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차은석 셰프, 그가 만드는 요리세상?
[서풍 만두]와 겨룰만한 [만가복]의 콴탕빠오?
박인식이 새로 올린 글을 덤덤하게 읽어내려 갔다.
이제 서인우는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그 만의 요리 세상을 펼치고 있지만, 세상은 꼭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비교하고 평가하려 들었다.
잠시 기사에 시선을 뻇겼던 서인우는 달리는 택시가 백화점에 가까워질수록 잠시 헤어진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사장님, 이게 무슨 가방이에요? 어디 다녀오시는 거예요?”
큰 가방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서인우에게 직원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제가 출근한 이후로 사장님이 가게를 비우신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안상훈이 철저히 비밀을 지켜주기는 했나 보다.
직원들 모두 서인우의 이틀간 공백에 의문을 품고 지낸듯했다.
곧 오픈 시간이라 길게 얘기할 시간은 없었다.
“사실 제가 잠시 베트남에 다녀왔습니다. 다음 달에 오픈인데, 이것저것 체크할 것들이 많아서요.”
“베트남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비밀리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조용히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특히 그쪽에 아무 말 안 하고 가보고 싶었습니다.”
강진수가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언더커버 같은 거네요.”
“뭐?”
“사장님이 아무 말 없이 그곳에 가서 사람들 일하는 거 체크하고 알아보고 오신 거잖아요?”
“그런 거 아니고, 식자재 상태나 가격 등이 너무 궁금해서, 게다가 인테리어도 우리가 원한 컨셉대로 잘 되고 있는지도 알아볼 겸 갔다 왔어. 자, 그 얘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 빨리 오픈 준비합시다.”
직원들과 우르르 주방으로 들어가자 반가운 중식도의 소리가 들렸다.
-너 잠시 나 좀 봐.
‘사부, 잘 있었지? 나 지금 바쁜데?’
-너 하루 더 늦었으면 내 소식 뉴스로 접할 뻔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고독사할 뻔했다고.
서인우는 사부가 던지는 농담을 들으니 한국으로 돌아온 게 실감이 됐다.
‘거기서 신경 쓰이는 일이 좀 있었어. 나중에 마감하고 천천히 얘기해줄게.’
-그때 까지 못 기다려. 현기증 난단 말이야.
“첫 주문 들어왔습니다.”
오픈을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평상시 서인우가 있을 때처럼 재료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서인우는 이제 이곳은 안상훈만 믿으면 되겠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주문 들어온 유산슬을 만들기 위해 중식도를 손에 들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각종 재료를 채썰어 준비했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은 채 그런 서인우를 지켜보고 있던 강진수가 슬그머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저, 사장님.”
“왜 이렇게 부드럽게 부르고 그래?”
“이 중식도 말입니다.”
갑자기 중식도를 가리키는 강진수에게서 무의식적으로 한걸음 멀어진 서인우가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작은 미소를 보였다.
“내 중식도 뭐?”
-너 없을 때 저놈이 나를 만져보고 싶어서 난리였다. 우리 고독한 안셰프가 너한테 허락받아야 한다고 해서 포기했어.
‘그런 일이 있었어?’
-아무래도 내 능력이 궁금해 죽겠나 본데…. 한 번 보여주고 기절시켜 버려?
‘그런 농담 하지도 마!’
“사장님 중식도 딱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될까요? 이게 일 못하는 사람이 연장 탓한다는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죽어라 연습해도 이렇게 안 되거든요.”
-만져보라 해!
‘사부, 장난치면 절대 안 돼!’
-걱정하지 마. 내가 말했지? 나사에 끌려가기 싫다고.
서인우의 답이 바로 넘어오지 않자 금세 포기한 듯한 강진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역시 안되는….”
“이쪽으로 와서 이 중식도로 한 번 해봐.”
“네? 정말요?”
강진수의 목소리가 주방을 뚫을 뜻 크게 터져 나왔다.
말리지 않으면 기쁨의 고함이라도 칠 기세였다.
“대신 조용히 좀 해. 다들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네,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을 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중식도를 손에 잡아 본 강진수가 앞에 있던 버섯을 하나 집어 들었다.
