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참담한 심정을 억누른 채 집으로 돌아온 김형식은 저녁 식사 후 서재에 박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까불고 날뛰어도 그동안 나한테 굽신거렸던 사람들을 다 제 편으로 만들지는 못하지. 아무렴.”
회장실에서 맞닥뜨린 김 이사와 정 이사의 얼굴이 떠오르자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핸드폰에 저장된 김 이사의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도했다.
신호음이 한참 울리는 동안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내 전화를 거부해?”
다시 정 이사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르자 한참 지나 작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정 이사. 나 누군지 알겠지?”
-전 회장님이시군요.
“전 회장? 하긴 지금 회장은 내 아들놈이 맡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놈은 아직 이 회사를 운영하기에는 능력이….”
-죄송합니다. 이런 통화 좀 불편해서요.
“뭐야? 허허, 이거 왜 이러나? 자네가 누구 덕에 이사까지 됐는지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야 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지금 회장님도 내 능력을 인정해주셔서요. 그래서, 이런 통화는 불편하네요. 그만 끊겠습니다.
김형식이 다급하게 정이사를 불렀다.
“이봐, 정이사. 당신 이러면 곤란해질 텐데….”
-이 통화가 길어지면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아! 다시는 전화하지 마십시오.
이미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김형식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쿵!
서재에 들어가 몇 시간째 꼼짝하지 않고 있는 남편 김형식이 걱정됐던 아내 이영주가 놀라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자.”
김형식의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잔뜩 독이 오른 듯한 눈빛에 이영주는 한마디도 더하지 못하고 조용히 서재 문을 닫았다.
그 뒤로 늦은 밤까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 김형식의 얼굴이 점점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 * *
서인우에게 직접 배운 백 짬뽕을 쉬지 않고 연습한 새로 채용된 직원들이 비장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오늘은 [서풍]의 인기 메뉴 중 하나인 탕수육을 해보도록 할 겁니다. 그 전에 내가 내준 미션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하네요.”
-야, 나도 궁금하다. 과연 그 비법을 알아낸 직원이 있을까? 너나 저기 여드름처럼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가 있을까 말이지.
‘밤새 만들어 보고 연구해봤으면 알아냈을 거야. 얼마나 매달렸는지를 보는 거지.’
제일 첫 번째로 면접을 봤던 박범기와 두 번째 면접자였던 남지운, 그리고 오지명과 마지막 면접자였던 황강희 그렇게 네 명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탕수육을 해보기 전에 백 짬뽕 육수를 먼저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필요한 재료를 찾아와 육수를 우리기 시작했다.
안상훈을 비롯해 기존 직원들도 주문 들어온 요리를 하면서 그들의 육수 재료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흥미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닭 육수라는 건 다들 기본으로 알고 있었다.
네 명의 새 직원 중 둘은 닭발을 나머지 둘은 닭을 통째로 준비했다.
-복날도 아니고 저놈은 백숙하려고 그러나?
‘각자 준비한 재료로 같은 맛을 내는지 지켜봐야지. 그것보다 어제 먹어 본 육수의 맛과 누가 가장 정확하게 비교해낼 수 있을지가 더 궁금해.’
닭발을 준비한 박범기와 황강희.
닭을 통째로 준비한 남지운과 오지명.
그렇게 넷이 어제 맛본 육수의 기억을 되살려 가며 열심히 육수를 만들었다.
-닭발을 준비한 사람이 둘인데, 어라? 둘 다 뭐 하는 거냐?
박범기는 토치로 닭발을 굽기 시작했고, 황강희는 물에 기름을 조금 넣은 후 닭발을 삶았다.
남지운은 정말 백숙을 만들 생각인지 각종 한방 재료를 넣고 닭을 통째 삶았고, 오지명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닭만 푹푹 고았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강진수의 어깨가 순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곳에서 요리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선배 중 그 미션에서 정답을 맞힌 유일한 사람이 강진수였다.
