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아침 바람이 살을 베어가는 듯 강하게 부는 그야말로 겨울의 한 가운데로 가고 있었다.
볼과 코가 빨개진 안상훈이 막 출근해 주방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엄청 추운 아침 같은데요? 차 안 가지고 오셨어요?”
“와이프가 앞에서 내려주고 갔어요. 우리 차를 뽑은 후로는 남편보다 차가 일 순위입니다.”
“형수님은 정말 운전을 즐기시네요?”
“자기가 꿈꿔오던 것들이 하나씩 이뤄지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모두 사장님 덕분이에요.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서인우가 슬쩍 안상훈 가까이 몸을 붙이며 귓속말을 했다.
“모두 안 셰프님과 형수님 능력이지만, 혹시라도 정말 감사하시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뭐든지 다 말씀하세요.”
안상훈의 눈빛이 죽으라면 정말 딱 죽는시늉까지 할 기세였다.
“내가 내일 밤 비행기로 베트남에 잠시 다녀오려 합니다.”
“네?”
안상훈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다시 소리를 죽여 서인우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인테리어 시작한다니까 현지 상황을 좀 보셔야겠죠?”
“네, 새벽에 출발해서 꼼꼼하게 보고 다음 날 밤 비행기로 돌아오면 정확히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될 겁니다.”
“돌아오는 날에도 바로 출근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밤 비행기로 와서?”
“그래야죠. [서풍]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자리를 비우는 겁니다. 그것도 이틀씩이 나요.”
그가 아는 서인우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서도 맞던 링거까지 뽑아 버리고 출근한 사람이었다.
“걱정되시는 마음 이해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자리 비우신 거 티 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좀 편안하게 다녀오세요.”
“그래도 안 셰프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결단을 내린 겁니다.”
안상훈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은 서인우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릴 일은 제가 베트남에 다녀오는 건 여기 직원분들뿐 아니라 형수님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철저히 비밀리에 다녀오려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평상시 말이 없고 입 무거운 걸로 유명한 안상훈이라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뭐든 또 생각나시면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신경 쓰겠습니다.”
홀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진짜 춥네요.”
손까지 빨개진 강진수가 연신 손을 호호 불며 인사했다.
바깥 온도와 차이 나게 따뜻한 백화점에 들어와서인지 귀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강진수 씨, 꽤 추웠나 보네. 귀까지 빨개.”
“지하철역에서 백화점까지 걸어오는데 정말 내 귀가 붙어있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니까요.”
생각만 해도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난번부터 묻고 싶었는데, 내가 빌려준 차 놔두고 왜 자꾸 지하철 타고 다녀?”
“우리 동네 주차도 너무 복잡하고요, 그리고….”
강진수가 잠시 머뭇거렸다.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 생각하면 죄송해서 차 타고 못 다니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뭐가 죄송한데?”
“우리 할머니 그 오랜 기간 병원 다니실 때 항상 저랑 버스 두 번 갈아타고 다녔어요. 무릎이 안 좋아서 지하철은 못 타시고, 버스만….”
“그때는 강진수 씨가 어렸잖아?”
“그래도 그게 너무 죄송해서 저만 편하게 못 다녀요. 저 진짜 촌스럽죠?”
서인우는 그런 강진수가 듬직하게 느껴졌다.
아직 여드름이 남아있는 이제 스물하나라는 나이가 큰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걸 서인우는 잘 알고 있었다.
“아참! 우리 [서풍]에 중국 진출 제안이 들어왔었다면서요?”
분위기를 바꾸려고 그랬는지 강진수의 목소리가 워낙 컸다.
주방 안에 있던 모든 직원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모두 궁금하다는 듯이 하나씩 하나씩 서인우와 강진수 앞으로 몰려들었다.
-어쩌냐? 직원들한테 다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왜 잘 나가다가 갑자기 중국 진출 얘기를 꺼내 가지고….’
