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눈빛은 뭔가 분노가 가득 차 보였고, 팔에는 웍을 만지면서 생긴 듯한 화상이 군데군데 나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제가 [서풍]에 지원한 동기는 딱 하나입니다. [서풍]이라서요.”
“네?”
“저에게 다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가복]을 이길 수 있는 [서풍]의 요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서인우 뿐 아니라 같이 면접을 보던 안상훈과 정다운 모두 마지막 지원자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보였다.
“우리는 [만가복]을 이기기 위해 경쟁하며 요리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건 기사를 통해 봐서 알고 있습니다. [서풍]의 맛을 완벽하게 낼 수 있다면, 이미 [만가복]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거로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으니까요.”
서인우는 그의 눈에 스며들어 있는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콕 찍어 [만가복]을 언급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는 작년까지 [만가복] 마포점에서 일했었습니다.”
팔에 덴 상처를 보고 경력이 있는 사람일 거라는 짐작은 모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가복]에서 일했었다는 얘기를 듣자 세 명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마포점의 차은석 셰프님, 아! 지금은 H 백화점에 계시죠. 그분하고 정말 즐겁게 일했었습니다. 차은석 셰프님께 열심히 요리 배워 독립하고 싶었는데….”
“그런데요?”
“그때 마포점 점장님으로 있던 지금 [만가복] 회장놈 때문에 더는 그 꿈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면접 장소에서 다른 업체를 모함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팔에 난 상처들이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얼마 전에 기사에 나왔던 치즈 치킨밥 사건도 차은석 셰프가 강력하게 반대했었습니다. 사직서까지 내면서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계약 조건 들먹이며 결국 그 메뉴를 강행하게 했죠. 그뿐 아닙니다.”
마지막 지원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그때를 상기하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제가 처음 [만가복]에 들어왔을 때 제 사수였던 마영준 셰프님의 가게를 다녀오더니 인기메뉴인 치즈 탕수육도 똑같이 만들게 시켰습니다.”
“치즈 탕수육까지요?”
“네, 그때 제가 그건 마영준 셰프님이 잠 못 자며 연구해 만든 레시피라서 절대 안 된다고 그렇게 반대했는데… 결국 힘없는 저만 잘렸습니다.”
주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면접 중에 생각지 못하게 흘러나왔지만, 모두에게 충격을 주는 얘기였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맛, 그 어떤 것도 따라 하지 않는 자존심 있는 요리, 저는 그게 [서풍]의 요리라고 생각합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그게 제가 오늘 여기 서 있는 이유입니다.”
여섯 명 모두 각자 원하는 목표가 뚜렷했다.
그 뒤로 이어진 간단한 기본기 테스트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훌륭한 실력을 보여 주었다.
주방 직원들의 면접을 끝내고, 홀 직원을 뽑는 면접이 이어졌다.
홀 직원 면접은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면접을 마치고 지원자가 다 돌아가자 서인우와 안상훈, 정다운의 얼굴이 더 복잡하게 변해 있었다.
“다들 경력도 많은데다가 지원 동기가 너무 뚜렷하니까 더 결정하기 어려운데요?”
“홀 매니저는 쉽게 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방이 문제네요.”
서인우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베트남 [서풍]은 2번 지원자인 남지운씨로 결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홀 매니저도 김예은 씨가 가장 적합할 것 같아요.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남지운 씨, 뚝심 있게 열심히 하실 것 같았어요. 김예은씨는 무엇보다 베트남어가 능숙해서 사장님께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정 매니저만큼 큰 힘이 되진 못하겠죠?”
“에이, 사장님도. 제가 무슨 힘이 됐다고….”
수줍은 듯한 정다운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베트남에서 5년 조금 안 되게 살다 들어왔다는 30대 초반의 김예은이 베트남 [서풍] 홀 매니저로 채용되었다.
