눌한 한국어로 말을 이었다.
“여기 주인들 잘 압니다. 아주 좋다요.”
“다행이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같은 베트남 사람이 중간에서 도와주면 더 좋은 물건들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서인우는 어눌하지만,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너무 좋았다.
-저 사람은 믿을 만한 거냐?
‘알 수는 없지, 그래도 우선은 믿어보려고.’
홀에서 보이는 오픈 테이블은 [서풍 만두]를 책임져 줄 이명옥과 김명순이 벌써 나와 먹물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
“밖에서 얘기하는 동안 계속 이거 만들고 계셨던 겁니까? 아직 오픈도 하지 않았는데요.”
“우리 총주방장님이 여기 주방에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고 해서요. 오늘 다들 나오면 이걸로 점심 해결하신다네요.”
족히 100개는 넘어 보이는 먹물 만두가 쌓여있는데도, 둘의 손은 여전히 만두를 빚고 있었다.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니어라. 이게 한 놈 먹다 보면 맛있어서 계속 입에 들어간당께요. 난 음식 부족한 건 딱 질색이라….”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기분 좋게 배불리 먹어야죠. 그럼 저도 뭐 하나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이명옥이 수줍은 듯 손을 살짝 올렸다.
“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저 사실 우리 사장님이 만들어 주시는 양장피가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었는디, 고건 쪼까 무리겄지라?”
“절대 무리 아닙니다. 지금 바로 나가서 재료 사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정말요? 나도 진짜 궁금했는데…, 같은 서풍이라도 워낙 일이 바빠서 한 번 와서 먹어보지도 못했어요.”
“잠시면 됩니다.”
서인우가 쏜살같이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저께 채용한 베트남 직원 세 명도 같이 오기로 되어있었다.
그들에게는 처음으로 맛보이는 기회였다.
가장 가까운 시장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구매해 돌아온 서인우가 실력 발휘를 시작했다.
-그럼 베트남에서 첫 요리를 시작해 볼까?
‘역사적인 순간이네.’
타다다다닥!
칼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각종 채소를 채 썰어 가지런히 놓고, 해물과 버섯 등을 볶고 있을 때 직원들이 도착했다.
“사장님,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여기 [서풍 만두] 총주방장님이 여러분 점심으로 먹물 만두를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 [서풍 TWO] 도 그냥 있을 수 만은 없죠. 양장피 만들어서 같이 점심 먹도록 합시다.”
“그럼 소스는 제가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강진수가 어제 와서 익혀놓은 소스 위치를 정확히 기억해내 서풍만의 톡 쏘는 소스를 만들었다.
잘 쪄진 먹물 만두와 서인우가 휘릭 소스를 부어 섞어준 양장피로 근사한 점심이 차려졌다.
지나가던 백화점 직원들이 힐끗 쳐다보며 군침을 삼켰다.
“오셔서 맛보고 가세요.”
“정, 정말요?”
웬만하면 사양했을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닌 서인우가 직접 만든 양장피다.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거였다.
“충분히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재료도 남았으니 또 만들면 됩니다.”
그 말이 마치 자석처럼 그들을 가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럼 한 젓가락만….”
젓가락이 움직이는 속도가 한 젓가락으로 끝날 것 같지 않자 서인우가 주방으로 들어가 남은 재료를 총동원해 양장피를 넉넉히 만들어왔다.
“진짜 최곱니다. 너무 맛있어요.”
“우리 직원식사도 여기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회사에 청원 올려야겠어요. 이 맛을 알고 참는 건 고문이에요.”
“이 만두 미쳤어요. 감칠맛 폭발이네요.”
이명옥이 수줍게 웃어 보였다.
“만두도 더 있으니까 맘껏 드세요.”
“맛도 좋고 인심도 좋고, 재료도 많고 정도 많고…. 정말 서풍 짱입니다.”
마치 무슨 팬클럽에서 온 듯한 격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인우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정이 바로 이런 건가 보네요. 진짜 우리 할머니 말씀대로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거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우리 진수 베트남에서 철드네. 여기가 잘 맞나본데?”
“여기서 돈 많이 벌어 우리 할머니 호강시켜 드릴 겁니다.”
“그래야지. 넌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 나도 최선을 다해 도울게.”
점심 식사 후 각자 자신이 일할 위치의 동선과 웍, 화구 그 외 조리기구들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2월 15일.
드디어 MS 백화점 베트남 점이 문을 열었다.
