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언젠가부터 11월이 늦가을이 아닌 초겨울 날씨가 되어버렸다.
쌀쌀해진 날씨에 따뜻하고 얼큰한 국물을 찾는 손님이 부쩍 많아졌다.
“5번 테이블에 백 짬뽕 두 개, 탕수육 하나 그리고 12번 테이블에 홍 짬뽕 하나, 삼선 짜장면 하나, 누룽지탕 하나요.”
주문을 확인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자신이 할 일들을 척척 찾아 시작했다.
“7번 테이블에 짜장면 하나, 홍 백 짬뽕 하나씩, 그리고 구전대장이요.”
지난주에 처음 선보인 구전대장이 일주일 사이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는지, 찾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각종 향신료와 간장으로 초벌 준비를 해놓은 돼지 곱창을 맛있게 졸여 동글동글한 모양이 살 수 있도록 가지런히 담아 벨을 눌렀다.
윤기가 자르르하고 불그스름한 곱창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게 신메뉴 그거 맞지? 돼지 곱창 요리라는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네.”
“우리도 하나 시켜볼까?”
“배는 좀 부른데, 하나 시켜서 고량주 한잔할까?”
“오늘부터 금주라면서?”
“오늘만 마시고 내일부터.”
식사 중이던 남자 둘이 다른 테이블 위에 올려진 구전대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결국 추가 주문을 했다.
“12번 테이블에 구전대장 하나 추가요.”
“이번에는 안 셰프님이 만들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백 짬뽕을 완성해 벨을 누른 안상훈이 바로 구전대장을 준비했다.
“강진수. 삼선볶음밥 완성하는 대로 유산슬 준비하도록 하세요.”
“네, 셰프.”
주방에 칼질하는 소리와 웍을 씻는 소리, 고기나 새우가 튀겨지는 소리가 가득했다.
여기저기 웍에서 불쇼를 멋지게 보여주던 주방이 3시가 넘어가면서 조금 한가해졌다.
“사장님, 조금 전에 [서풍 만두] 윤 사장님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통화 한 번 해보세요.”
“알았어요. 정 매니저.”
시간을 확인한 서인우가 직원 통로로 나가 윤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했었다면서?”
-응, 오빠. 오늘 저녁에 제시카 만나기로 했는데, 베트남 인테리어에 대해서 얘기했나 해서.
“지난번 통화했어. 간단히 상황 설명했으니까 네가 좀 자세히 얘기해 줘. 서운하지 않게.”
-알았어. 분위기 봐서 컨셉만 좀 의논해볼게. 제시카가 워낙 감각이 좋잖아.
“그래, 그 부분은 네가 알아서 해.”
-오케이, 그럼 바쁜데 수고하고.
처음 시장통에서 했던 [서풍 TWO]의 인테리어로 시작해서, 지금 장사하고 있는 MS 백화점, 그리고 [서풍 만두]까지 모두 김서원의 아이디어로 인테리어를 했다.
당연히 베트남에서도 같은 컨셉으로 인테리어를 할 계획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낯선 환경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모든 일을 진행해야 하는 서인우는 요즘 베트남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가한 틈을 타 베트남어 공부를 하고 있던 서인우에게 강진수가 무슨 일인지 실실 쪼개며 다가왔다.
그 웃음이 왠지 뭔가 께름직했다.
“강진수,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으며 사람을 쳐다봐?”
“사장님, 지금 노래 듣고 있죠?”
“노래?”
“에이, 제이 노래 듣고 있는 거 다 알아요.”
이 상황에 갑자기 왠 제이?
“컴 파이!(Khong phai)”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요! 토이 다우 더우! (Toi dau dau)
서인우가 입을 꾹 닫고 웃음을 참으며 귀에 꽂고 있던 블루투스를 강진수의 귀에 꽂아주었다.
“이거 어느 나라 말이에요? 베트남?”
“그래, 됐냐? 강진수 토이 다우 더우!”
서인우가 머리를 가리키며 픽 웃었다.
“그건 또 무슨 뜻인데요?”
“강진수 머리가 아파요!”
“에이, 베트남어 들으니까 진짜 머리가 아프긴 하네요. 저는 출근해서 종일 한쪽 귀에 블루투스가 꽂혀있길래 당연히 사장님 그녀일 줄 알았죠.”
-지금 저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사장님 그녀? 혹시 그게 우리 밀크공주 제이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의 그녀가 누군데?”