-분명 직원 1호한테 들었구만. 이래서 세상에 비밀은 없어. 잘 해봐라.
서인우가 순식간에 다 모인 직원들에게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중국 요리협회 서울 지부장이라는 남성재가 찾아온 얘기부터 거절하게 된 이유까지.
“사장님 말씀이 맞아요. 갑자기 너무 커져 버리면 초심을 잃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도 너무 좋은 기회인데, 아깝기는 합니다.”
“그 사람이 뭐 또 다른 조건을 말하지는 않았나요?”
“완전히 대박 날 기회를 날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서인우는 지금 베트남 현지답사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 * *
새벽에 출발한 비행기에서 내리자 베트남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동안 공부한 어설픈 베트남어로 떠듬거리며 가장 먼저 재래시장을 찾았다.
안상훈이 조사해 적어준 것들을 펼쳐보며 가장 가까운 시장부터 제일 규모가 큰 시장까지 하나씩 꼼꼼하게 체크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도 훌쩍 넘어섰다.
이미 장사를 접고 정리하는 가게들도 여럿 보이기 시작했다.
서인우는 내일 새벽에 다시 와서 좀 더 구체적으로 자료 조사를 해야겠다 맘먹고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현지 답사팀이 전해준 베트남에서 가장 럭셔리하다는 백화점의 중식당에 혼자 들어갔다.
간단한 베트남어로 볶음밥과 칠리새우, 소고기 콩껍질 볶음을 시켰다.
답사하고 돌아온 윤지영이 말한 볶음밥의 맛이 상상되지 않아 꼭 먹어보고 싶었다.
제일 먼저 나온 칠리 새우는 [서풍]에서 보다 더 연한 색을 띠고 있었다.
먼저 향을 맡아본 서인우는 칠리새우를 하나 들어 맛을 봤다.
‘이건 칠리 보다는 탕추의 맛이 나는데? 매운맛이 전혀 없어. 중국식 탕수육처럼 요리한 거였군.’
이어서 나온 쇠고기 껍질콩 볶음은 예전에 아빠와 청도 여행 갔을 때 가장 맛있게 먹었던 메뉴였다.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순간 울컥한 서인우는 요리의 맛을 더 신중하게 느끼며 먹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볶음밥이 나왔다.
양상추와 달걀, 다진 파가 전부인 볶음밥은 중국식 달걀 볶음밥이라기에는 기름기가 적고 훨씬 담백한 느낌이었다.
“담백한데 간은 짭짤하고, 고소해. 순간 순간 씹히는 양상추가 아삭한 식감까지 더해줘서 볶음밥에 채소를 올려 먹는 듯한 느낌을 주는군.”
혼자 얘기하며 맛을 음미하고 있는 서인우를 직원 하나가 계속해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MS 백화점을 찾아갔다.
안상훈과 윤지영에게 들은 대로 호치민 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서 오픈 준비가 한창인 백화점을 찾을 수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 보니 현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서풍] 이 들어갈 자리를 하나하나 살폈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MS 백화점 직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서풍] 서인우 씨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달에 베트남으로 파견을 나온 이승환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인우입니다.”
“여기 오신다는 연락 못 받았는데요?”
“오늘 인테리어에 중요한 작업 시작한다고 해서 급하게 날라왔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그러면 여기 인테리어를 맡은 미스터 찐 올 시간이 됐으니까 만나보시고 요구 사항이나 수정할 부분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면 되겠네요.”
서인우가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인테리어가 끝난 곳이 많이 있네요?”
“네, 지난달부터 시작한 곳들도 있어서요.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 안에 일이 끝나는 것 같아요. 물론 업체마다 다르기는 합니다.”
“여기 [서풍] 인테리어를 담당해주는 미스터 찐 이라는 사람이 혹시 한국어가 가능한가요?”
“아니요, 몇몇 단어 외에는 전혀 모릅니다.”