또한 베트남 [서풍] 주방 직원으로 2번 지원자인 남지운이, 서인우의 빈자리를 채워줄 MS 백화점 강남점 주방 직원으로는 1번 지원자와 3번, 6번 지원자가 채용되었다.
이제 베트남 진출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다.
도착해서 현지 채용으로 남은 인원을 충원하면 가장 중요한 직원 채용은 끝이 난다.
‘인테리어는 잘 진행되고 있는 걸까?’
베트남을 다녀온 뒤로 계속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는 인테리어 문제였다.
서인우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후 유현주에게 소개받은 해외 영업팀 이영찬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이영찬 씨 이신가요?”
-네, MS 백화점 해외 영업 팀 이영찬입니다.
“안녕하세요. 유현주씨 소개로 전화드립니다. [서풍]의….”
-아! 서인우 씨? 반갑습니다. 저, 잠시만요.
잠시 아무 소리도 넘어 오지 않던 핸드폰에서 다시 이영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지금 5층 [서풍]매장 인테리어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감사요. 내가 할 일입니다. 게다가 여기 인테리어 업자 얘기 듣고는 내가 정말 빡쳐서…. 죄송합니다. 표현이 거칠었네요.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커다란 음성이나 말투가 저절로 구본석 부장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 진행 상황은 어떤가요?”
-제가 매일 가서 체크하고 지적하고 합니다. 유현주 팀장님 통해서 인테리어 컨셉 사진도 받아서 비교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오픈하는 대로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하겠습니다.”
-타지 생활 암담했는데, [서풍]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헤어진 애인이 돌아온다는 소식보다 더 반갑더라고요.
통화하며 무엇을 상상했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오픈 전 필요한 서류작업도 미리 준비해놓을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그거라면 다음 주에 미스터 찐과 함께 신청해놓기로 했습니다. 들어오셔서 바로 해결할 수 있게 해놓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는 제가 최선을 다해 볼테니, 거기 정리 잘하시고 하루라도 빨리 들어오세요. 뻘건 짬뽕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네, 얼른 들어가서 맛있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5시가 되지 않아서부터 손님들이 밀려 들어왔다.
“3번 테이블 식사 전에 양장피 주문하셨는데요, 이제 대놓고 안셰프님 양장피라고 말씀하시던데요?”
정다운이 재미있다는 듯 달려와 주문지를 읊었다.
“안 셰프님 양장피가 인기 만점인가 봅니다.”
“사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사람 민망하게.”
“기분 좋아서요. 이제 정말 이곳은 안 셰프님께 맡기고 전 베트남점 오픈 준비에 매달려야겠습니다.”
주방 직원들이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중식도의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진짜 베트남까지 가야 하는 거지? 여기가 딱 좋았는데….
‘거기에서 우리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보자.’
-고독한 안셰프도 정들고, 우리 직원 1호도 정들었는데….
‘우리 셰프중에 누군가가 [서풍]의 맛을 그대로 낼 수 있을 때 다시 돌아오자.’
중식도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안상훈이 양장피를 근사하게 완성해냈다.
채소의 색감이나 꽃처럼 피어난 양장피, 매콤 새콤한 소스까지 서인우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대로 복사해냈다.
“안셰프님. 양장피 아주 완벽합니다.”
누구보다 서인우의 칭찬에 힘을 얻은 안상훈이 어깨를 곧게 펴 접시를 들고 주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는 주방 직원들을 향해 서인우가 크게 한마디 더했다.
“일년 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시일내에 보게 될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요리에 임해주세요.”
“네, 셰프!”
강진수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며칠 전 서인우한테 엉켜 눈물을 보인 뒤로는 마치 절대적인 신을 대하는 것처럼 서인우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였다.
또 하나, 서인우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예스맨이 되어 버렸다.
“5번 테이블 탕수육 하나, 간짜장, 백짬뽕 둘이요. 7번 테이블에 누룽지탕 하나 서풍만두 하나, 그리고 짜장, 삼선 우동 하나요.”
정신없이 주문이 들어오고, 그에 맞서 웍이 빠르게 움직였다.
