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169화 (169/200)

제169화.

정다운을 따라 홀에 나온 서인우의 눈에 지난번 만났던 중국 요리협회 서울 지부장 남성재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마감 끝날 시간에 오려고 했는데, 곧 베트남으로 가신다는 소문이 있어서 급하게 왔습니다.”

“네, 이틀 후면 베트남에 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남성재가 홀에 가득 찬 손님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협회 회의 결과 꼭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아무래도 마감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겠죠? 역시 손님이 너무 많네요.”

“아닙니다. 베트남 갈 준비를 해야 해서 여기는 이제 조금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 여기 3층 카페에 가 있을 테니까 아무 때나 편한 시간에 와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잠시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 서인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지금 주방에서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내려가겠습니다. 대략 10분 정도면 가능합니다.”

“제가 불쑥 찾아온 건데 천천히 마무리하시고 오세요. 서인우 씨 같은 분이 시간 내주신다는데 얼마든지 기다리죠.”

남성재가 급하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온 서인우는 새로 뽑힌 직원들이 만들어 놓은 양장피를 하나씩 꼼꼼하게 체크했다.

“이렇게 채소의 크기가 들쑥날쑥하면 안 됩니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사이즈로 맞춰 주세요.”

“지금 이 소스는 너무 달아요. 설탕을 반 스푼만 적게 넣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해물을 너무 오래 볶았습니다. 질기고 식감이 좋지 않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만들고 있는 요리를 바로 눈앞에서 본 듯 지적해냈다.

새로 온 직원들 모두 서인우가 알려준 대로 다시 양장피를 만들었다.

“저녁 영업에 지장 가지 않게 다시 연습해 보세요. 상대방이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어보며 차이점도 느껴보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안상훈에게 다가가 중국 요리협회 남성재가 와서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얘기를 전하고 주방을 빠져나왔다.

3층 이벤트홀 옆으로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간 서인우는 벽 쪽에 앉아 손을 들어 올리는 남성재를 발견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일찍 오셨네요?”

“죄송합니다.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막 나온 신선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바쁘시니까 시간 끌지 않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성재가 옆에 놓인 갈색 가죽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보였다.

“이거 한 번 봐주시겠어요?”

“이게 뭔가요?”

“우리 요리협회에 서인우 셰프님의 베트남 진출과 현재 상황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에 완전히 꽂힌 회장님과 임원들이 포기가 안 되시나 봅니다.”

서류를 들이미는 남성재의 눈빛이 난처한 듯 요리조리 방황하고 있었다.

“지난번 거절의 뜻을 충분히 알아듣고 전했는데요, 협회에서 다른 제안을 해왔습니다.”

“다른 제안이라니요?”

“서인우 셰프님은 베트남 진출로 직접 중국 진출이 힘든 상황이니까 저희 전문 요리사에게 기술만 전수해 주면 지분의 20%를 드리겠다는 조건입니다.”

“네? 20% 지분이요?”

남성재가 서류에 적힌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 보시면 그것도 어려울 때는 [서풍]과 서인우라는 이름만 걸게 해줘도 로얄티로 매출의 5%를 주겠다는 두 가지 제안입니다.”

서인우가 바로 답을 내놓지 않고 잠시 서류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서인우 셰프님의 요리와 아버지의 뒤를 잇는 그 진정성 두 가지를 반드시 보여 주고 싶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여 주십시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서인우의 눈치를 살피던 남성재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지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이번에 서인우 셰프님에게 긍정적인 답을 얻어오지 못하면 1년이든 2년이든 저는 계속 바쁜 셰프님을 괴롭혀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에게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이 일을 꼭 성사시켜야 이 자리를 유지하게 해주겠다는 사실 반협박 같은 말도 오갔습니다.”

“협박이라니요?”

남성재가 손을 흔들며 작게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만큼 서인우 셰프님과 꼭 함께하고 싶다는 협회의 뜻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결정이 쉽지 않았다.

처음 중국 진출을 제안했을 때는 이미 베트남 진출이 정해진 상태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거절 또한 빠르게 할 수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찾아온 남성재의 성의와 노력을 바로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사업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닌 듯싶었다.

단지, 더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현재는 강남점과 베트남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게 서인우를 잡고 있었다.

“오늘 결정하시지 마시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다음번에는 베트남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냥 요리만 할 줄 아는 저 같은 사람을 세 번씩이나 찾아오셔서 이런 제안까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신중하게 고민해보고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신중하게 하지만 긍정적으로 고려해보시길 바랄게요.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 주세요.”

웃으며 말을 건네는 남성재의 얼굴이 피곤한 듯 느껴졌다.

“네, 고민해보고 또 사업 동료와 의논도 해보고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인연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서인우는 더는 건넬 말이 없었다.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을지,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성재와 헤어진 후 그가 내민 제안서를 사진 찍어 친구 이준형과 윤지영에게 보냈다.

채 30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준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벌써 다 읽어본 거냐?”

-이거 뭐냐? 전에 말한 중국 요리협회 같은데, 맞아?

“응. 그때 말한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오늘 또 찾아와서 이 제안서를 내밀고 갔어.”

-그래서 뭐라고 답했는데? 설마 이번에도 또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겠지?

“우선 동료들과 의논해보고 연락해 준다고 했어.”

-내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이것저것 좀 알아봐야겠다. 퇴근하고 들를게.

“그래, 이따 보자.”

주방에 막 도착했을 때 윤지영으로부터도 문자가 들어왔다.

