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깊게 숨을 한 번 들이키고 난 서인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웅위엔 민 찐을 향해 다가갔다.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서인우를 보고 살짝 당황한 듯한 미스터 찐이 다시 편안한 얼굴로 같이 인사를 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습니까?”
미스터 찐이 묻는 말에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아! 베트남어를 하나도 모른다고 했지? 바보 같은 놈. 여기서 장사하겠다는 놈이 말 한마디 모르고 뭘 어떻게 하겠다고, 쯧쯧.”
웃는 얼굴로 대놓고 흉을 보는 미스터 찐을 향해 연신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답답했는지 미스터 찐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요상한 발음의 영어로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오케이.”
“바보 같은 놈.”
서인우의 대답에 미스터 찐이 한 번 더 욕을 하고는 어제 만났던 이승환을 찾아오겠다며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옆 테이블 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하며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둘러본 서인우는 구석으로 몸을 숨겨 급하게 가방에서 장부를 꺼냈다.
긴장된 상황에 내용을 다 읽어보고 필요한 것을 찾을 시간은 없었다.
가장 마지막에 적힌 페이지를 펼쳐 그것부터 넘기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총 다섯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장부를 넣은 서인우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구석에서 몸을 빼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인부들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지만, 주위가 워낙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서인지 다행히 서인우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도착 음이 울리고는 미스터 찐이 이승환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서인우는 일부러 옆에서 인테리어 하는 다른 매장을 구경하는 척하며 둘러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계세요?”
이승환이 반갑게 웃으며 물었다.
“다른 가게 인테리어는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요. 우리 [서풍]만 튀면 안 되니까요.”
“[서풍]만 툭 튀어도 됩니다. [서풍]이라면 그럴 자격 충분히 있죠.”
아무래도 중식 마니아인 듯한 이승환 덕에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제가 말을 전혀 못 알아들으니까 답답해서 찾으러 갔나 봅니다.”
“안 그래도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고 저한테 통역을 좀 해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서인우는 미스터 찐을 보고 한 번 더 웃으며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전했다.
“오늘 새벽 비행기로 다시 돌아가야 해서, 어제 도착한 자재도 확인하고 오늘까지 진행 상황도 한 번 더 보려고 왔습니다.”
이승환이 열심히 통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작업에 필요한 자재들 비용도 대략 알고 싶은데요. 견적을 받기는 했는데, 변동사항은 없는지 궁금해서요.”
서인우의 말을 그대로 통역하는 이승환의 얘기가 끝나자 순진한 눈빛을 한 채 선하게 웃고 있는 서인우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미스터 찐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 자잿값이 너무 많이 올라서 처음 보낸 견적의 삼 분의 일 정도 인상될 듯합니다. 자재 업체에서 영수증을 보내오면 다시 견적서를 뽑아 그때 받은 메일 주소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서인우가 예상한 대로 미스터 찐의 답이 넘어왔다.
“알겠습니다. 오늘 밤까지 가능할까요? 비행기 타기 전에 확인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영수증 보내라는 말은 해놨는데, 최대한 빨리 새로운 견적서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꼬박 하루 만에 통역하는 내용의 반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대략적인 의미이기는 했지만.
정중하게 인사를 한 서인우는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된 장부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급하게 백화점을 빠져나와 핸드폰을 펼쳐 본 서인우의 입꼬리가 조금 말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딱 걸렸어!’
* * *
서인우가 없는 [서풍]의 첫날이다.
평상시보다 두 시간이나 먼저 출근한 안상훈은 그동안 지켜봐 왔던 서인우가 항상 그랬듯이 혼자 부지런히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료가 도착하는 즉시 바로 세척하고 요리할 수 있게 손질해 놓는 건 아무리 담당 직원이 만류해도 서인우의 고집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픈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강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도 30분이나 일찍 왔는데, 주방장님은 도대체 얼마나 일찍 나오신 거예요?”
강진수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채소들을 보며 물었다.