“베트남어 모르시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중간에서 통역해드리겠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하겠지만, 굳이 알아듣는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서풍]이 여기로 들어온다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제 1년 파견 기간에 가장 큰 행복이 될 건데요.”
이승환이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저기 오네요. 미스터 찐.”
이승환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서인우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응우엔 민 찐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제법 듣기 좋은 발음의 이승환이 서인우를 소개했다.
“이쪽은 여기에서 장사를 시작할 [서풍]의 서인우 사장님입니다.”
응우엔 민 찐이 갑작스러운 의뢰인의 등장이 놀라우면서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지 떨떠름한 표정을 잠시 지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응우엔 민 찐입니다. 미스터 찐으로 불러주세요.”
미스터 찐이 인사를 그대로 통역해주는 이승환을 보며 눈으로 뭔가 묻는 듯했다.
“이분은 베트남어를 전혀 모르십니다. 요리만 하는 사람이라서요. 한국에서는 엄청나게 유명한 중식 셰프입니다.”
서인우는 이승환의 이어지는 설명을 띄엄띄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웃음만 보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 우리 쪽에서 보낸 인테리어 도안 보고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는데, 혹시 수정된 내용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서인우의 질문에 이승환이 베트남어로 천천히 질문을 시작했다.
“당연히 그 도안에 따라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주방 몇 가지랑 전체 벽면 정리는 끝난 상태라 오늘 자재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자재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승환이 질문하자 미스터 찐이 어깨에 메고 있던 넓적한 가방에서 테블릿을 꺼내 김서원이 작업해 준 도안을 펼쳐 보였다.
“전체 몰딩에 들어갈 자재들과 조명에 필요한 자재들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서인우는 작업이 완성되는 걸 보고 가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는 건 볼 수 있을듯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이승환이 고개까지 숙이며 서인우의 부탁을 전달했다.
그러자 살짝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미스터 찐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도안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이건 의뢰인이 원하는 거니까 따르는 겁니다. 다 미스터 탄이 부탁해서 하는 일입니다.”
말을 전해 들은 서인우는 안상훈에게 들은 가이드를 떠올렸다.
그 가이드 부탁으로 소개받은 업자라고 했으니까.
“내가 이 근처 인테리어를 많이 해서 여기 소방서나 관련 부서 사람들하고 아주 사이가 좋아요. 나중에 식품 안전 조건 적합 증명서도 내가 쉽게 받아줄 수 있습니다.”
안상훈이 답사 왔을 때 했던 얘기였다.
그 이유로 현지 업체와 인테리어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승환을 통해 몇 가지 더 질문을 주고받은 후, 서인우는 조용히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주변 식당들의 분위기와 가격 등을 알아보며 잠시도 쉬지 않은 서인우는 늦게서야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여느 날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어제 돌아봤던 새벽시장에 다시 들렀다.
역시 새벽에 들른 시장은 훨씬 활기 넘치고 고기와 채소들도 좋고 싱싱했다.
가격과 판매 시간, 대량 주문 가능 여부 등을 물었다.
그리고는 어제부터 들고 다녔던 두꺼운 수첩에 좋은 고기를 파는 곳의 시장 이름과 가게 상호, 가격 등을 꼼꼼하게 적었다.
그렇게 각종 고기와 채소, 과일들을 일일이 비교하고 메모했다.
시장에서 파는 쌀국수를 맛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새벽 비행기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빠듯한 일정에서 거의 반나절을 시장에서 보냈다.
그래도 베트남 현지 분위기와 물가, 식자재 등을 직접 보고 난 서인우는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오후에 다시 들른 MS 백화점.
[서풍]이 들어갈 5층에 도착한 서인우는 뒤돌아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미스터 찐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숨겼다.
“여기서 장사한다는 사람들 어차피 아무것도 모른다고. 내가 말한 대로 자재 가격 장부를 다시 작성해서 가져와. 이건 내가 알아서 처리 할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놀란 서인우는 미스터 찐의 손에 들린 까만 색 표지 장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