누룽지탕이 막 완성되어 갈 때쯤이었다.
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장님, 누가 왔나 본데요? 지금 홀이 난리입니다.”
요란한 소리에 홀을 흘낏 쳐다본 강진수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장님, 사장님. 제이에요. 제이가 또 우리 가게에 왔어요.”
-뭐? 밀크공주가 강림했다고? 우리 여신이?
강진수의 호들갑에 이어 중식도까지 서인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다운까지 뛰어 들어왔다.
“사장님, 제이 씨 지금 항상 가는 룸에 있어요.”
“알았어요. 음식 완성되면 가지고 가볼게요.”
“오늘은 식사할 시간이 없나 봐요. 사장님하고 잠시 얘기만 나누고 가야 한다네요.”
서인우는 주방 상황을 잠시 지켜보고는 바로 제이가 있는 작은 룸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제이 씨.”
제이의 얼굴이 전보다 많이 야윈 듯 보였다.
“어디 아팠어요? 얼굴이 좀 안 좋아진 거 같은데?”
“얼굴 어디 가요? 아파 보여요? 아니면, 더 갸름해져서 이뻐 보여요?”
서인우가 바로 답을 내놓지 못하자 잠시 웃어보인 제이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스케쥴 때문에 시간이 없어요. 매니저 오빠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해요.”
“식사 시간인데 밥은 챙겨 먹으면서 일해요. 건강을 잃으면 부와 명예 다 아무 소용 없습니다.”
“꼭 우리 아빠처럼 말하네요.”
“네?”
제이가 큰 눈을 깜빡이며 서인우를 빤히 쳐다봤다.
“전부터 느꼈는데, 사장님은 어떨 때는 큰 오빠 같고, 어떨 때는 우리 아빠 같아요.”
“내가 그렇게 노안입니까?”
“이건 10대 아이돌이죠.”
제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켰다.
“우리 또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말투도 그렇고…그런데, 나는 그런 서인우 씨가 좋아요.”
“네?”
“그냥 친구나 팬으로 좋다고요.”
화들짝 놀라는 서인우를 보며 제이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사실 서인우씨 베트남 간다는 얘기 듣고 잠시 얼굴 보려고 왔어요. 언제 가는 건가요?”
“다음 달에 오픈입니다.”
“곧 가시는구나. 알았어요. 다음에 베트남 공연 스케쥴 있을 때 우리 멤버들이랑 꼭 [서풍]에 들를게요.”
“네, 꼭 오세요. 오늘 못 먹은 밥 그때 맛있게 해드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던 제이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가끔 연락해도 되요?”
“연락이요?”
“전화나 문자 같은 거라도….”
“얼마든지요.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밥 잘 챙겨 먹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이 아픈 건 용서 못 합니다.”
“치, 은근히 거리 두시네요.”
서인우가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보였다.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빠져나온 제이가 주차해놓은 차에 타자마자 타이어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기어이 그 셰프 보고 오니까 마음이 편하냐?”
매니저가 룸미러로 제이를 슬쩍 쳐다봤다.
“아니, 오히려 혼자 기대하고 상상하는 게 더 좋았어. 내 건강은 신경 쓰면서 전혀 서운해하지는 않더라.”
“서운해? 뭐가?”
“아무래도 외국에 있으면 자주 못 보니까….”
“지금은 자주 보냐? 너 지금 이 증상 심해지면 병 된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냥 지금 감정을 즐기는 거야. 누군가를 생각하면 기분 좋고 미소 지어지는 기분, 나쁘지 않잖아.”
제이가 달리는 차 창 밖을 쳐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그 셰프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아. 나한테 너무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게 절대 남녀 간의 감정은 아니지.”
“전문가 다 됐다.”
잠시 아무 말 없던 제이가 순간 손뼉을 딱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다른 사람하고는 연애를 하지 않는 거야. 맞지? 내가 감이 딱 오네.”
제이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바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