[오빠! 이 제안서 조건이 너무 좋아서 더 이상하지 않아? 자세히 알아보고 안전하기만 하면 우리한테는 손해 볼 일은 없는 거 아닌가? 거절만 하지 말고 잘 생각해봐.]

기술만 가르쳐 준다거나, 이름만 빌려준다는 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일이 잘못됐을 경우는 [서풍]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는 거였다.

정말 섣불리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남성재를 만난 일은 뒤로 미뤄두고 각자 맡은 일을 바쁘게 해내고 있는 주방 직원들을 천천히 지켜봤다.

서인우가 없는 [서풍]의 풍경.

상상이 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차분하게 중심을 잡고 전 직원을 지휘하고 있는 안상훈이 오늘따라 더 듬직하고 멋지게 보였다.

정말이지 이제 맘 편히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오늘 준비한 콴탕빠오는 이제 다 나갔습니다. 홀에 전하고 오겠습니다.”

오픈 때부터 콴탕빠오를 전담해왔던 김도영이 살짝 신이 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1시간은 더 손님이 밀려올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빠른 마감이기는 했다.

“2번 룸 B 코스 크림 새우 준비해 주세요. 식사도 같이 준비 합시다.”

차은석의 지휘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튀김옷을 입혀 바싹하게 튀긴 새우에 새콤하고 고소한 소스를 붓고 푸릇한 무순을 몇 개 올려 벨을 눌렀다.

옆에 있는 웍에서는 불길이 확 올라오더니 매콤한 불향 짬뽕이 완성되었다.

띵! 띵! 띵!

주문 들어온 음식이 완성됐다는 벨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주방의 열기가 식을 줄을 몰랐다.

저녁 식사 주문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점장님. 회장님 비서분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지금 7층 카페로 잠시 올라오시라고 하는데요.”

“지금 여기 와 계신 건가요?”

“네, 바쁜 시간 피해서 오셨다고 잠시면 된다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차은석의 얼굴에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

주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마무리를 시켜놓고 7층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안쪽 넓은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김원상을 발견한 차은석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왔습니까?”

어딘지 분위기가 조금 바뀐 듯한 김원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투명한 유리 포트에 들어있는 차를 가지고 다가왔다.

“늦은 시간이라 피로회복에 좋은 차로 시켰습니다.”

“감사합니다.”

연하게 우러난 차를 사이에 두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바쁜 시간은 거의 지났죠?”

“네, 저녁 식사 주문은 거의 끝났습니다. 추가 추문 들어와도 다른 직원들이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여기 [만가복] 칭찬이 자주 들려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만큼 차셰프는 바쁘고 힘들겠지만요.”

차은석이 딱히 내놓을 대답이 없어 그냥 미소만 지어 보였다.

“피곤할 텐데 차 좀 마셔요.”

김원상이 맑게 우러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서풍]의 서인우가 한국을 뜬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MS 백화점 베트남점에 입점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이틀 후입니다. 지금 강남점을 맡아서 할 안상훈 셰프는 차 셰프도 안면이 있죠?”

차은석이 MS 백화점 입점 심사 때를 떠올리며 잠시 인상을 구겼다.

“저희 둘 다 아는 사람이죠.”

“네. 그때 생각하면 참 어이가 없어서…. 안 좋았던 때는 빨리 잊어버리세요. 이제 우리한테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까?”

“기회요?”

기회라 말하는 김원상의 눈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징그럽게 느껴진 차은석이 순간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안상훈이라는 셰프가 열심히 배웠다고 해도 서인우가 없는 상황입니다. 분명 그 티가 날 것입니다.”

차은석은 뭐라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김원상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않겠습니까? 서인우가 없는 앞으로 1년 동안에 우리 [만가복]이 대한민국 최고의 중식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자는 말입니다.”

“지금 그 말은….”

“오해는 하지 마세요. 난 처음부터 차 셰프의 실력이 서인우 그자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기회에 그걸 전 국민에게 증명시켜 주자는 겁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H 백화점 입점을 결심했을 때 차은석 또한 [서풍]을 이겨보자 다짐했던 바였다.

물론 서인우가 있어도 붙어볼 자신이 있어서 시작했던 일이었다.

지금 손님도 많고 호평이 끊이지 않는 차은석 입장에서는 서인우의 존재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인우와 직접 경쟁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쉬울 뿐이었다.

“서인우 셰프야 전 국민이 인정한 실력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길 자신 있습니다. 그가 이곳에 있고 없고는 저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자신감을 믿고 차셰프한테 투자하는 거 아닙니까? 차 셰프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다 압니다. 그래도 기회는 기회인 거죠.”

차은석은 김원상의 속내를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둘이 [서풍]을 이겨보자는 목적이 같을 뿐.

“저도 이곳에 입점을 결심한 순간부터 [서풍]과 당당히 경쟁해 최고라는 인정을 받는 걸 목표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지켜봐 주십시오.”

“차 셰프라면 가능하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응원차 내가 직접 온 겁니다.”

차은석이 식어가는 차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죄송하지만,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직원들과 함께 마무리하고 싶어서요.”

“그래야죠. 항상 직원들과 함께 하는 자세 아주 좋아요. 일어납시다.”

일어나자는 말을 하고도 앞에 놓인 차를 드는 김원상을 차은석이 묵묵히 기다렸다.

“차 셰프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주면 됩니다. 서인우는 이제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별거 아니에요. 그냥 겁 없이 일을 키우는 걸 보니 왠지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끝을 흐리며 김원상의 눈이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