서인우와 눈이 마주치자 뭔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움찔하던 강진수가 간신히 입을 틀어막고 요리를 마무리했다.
네 명의 신입 직원들이 완성된 육수를 그릇에 담아 내놓았다.
“자, 지금 좀 한가할 때 다들 와서 여기 육수 맛을 한 번 봐주세요.”
육수를 만들어 내놓은 신입 직원들과 그 육수를 맛봐야 하는 선배 직원들 모두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신중하게 몇 번씩 육수를 맛본 선배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우선 가장 맛있다고 생각되는 육수를 골라 보시죠.”
신기하게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남지운의 육수를 골랐다.
그 모습에 서인우가 피식 웃음을 보였고, 안상훈만이 그 웃음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 [서풍]의 백 짬뽕 육수를 골라 보세요.”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서풍]의 육수와 그나마 가장 비슷한 육수를 골라 보시죠.”
그 말에 강진수가 자신 있게 박범기의 육수를 골랐다.
뒤이어 안상훈과 차민정등 다른 선배 직원들도 박범기와 황강희의 육수를 골랐다.
“결과가 재미있지 않습니까?”
“네?”
신입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가장 맛있는 육수는 만장일치로 남지운 씨가 만든 거라고 골라냈습니다. 그런데, [서풍]의 육수와 똑같은 건 아무도 찾지 못했죠.”
고개를 끄덕이던 신입 직원들이 알쏭달쏭한 얘기에 상대방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손님에게 바로 내놓을 맛있는 국물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서풍]의 백 짬뽕 맛을 가장 잘 살려줄 수 있게 깊으면서도 다른 채소와 해물의 맛을 죽이지 않는 베이스가 될 육수를 만드는 겁니다.”
서인우의 말에 가장 맛있는 국물을 만들어냈다는 자신감에 차 있던 남지운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육수는 짬뽕이나 다른 국물 요리를 할 때 깊은 맛과 묵직한 뒷맛을 내줘야 하는 겁니다. 과하면 오히려 본 요리의 맛을 해칠 수 있는 거죠.”
서인우가 박범기와 황강희의 육수를 앞으로 가져왔다.
“우리 육수는 다른 가게들처럼 닭발을 우려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박범기 씨와 황강희 씨가 육수의 재료를 잘 찾아냈습니다.”
“앗싸!”
박범기와 황강희가 웃으며 좋아했다.
“남지운 씨와 오지명 씨는 이전 가게에서 닭을 통째로 육수를 냈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뭔가 [서풍]만의 특별함이 있는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겁니다.”
“육수는 기본적으로 비슷합니다. 다만 우리 [서풍]만의 비법이 기본 육수를 더욱 깊고 감칠맛 있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서인우가 박범기의 육수를 들어 보였다.
“강진수 씨. 왜 이 육수가 우리 [서풍]과 가장 비슷하다고 선택한 거죠?”
“육수를 삼키고 나서 남는 감칠맛이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강진수가 신입이라지만 경력도 나이도 훨씬 많은 새 직원들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육수도 [서풍]의 육수와 똑같은 맛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그 차이를 느끼셨다면 앞으로 1년 안에 우리 [서풍]의 모든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감각을 타고났다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네, 여기 선임들도 다 똑같은 미션이 주어졌었습니다. 유일하게 여기 강진수 씨가 정확한 비법을 찾아냈죠. 혀끝 기억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부러운 듯 강진수를 쳐다보는 새 직원들의 눈빛에 얼굴이 금세 붉어진 강진수가 짧은 뒷머리를 만지며 쑥스러워했다.
그때였다.
박범기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저 혹시 닭발을 튀겨서 육수로 사용하는 거 아닙니까?”
-어! 어! 나왔다. 정답자가 나왔네, 나왔어.
박범기의 질문에 안상훈을 비롯한 그곳의 모든 직원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서인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써 표정을 감춘 채 서인우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어제 한숨도 안 자고 육수를 만들어 봤습니다. 불에 구워도 보고, 그냥 삶아도 보고, 양파 넣고 볶아도 봤습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고 튀겨봤는데 제 입맛에 가장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은 토치로 구운 건가요?”