“에이,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뭘 그리 쑥스러워하고 그러나? 괜찮아요, 괜찮아. 그 나이에 처음 연애하는 거 같은데, 티 내도 된다고요. 우리 다 이해 한다니까요?”
-저놈이 왜 자꾸 헛소리를 지껄이고 그래?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나도 전혀 못 알아듣겠네.’
“갑자기 뭔 소리냐? 뭐가 다 아는 사실이라는 거야?”
“이것 봐. 전혀 모르고 계시네. 사장님, 이런 거 들을 때가 아니라니까요. 시간 날 때 인터넷도 좀 보고 소통을 해야지. 잠시만요.”
강진수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제이라는 두 글자를 치자 연관 검색어가 우수수 쏟아졌다.
그중 제일 위 칸을 차지하고 있는 글자를 본 순간 서인우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제이, 서인우 셰프 열애설]
“강진수, 이게 무슨 소리냐? 저 열애설의 서인우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뭐래? 서인우 셰프라고 콕 찍어서 정확히 써놨는데요.”
“왜, 이런 루머가…?”
순간 지난번 제이가 왔을 때 있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쳐 갔다.
그때 사진을 못 찍게 했어야 했는데….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이돌 가수가 자기 때문에 이런 루머에 휩싸이게 된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다음부터는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 * *
제시카와 오랜만에 만나 늦은 저녁을 먹고 아인 슈페너가 유명하다는 카페에 마주 앉았다.
커피 위에 하얗게 내려앉은 생크림이 보기만 해도 달콤함이 전해졌다.
쪽!
한입 들이키는 순간 온몸에 부드러우면서 달콤한 생크림이 퍼지며 하루의 피곤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제시카. 여기 아인슈페너 진짜 죽음이다. 짱 맛있어.”
“맞죠? 전 어떨 때는 연달아 두 잔 마셔요. 마지막 남은 걸 아껴 마시다가 결국 못 참고….”
윤지영이 입가에 묻은 하얀 생크림을 혀로 살짝 닦으며 다시 한번 달콤함을 음미하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언니, 꼭 아기 같아. 지금 표정 너무 귀여운 거 알아요?”
“뭐야? 단 거 좋아한다고 놀리는 거야?”
“진심인데? 정말 너무 사랑스러운 표정이었어요.”
둘이 괜히 한바탕 웃었다.
“우리 베트남 인테리어가 정말 걱정이다. 제시카만 믿고 있었는데….”
“저도 너무 아쉬워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현지 업자와 일하는 게 맞아요. 그래야 여러 가지 도움도 받을 수 있고, 일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거예요.”
“그렇다고 하더라고. 소방법이니 식품 안전법이니 뭐 복잡한 게 너무 많아.”
“독일에서 공부할 때 교민들 잠시 도와준 적 있었는데, 아무래도 법도 다 다르고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이 발생하더라고요.”
반도 채 남지 않은 아인 슈페너를 심각한 눈으로 한참 쳐다보던 윤지영이 뭔가 결심한 듯 남은 커피를 마셔버렸다.
“잠 못 드는 밤이 될지라도 오늘은 한잔 더 마셔야겠다.”
“나도 방금 속으로 빨리 마시고 한 잔 더 마셔야지 했는데…그러고 보면 우리 참 잘 통하는 것 같아요. 나는요….”
김서원이 잠시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윤지영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나는 언니가 친언니처럼 너무 좋아요. 참, 염치없게 말이에요.”
“친언니로 받아들인 거 아니었나? 나는 친동생으로 받아들였는데?”
“언니!”
눈가가 붉어진 김서원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제시카. 그러지 마. 우리 부모들 일은 그 세대로 끝났다고 생각하기로 했잖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안 그래?”
“그래도 나는 이렇게 서인우 씨와 언니 옆에서 웃고 따뜻한 정을 느끼며 지내도 되나 죄송할 때가 많아요.”
윤지영이 말없이 김서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쩌지? 더 죄송해야겠는데?”
“네?”
핸드폰을 보던 윤지영이 카페 입구를 향해 손을 들었다.
“오빠, 여기.”
“서인우 씨도 오는지 몰랐어요.”
“백화점 마감하고 시간이 맞을 것 같아서…. 인테리어 같이 못 하게 돼서 오빠도 많이 아쉬워하고 있더라고.”
카멜색 핸드메이드 코트를 걸치고 살짝 기른 앞머리를 부드럽게 넘기며 카페로 들어오는 서인우를 향한 눈이 둘만은 아니었다.
사람들 눈은 어쩜 다 그렇게 똑같은지.