슥슥.
강진수가 움직이는 대로 가지런히 잘리는 평범한 중식도였다.
착착착.
최대한 빠른 속도로 잘라 보았다.
큰 차이는 없었다.
“감사했습니다. 이 중식도가 아니라 결국 사장님의 타고난 실력이었네요.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 이거 왜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나 그러면 안 되는데 점점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막 생겨.
‘내가 평생 인정해줄게. 나한테는 사부뿐이라니까.’
-됐다. 일이나 하자.
사부의 기운 빠진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주문이 밀려 들어왔다.
“2번 테이블에 탕수육 하나, 짜장, 짬뽕하나요.”
“5번 테이블 서풍 만두, 백 짬뽕 둘, 양장피 하나 주문이요.”
또다시 양장피 주문이 들어오자 역시 직원들이 서인우와 안상훈을 번갈아 쳐다봤다.
“당연히 안 셰프님이 하실 겁니다. 이제 시작했으니 이곳은 모든 걸 안상훈 총괄셰프님이 해줄 겁니다.”
안상훈이 놀란 듯 서인우를 쳐다봤다.
그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베트남 진출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생각보다 많아서요. 그리고, 제가 없는 이틀 동안 완벽한 [서풍TWO]를 이끌어 주셨잖아요?”
안상훈이 뭔가 말을 더하려다 말았다.
서인우의 말대로 이제 모든 것들을 책임지고 해야 할 때가 된 건 사실이었다.
“사장님이 해오신 것들에 누가 되지 않게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더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주문이 점점 많아지면서 주방은 칼질하고 요리하며 나는 소리뿐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바탕 정신없이 휘몰아친 손님들이 조금 빠진 오후 시간.
서인우는 직원 통로로 나와 유현주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서인우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한가요?”
-그럼요.
“사실 통화보다는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요. 지금 사무실에 계세요?”
-네, 잠시 짬 내실 수 있으시면 사무실 옆 직원 휴게실에서 뵐까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커피를 두 잔 뽑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현주가 서인우를 보자 손을 들어 올렸다.
“이거 마시면서 얘기하시죠.”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바빠서 아직 커피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
깔끔하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뿌옇던 머릿속이 조금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사실 제가 이틀간 베트남에 다녀왔습니다.”
“정말요? 박정원 대표님 말씀대로 진짜 혼자 휙?”
“네. 거기서 이승환이라는 파견으로 나간 직원분도 만났습니다.”
“이승환 씨요? 아마도 해외사업팀 직원이신 것 같은데요”
서인우의 얼굴이 뭔가 밝지 않게 느껴졌는지 유현주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거기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식자재 상태와 가격, 분위기 등이 너무 궁금해서 갔었는데, 인테리어 업자가 자잿값을 속이는 걸 알게 됐습니다.”
“네?”
유현주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직원이 흘낏 둘을 쳐다봤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던 유현주가 다시 목소리를 작게 하며 말을 이었다.
“자세히 말씀 해 보세요. 그 현지 인테리어 업자 말하는 거죠? 우리 가이드 해줬던 사람이 소개한?”
“네. 미스터 찐이라고 부른다 들었습니다.”
“맞아요. 이름이 너무 복잡해서….”
“응우엔 민 찐입니다.”
“이름도 외우신 거예요?”
“사실 베트남 진출 결정하고 나서 새벽 시장가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간만 나면 베트남어 공부를 했습니다.”
유현주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우씨가 어떤 사람인지 그 근성을 제가 잠시 잊었네요. 쓰러져서 링거 맞다가도 출근했다는 사람이었는데…. 대단해요.”
“당연히 아주 완벽히 잘하지는 못하지만, 간단한 회화나 상대방이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저 놀라울 뿐이네요. 존경합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왜 저만 보면 서인우 씨 얘기만 하시는지 알 것 같네요.”
유현주가 연신 엄지손을 올려 보였다.
“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죄송해요. 그래서, 그 업자가 자잿값을 속인 걸 어떻게 아시게 된 건가요?”
서인우는 백화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통화내용을 듣게 된 일부터 영수증 사진을 증거로 찍어둔 것과 그 후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얘기했다.