“두 시간 일찍 나왔는데, 사장님 혼자 30분 만에 해놓은 양도 못 채웠네요.”
“사장님은 정말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내가 오래 지켜봤는데,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타고난 거예요.”
강진수가 슬금슬금 걸으며 서랍 속 중식도 케이스를 슬쩍 꺼내 보았다.
“저 전부터 사장님 중식도 한 번만 자세히 보고 싶었는데, 이거 만져보면 안 될까요?”
“원래 다른 사람 장비 함부로 만지고 그러면 안되는 거 알죠?”
“네.”
강진수가 실망한 목소리로 케이스에 들어있는 중식도를 다시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사장님 성격에 분명 기회를 주실 테니까 다음에 직접 얼굴 보고 부탁하세요. 나는 권한이 없어서….”
안상훈이 축 처진 강진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른 직원들 곧 오겠네요. 장사 준비 마저 하도록 합시다.”
하나 둘 직원들이 출근하면서 주방이 더욱 분주해졌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는 직원들의 얼굴이 다른 날보다 유독 상기되어 있었다.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해서 마지막까지 계시던 사장님이 안 계시니까 너무 어색하네요. 우리 잘할 수 있겠죠?”
김현수가 그릇들을 치우며 안상훈에게 물었다.
“사장님 빈자리가 크기는 하겠지만, 다들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드디어 시작되는 첫 주문.
탕수육, 게살 볶음밥, 백 짬뽕.
강진수가 미리 썰어 놓은 돼지고기를 부드러운 전분물에 묻혀 튀겨서 식혀놓자 차민정이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러 번 튀겨 바삭하게 만들어 놓은 고기를 소스에 넣어 휘릭 볶은 후 접시에 담았다.
새콤달콤하면서 바삭한 [서풍]의 탕수육이 완성됐다.
안상훈이 백 짬뽕을 만들고 있는 사이 주문이 이어졌다.
“2번 테이블 서풍 만두, 짬뽕, 삼선볶음밥이요. 5번 테이블 양장피와 백 짬뽕 두 개요.”
양장피 주문이 들어오자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안상훈을 쳐다봤다.
“앞으로 주문 들어오면 계속 이렇게 쳐다볼 겁니까?”
안상훈이 웃으며 양장피를 준비했다.
베트남 진출을 결정한 후로 매일같이 했던 상상.
서인우를 대신해 손님들 앞에 완성된 양장피를 들고 나가 [서풍]만의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나 눈 맞춤이 아직 쉽지 않은 안상훈에게는 힘든 도전이었다.
오상준이 여러 가지 색깔의 채소를 채를 썰어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놓았다.
안상훈이 편으로 썰어 놓은 오이와 벌집 모양의 오징어, 편육 등을 가지런히 접시의 가장자리 쪽으로 둥글게 깔아 놓았다.
다음으로 차가운 오이와 오징어 등의 재료와 가운데 따뜻한 해물 채소볶음의 경계에 양장피를 올려 마치 화려한 꽃처럼 플레이팅을 했다.
서인우가 했던 그 모습 그대로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만들었다.
소스까지 완성해 쟁반에 담은 안상훈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주방을 나섰다.
5번 테이블로 다가가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주문하신 양장피 나왔습니다.”
서인우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던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둘의 얼굴에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서인우 셰프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가게를 비우셔서 제가 대신 양장피를 만들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만들었으니 맛있게 드셔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서풍]이 베트남에 진출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이 백화점하고 함께 간다면서?”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서인우 셰프가 직접 하는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여기에 오는 건데….”
말끝을 흐리기는 했지만, 얼굴에 아쉬움과 서운함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더 당황한 안상훈의 눈빛이 불안해 보였다.
그때였다.
“이분은 돌아가신 [서풍]의 서동수 셰프님의 유일한 수제자이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서인우 셰프님의 모든 요리를 완벽하게 마스터 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정다운이 웃으며 안상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 서동수 셰프가 했던 [서풍]의 유일한 수제자면 이 셰프야말로 정말 원조네 원조. 그러면, 우리가 이럴 시간 없지, 빨리 먹어보자고.”