커피든 음료든 마시고 있던 여자들의 눈이 일제히 카페 입구로 쏠렸다.
누가 보면 연예인이라도 등장하는 줄.
하긴, 시청률이 꽤 높은 방송에 나왔던 사람이라 그런지 알아보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서인우 이름이 들렸다.
“밖에서는 오랜만에 보네요. 여기 커피 향이 좋은데요?”
“오빠 이 집 아인슈페너가 정말 끝내주게 맛있어. 달콤한 게 입안 가득 퍼지면서 피로가 확….”
“그래? 그러면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뭐야?”
“나 원래 커피는 단 거 안 마시잖아. 나 대신 실컷 마셔. 내가 얼마든지 사줄게.”
윤지영과 김서원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었다.
이미 그러기로 했거든요!
“베트남 인테리어 얘기 들었죠? 아쉽게 같이 할 수 없어도 도와주기는 할거죠?”
“오늘 커피 사주신다면서요? 그러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현지 업체가 우리가 원하는 컨셉으로 잘 뽑아줘야 할텐데…자기 고집대로만 하자고 할까 걱정입니다.”
김서원이 가방에서 테블릿을 꺼내 펼쳐보였다.
“저녁 먹으면서 언니가 베트남 매장 사진을 보여줬어요. 지금 인테리어 컨셉을 그대로 하기에는 백화점 이미지랑 조금 맞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요? 저는 잘 모르는 분야라서….”
“워낙 럭셔리한 분위기의 백화점 내부에 어울리면서 뭔가 [서풍]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인테리어면 좋을 것 같아서요.”
김서원이 테블릿에 저장된 파일을 찾아 터치하자 여러 개의 인테리어 도면이 3D로 펼쳐졌다.
“지난번 베트남 매장 인테리어 제안해 주셨을 때 제가 너무 좋아서 며칠 밤새 만든 거예요. 이런 분위기에 조금 더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서풍]의 인테리어 포인트인 레트로 천막을 골드와 블랙으로 바꿔 전체 몰딩에 넣었다.
붉은 홍등을 대신해 바깥쪽은 가는 새장 같은 모양 안에 분홍빛이 도는 등으로 은은하며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간단하게 이미지만 상상해 본 거예요. 제가 직접 하지는 못해 아쉽지만, 최대한 멋지게 구상해 볼게요.”
“그렇게 해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이거 그 백화점이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 고급스러운 이미지도 살리면서 [서풍]의 특징도 얼핏 보이고, 너무 멋있다.”
“이런 컨셉으로 좀 더 뽑아볼게요.”
서인우와 윤지영이 맘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자 기분이 좋아진 정다운이 막 커피를 들이켜려 할 때였다.
카페 안에 있던 젊은 여자 둘이 서인우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다음 달에 인테리어 마무리하고 나면 영업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장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차은석이 그동안의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새해를 맞아 1월 오픈 예정으로 준비하고 있는 H 백화점 [만가복]은 차은석을 중심으로 마포점 셰프 중 한 명과 새로 뽑은 네 명의 보조 셰프와 함께 하게 되었다.
“오승연 매니저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아무래도 저도 나가는 상황에 오 매니저까지 백화점으로 가게 되면 마포점이 중심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결론입니다.”
“그렇긴 한데, 백화점에도 오 매니저같이 능숙하고 전문적인 매니저가 필요할 텐데요.”
“그래서 매니저는 면접 보고 경력 많은 사람으로 새로 채용할 생각입니다. 마포점 홀 직원 중 한 명이 백화점으로 갈 겁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김원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가 즐겨 마셨다는 차라고 해서 내오라고 했더니 영 맛이 없네. 차 셰프가 내려준 보이차가 더 맛이 좋은 것 같습니다.”
“다음에 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건 가끔 옛날 생각날 때 마포점, 아니 H 백화점에 가서 차셰프와 마시고 싶은데…그래도 되겠습니까?”
뭐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갑자기 물어오는 질문에 바로 답을 내놓지 못한 차은석이 순간 그의 눈을 응시했다.
회장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어딘지 모르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김원상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한때는 안쓰러운 연민도 있었고, 요리에 열정을 보일 때는 같은 셰프로 동지애 같은 것도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예의를 갖춘 듯한 말투가 오히려 더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가지.
김형식을 대할 때 느꼈던 차가운 기운이 그에게서도 똑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제 맘껏 실력 발휘할 일만 남았네요. [서풍] 따위 가볍게 깔아뭉개 줄 거라 믿습니다. 내가 뭐든 돕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