“맛은 비슷한데, [서풍] 백 짬뽕의 가장 큰 매력은 담백하면서 깔끔하고 칼칼한 국물 아닙니까? 튀긴 닭발 육수로는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에 바로 접어버렸습니다.”
나머지 세 명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박범기 씨가 결국 우리 [서풍] 백 짬뽕 육수의 비법을 찾아냈네요.”
“네?”
놀란 네 명의 새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범기 씨가 방금 말한 방법대로 육수를 한 번 만들어 보시죠.”
서인우의 말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범기가 닭발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푹푹 끓여 육수를 우려내자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작은 그릇에 육수를 담아 다른 직원들도 맛보게 하자 모두 아무 말 없이 놀란 표정만 지어댔다.
“이건 정말 반전이네요. 어쩜 이렇게 감칠맛 나고 깔끔한 육수가 나올 수가 있는지 보고도 믿기 어렵습니다.”
서인우가 박범기의 육수를 마지막으로 맛보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드디어 우리 [서풍]의 육수네요. 박범기 씨가 유일하게 미션에 통과하셨습니다.”
주위에 있는 직원들이 부러움과 동시에 어제 말한 특혜가 무엇인지 궁금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박범기 씨가 우리 [서풍]의 요리를 마스터 하신 후 원하신다면 [서풍] 이름으로 자신의 가게를 내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겠습니다.”
“우와! 대박!”
“아시겠지만, 우리 [서풍]은 따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기회를 얻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들렸다.
“이제 곧 저녁 장사 시작입니다. 바로 [서풍]의 탕수육 비법을 가르쳐 드릴 테니 머릿속에 꼭꼭 저장해주세요. 다른 분들은 주문에 신경 써주시길 바랍니다.”
서인우의 정확하고 빠른 칼질에 시선을 뺏긴 직원들이 저마다 고기를 튀기고 소스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방 한쪽에서는 점점 많아지는 주문에 요리해내느라 열기로 가득했다.
일주일로 잡혀있던 신입 직원들 교육이 끝나가는 마지막 날.
가장 중요하고 인기 많은 양장피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면 베트남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이 양장피는 우리 [서풍]만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특별 메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들 만들어봐서 알겠지만, 워낙 재료가 많이 들어가고 손이 많이 가는 만큼 스피드가 관건입니다.”
-그렇지, 그 스피드는 이 사부의 능력이 더해져서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지.
서인우가 반짝하는 눈빛을 보이며 중식도를 손에 쥐었다.
샥샥샥샥!
타다다다닥!
교육받는 직원들 뿐 아니라 기존 직원들까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여러 명 턱 빠진 거 같은데?
‘오늘따라 칼질이 더 잘되네.’
-우리 이제 정말 한 몸인 건가?
꼼짝하지 않고 서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직원들 앞에 정확하고 가늘게 채썰어진 채소들을 늘어놓았다.
그 채소들을 가지런히 접시에 담고 양장피와 볶은 해물과 채소들을 다시 올려놓았다.
“이 매콤하면서도 새콤한 소스의 맛을 잘 기억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완성된 소스까지 부어 휘리릭 섞어주자 직원들의 목젖이 춤추듯 출렁거렸다.
“이제 맛을 한 번 보고, 그 맛을 절대 잊지 않도록 노력해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맛을 내주어야 [서풍]의 맛입니다.”
새로 온 직원들이 마지막으로 배울 기회인 만큼 사진도 찍고 꼼꼼하게 맛도 보고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려 애썼다.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서인우를 향해 정다운이 다가왔다.
“사장님, 그때 그 사람이 다시 왔어요.”
“네?”
“왜 중국 요리협회인가 뭔가 거기에서 온 사람 말이에요.”
정다운의 말에 주방 직원들의 시선이 서인우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