“이건 우리 백화점 차원에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다른 업체로 교체하실 거죠?”
“아니요.”
“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씩씩거리던 유현주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우리가 원하는 컨셉으로 자재도 주문했고 이미 어제오늘 어느 정도 작업이 끝났을 겁니다.”
“그런데, 왜 어제 바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지금 그쪽에서 보낸 새로운 견적서 대로 계산해 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서인우가 강렬한 눈빛을 보이며 잠시 말을 끊었다.
“지금 업체를 바꾸는 건 우리 쪽에서 손해가 더 큽니다. 진행에 차질도 생기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이 사실을 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으니 그걸 이용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요?”
“우선 지금 하는 인테리어 최선을 다해서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 사람이 말한 각종 서류 작업도 모두 그의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다.”
유현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계속 일을 맡겨요? 불안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부탁하려고 유 팀장님을 뵙자 한 겁니다.”
“네? 저를요?”
“거기 나가 있는 직원 중에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만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물론 이승환 씨처럼 제 얘기를 전해줄 수 있는 분으로 말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깜빡거리던 유현주가 손뼉을 '탁' 치며 웃었다.
“그러니까 서인우 씨, 아니 사장님은 끝까지 베트남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 거로 하고 중간에 백화점 직원을 통해 일을 진행하시겠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그래서 모든 서류 작업까지 다 통과하고 최종 정산할 때 제가 담판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베트남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고 마음껏 떠들어 대겠죠? 분명 실수도 많이 나올 거고요.”
“그럴 때마다 증거를 잡아놔야죠. 결정적인 순간에 터트릴 만한 거로 말입니다.”
유현주가 노트에 계속 뭔가를 적었다.
펜을 쥐고 있는 손과 눈빛에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제가 내일까지 최대한 알아보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명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곳에서 이상하게 유 팀장님 얼굴만 떠올랐습니다. 이 백화점에서 제가 믿고 따르는 분이니까요.”
“당연하죠. 잊지 마세요. 나는 [서풍]의 성공을 바라는 열혈 팬이라는 사실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뭐 다른 건 부탁하실 거 없으세요?”
“그 일이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연락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면서도 연신 작은 주먹을 꼭 쥐어 보이는 유현주가 고마웠다.
앞으로 베트남에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는 없었다.
그들 속에서 한 데 섞이며 생활하고, 서로 믿기 위해서는 언어가 더 시급했다.
식당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콧등에 맺힌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웍과 씨름하고 있는 직원들을 바라봤다.
베트남으로 빠져나간 빈자리가 티 나지 않게 빨리 새로운 직원을 충원해야 했다.
처음부터 해외 근무를 원했던 오상준을 비롯해 강진수가 서인우를 따라 베트남으로 갈 예정이다.
베트남 지점 홀 매니저는 언어가 되는 사람으로 새로 채용할 계획이었다.
“정 매니저. 우리 직원 채용 면접은 어떻게 돼가고 있지?”
“채용 공고를 낸 업체에서 대략 열 명 정도 리스트를 보내준다고 했어요.”
“다음 주 월요일이 면접일이라고 했나?”
“네, 홀 직원은 괜찮은데, 주방 쪽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지원해서 업체에서도 곤란해하더라고요.”
정다운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보였다.
“왜 웃어? 정 매니저?”
“갑자기 저 사장님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면접이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니 쑥스러운지 정다운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저처럼 사회성도 부족하고 성질 더러운 사람을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에 그냥 채용시켜 주시고….”
“그때 정 매니저 눈에 세상에 대한 원망이 잔뜩 들어있었어. 내가 비록 큰 힘은 없었지만, 어린 다운 씨 눈이 좀 더 해맑았으면 좋겠다는 그 생각뿐이었지.”
서인우가 정다운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확실한 한 가지는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한 적 없다는 거야. 정 매니저한테 항상 감사해.”
“사장님…. 사장님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너무 불행하고 재수 없는 애라는 생각만 하고 살았어요. 그런 저에게 세상이 따뜻하고 살만한 곳이라는 걸 처음 느끼게 해준 게 사장님이에요.”
정다운의 붉어진 눈에서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 누군가가 둘 사이로 서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