화려한 오픈 행사의 시작과 함께 이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현지 교민들 사이에 이미 소문이 제대로 난 서인우의 [서풍 TWO]는 오픈을 알리는 음악이 나오자 마자 테이블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받아 본 식재료들도 서인우가 예약한 그대로 싱싱하고 좋은 것들로 문제없이 도착했다.
장소만 베트남으로 바뀌었을 뿐 서풍의 아침 풍경 또한 다를 게 없었다.
넉넉하게 준비해놓은 채소들과 해물들을 다시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는데 첫 주문이 들어왔다.
“자, 이제 시작입니다. 2번 테이블 탕수육 하나, 백 짬뽕 둘, 5번 테이블 양장피 하나 짜장면 둘, 새우볶음밥 하나.”
서인우가 주문지를 읊자마자 각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진수씨. 탕수육 준비해 주세요. 나머지는 식사 준비 하도록 합니다.”
양장피를 만들기 위해 중식도를 들어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
새로 채용한 베트남 직원인 막내가 꼼짝 안 하고 멈춘 상태로 서인우를 지켜봤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 강진수가 결국 소리를 내 웃자 다른 직원들도 하나씩 웃기 시작했다.
“사장님, 우리 막내 저러다 기절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어와 베트남어를 섞어 대충 의사소통이 가능한 막내가 자기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저 눈 큰 막내. 내가 톡 치면 바로 기절 각인데?
‘다들 처음 보면 똑같은 반응이지. 그나마 한국에서는 방송에서 한 번 보기라도 했는데, 저 막내는 처음 보니까.’
-이거 장난치고 싶어서 몸이 간질간질하네.
중식도가 꿈틀거리자 서인우가 손에 더 힘을 꽉 주어 중식도를 쥐었다.
‘장난 칠 시간 없어. 빨리 요리나 완성하자고.’
“막내! 정신 차리고 빨리 재료 손질 마저 해.”
서인우가 베트남어로 얘기를 하자 그제야 침도 흘렸는지 입가를 쓱 닦은 막내가 다시 양파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띵!
강진수가 탕수육을 완성해 벨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서인우가 양장피를 완성해 소스와 함께 들고 홀로 가지고 나갔다.
“와!”
“정말 실물이 연예인이네.”
“난 아이돌이 나오는 줄 알고 싸인 받으려고 했다니까.”
서인우의 등장에 교민들이 박수와 함성을 질러댔다.
바로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한 서인우가 소스를 휙 부어 재빨리 섞어주었다.
“[서풍]의 서인우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실망시키지 않도록 항상 똑같은 [서풍]의 맛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아! 이 양장피는 지금이 제일 맛있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홀 매니저 김예은과 새로 채용된 베트남 직원 둘이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짧게 눈인사를 보내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온 서인우는 이어지는 주문지를 확인하고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3번 테이블 고추잡채 하나, 짬뽕하나 볶음밥 하나요. 7번 테이블 서풍 만두 하나, 백 짬뽕 둘.”
“어머, 저기 만두 만드는 것 좀 봐. 손이 보이지 않아.”
“저게 그 유명한 먹물 만두잖아. 서풍의 시그니처 메뉴.”
서인우에게 시선을 뺏겼던 홀에서 식사 하는 손님 중 한 명이 통유리 안으로 만두를 만들고 있는 이명옥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에 다들 시선이 통유리로 쏠렸다.
“맞네, 그 만두. 우리도 시켜보자.”
“지난주에도 한국 들어가고 싶다고 남편하고 한바탕 싸웠는데, 지금 이 음식 먹으니까 그 생각이 확 사라지는데?”
“그래서 우리의 모든 추억은 맛있는 음식과 함께 하는 거라니까.”
“맞아. 인생에 있어서 맛있는 거 먹는 행복이 얼마나 크게 차지하는데….”
[서풍]의 요리를 먹는 사람들 모두 입가 가득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그들 사이에 세 가지 음식을 시켜놓고 혼자 먹고 있는 남자가 하나 보였다.
외모가 베트남 사람은 아닌 듯 보인 남자는 베트남어로 계산을 하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알 수 없는 국적의 남자가 가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왕타오. 지난번 네가 말한 그 중식당에서 방금 식사했는데 말이야, 이거 돈 되겠어. 손님들 반응을 보니까 냄새가 나, 돈 냄새가. 내가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거 알지? 기다려 지금 너희 백화점으로 갈 테니까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고.”
주위 사람을 의식해서인지 유창한 중국어로 간단히 통화를 마친 왕타오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