진한 회색 카디건을 입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먼저 양장피를 집어 입에 넣었다.
“처음 가져왔을 때부터 모양도 똑같았지만, 맛도 완벽히 똑같은데? 서인우 셰프가, 아니 죽은 서동수 셰프가 만든 거라고 해도 믿겠어. 뭐해? 먹어보지 않고?”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남자도 양장피를 덜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어보았다.
그 눈빛을 보던 정다운이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는 눈빛이었다.
서인우가 요리를 선보일 때마다 손님들이 똑같이 보여줬던 눈빛.
직원 1호 정다운은 이제 그 눈빛만 봐도 손님들이 얼마나 만족해하며 행복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주방으로 돌아온 안상훈은 그제야 긴장을 놓으며 얼굴에 옅은 미소를 보였다.
* * *
[만가복]의 새 메뉴 콴탕빠오가 입소문을 타고 인기 메뉴가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육즙이 가득한 만두라는 점에다가 한겨울이라는 날씨가 더해져 많은 사람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콴탕빠오를 주문했다.
“우리 이러다가 [서풍]만두처럼 [만가복] 만두도 따로 가게를 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연신 만두를 빚으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신이 난 김도영이 잠시 한가한 틈을 타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만두를 찾는 손님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 오픈기념 메뉴를 만두로 생각했던 거였고요.”
차은석의 예상이 적중한 메뉴였다.
아주 짧은 휴식 시간이 지나고 또다시 정신없는 저녁 장사가 시작됐다.
“오늘 단체 예약이 가장 많은 날입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요리에 집중해 주세요.”
차은석이 주문지를 보며 메뉴를 빠른 소리로 외쳤다.
“게살수프, 탕수육 대자, 콴탕빠오, 팔보채와 난쟈완스 지금 바로 시작 합니다. 그리고, 짬뽕 둘에 짜장 셋, 삼선볶음밥 둘 이어서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메뉴를 듣자마자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기를 튀기고, 소스를 만들고, 만두를 찌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차은석이 매의 눈으로 쳐다보며 실수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바로 각종 해물을 꺼내 팔보채를 준비했다.
띵! 띵! 띵!
요리가 완성됐음을 알리는 벨 소리와 동시에 또다시 주문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오늘은 정말 화장실 갈 시간도 없네요.”
바빠진 만큼 [만가복]의 인기를 실감하는 직원들이 웃으며 땀을 닦았다.
15번 테이블에 마지막 주문이 들어왔을 때였다.
홀 직원 이다인이 주방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점장님!”
“이다인 씨. 무슨 일 있어요?”
“저 며칠 전에 왔던 그 대식가 아저씨가 쓴 기사가 올라왔어요. 그 사람이 음식 평론가이었나 봐요. 모르셨죠?”
차은석이 그때 나눈 대화를 생각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치즈 치킨밥 기사를 그렇게 나쁘게 쓰더니, 그게 미안했었나 봐요. 오늘 올라온 기사는 우리 [만가복] H 백화점 지점에 대해 칭찬했는데요?”
재빨리 주문이 들어온 요리들을 마무리해놓고는 바로 기사를 찾아보았다.
차은석 셰프 - 그가 만드는 요리 세상.
[만가복] H 백화점 지점이 오픈했다.
지난번 [서풍]과 [만가복]에 관한 기사를 쓴 필자는 H 백화점에 입점한 [만가복]의 차은석 셰프가 궁금했다.
중식의 대가 이정복 셰프의 수제자로 상당한 실력을 갖춘 그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서풍]의 메뉴를 따라 했던 사실을 필자 앞에서 바로 인정했다.
그의 말과 눈빛 속에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차은석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내가 만드는 요리 세상이라! 제목부터 마음에 드는데? 이제 정말 같은 선에서 제대로 붙어볼 수 있겠군.’
차은석의 눈이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