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김원상은 회장 자리에 올라온 지금도 전처럼 뻣뻣하게 구는 차은석이 맘에 들지 않았다.
기분대로 한 마디 확 쏘아주고 해고해 버리고 싶지만, 그의 재능을 충분히 알기에 감정이 상한 티를 내지 않으려 일부러 웃어 보였다.
“아직도 MS 백화점 입점 경쟁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겁니까? 그런 일은 잊어버리세요. 차셰프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게 아니었으니까.”
“그 이유 아니면 굳이 백화점에 입점하시려는 목적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방금 얘기한 대로 더 많은 사람에게 홍보도 하고, 또 백화점 측에서도 우리 입점으로 매출을 올려보려 하는 것 같은데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겁니다.”
차은석이 까맣게 우러난 보이차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 찻물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생각을 잠시 하며 쌉싸름한 보이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제 능력을 높이 사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마포점에서 계약 기간 채우고는 독립하고 싶습니다.”
“전에 말했던 당신 가게를 차리겠다는 겁니까?”
“네, 내 이름의 가게를 차리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백화점에서 딱 2년만 더 근무해주면 지금 받는 월급의 두 배를 주겠습니다. 이건 아주 파격적인 조건인데, 안 그래요?”
지금도 [만가복] 셰프 중 거의 탑 파이브 안에 드는 연봉을 받고 있는 차은석한테 파격적인 조건이기는 했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두 배의 월급을 준다면 더 많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여러 가지 비리에 휩싸이게 되겠지.’
차은석은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느라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거절의 뜻이 보였을까?
김원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결정하지 마시고, 딱 일주일만 생각해보고 답을 주세요.”
“죄송합니다. H 백화점을 맡을 셰프는 다른 분으로 알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연락하지. 그때도 같은 생각이면 더는 그 얘기는 하지 않겠다는 거 약속하겠습니다.”
잠시 입을 움찔거리던 차은석이 속에 있던 말을 되삼켰다.
어차피 일주일 후에도 똑같은 결론일 테니까.
* * *
오픈 전부터 시작된 박정원과의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해외 진출의 경험이 많은 박정원을 통해 엄청난 정보를 얻었다.
인터넷 검색이나 안상훈에게서 들어 알게 된 막연한 내용이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선배님 말씀 듣고 나니 그때 회의하면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빨리 달려가서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집니다.”
-인테리어 건은 그 가이드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면 현지 도움을 받는 게 일 진행하기 훨씬 편해.
“네, 그렇게 결정하면 답사팀이 그 업자와 미팅을 잡아본다고 했습니다.”
-인테리어 하는 중간에 하루라도 시간을 내서 꼭 직접 체크하고 오도록 하고. 물론 말 안 해도 그럴 생각 하고 있겠지만.
“안 셰프님 돌아오시면 상황을 좀 보고 어떻게든 짬을 내보려고 합니다.”
-내가 중국이랑 베트남 진출하면서 조사해놓은 자료들 메일로 보내줄 테니, 참고하도록 하고.
“정말 감사합니다.”
박정원으로부터 받은 메일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우선 급한 부분만 빠르게 읽어보고, 필요한 부분만 편집해 안상훈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바로 안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셰프님. 일어나셨죠?”
-그럼요. 여기 새벽시장에서 해물과 채소, 고기등 상태와 가격 조사 중입니다.
“이른 시간이라 피곤할 텐데 수고가 많으시네요.”
-사장님이 매일 하시는 일 아닙니까? 이제 저도 똑같이 해야죠.
“방금 박정원 선배님으로부터 해외 진출 관련 자료들을 메일로 받았습니다. 그중에서 당장 필요한 자료는 다시 안셰프님 메일로 보냈으니 한번 읽어보세요.”
-아! 잘됐네요.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꼼꼼하게 읽어보겠습니다.
서인우가 잠시 심호흡을 길게 했다.
“안 셰프님. 그 가이드는 믿을 만합니까?”
-겨우 하루 봐서 사람 속까지는 모르겠지만, 눈치도 빠르고 발도 상당히 넓은 것 같았습니다.
“우선 그 사람을 믿고, 어제 말한 인테리어 업자 한 번 만나봐 주세요. 대략적인 견적이랑 설명이라도 들어보고 오시면 좋을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오후라도 미팅 잡아서 만나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린 다 같은 [서풍] 식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서인우는 분명 밤늦게까지 야시장을 둘러보고 또 새벽부터 시장조사를 하느라 피곤했을 안상훈이 듬직하고 고마웠다.
그의 말처럼 이제 정말 진정한 [서풍] 식구였다.
서인우 역시 장사 준비를 위한 재료가 도착하는 즉시 기분 좋게 손질을 시작했다.
* * *
새벽시장에서 돌아와 샤워를 마친 안상훈이 조식 시간에 맞춰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 과장님, 몸은 좀 어떠세요?”
“약 먹고 푹 잤더니 아주 개운합니다.”
“다행이네요. 저 혹시 우리 가이드 미스터 탄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진수가 조금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아침에 우리 대표님하고 통화했는데, 미스터 탄이 말한 인테리어 업체와 미팅을 해볼까 해서요.”
“저도 지난번 출장 왔을 때 처음 만난 거라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냥 현재로는 우리가 도움을 받는 처지라 믿어보는 거죠.”
“그렇죠. 식사하면서 다시 얘기 해봐야겠습니다.”
1층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조금 전 오진수와 나누던 대화를 다 같이 이어갔다.
미스터 탄과 통화한 후 다행히 저녁 식사 전 4시에 미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식사 후 MS 백화점을 다시 들른 일행은 공사 진행 상황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체크했다.
오후 4시.
백화점에서 가까운 카페로 안내한 미스터 탄이 내부를 두리번거리더니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짧게 통화를 했다.
물론 베트남어라 아무도 알아듣지는 못했다.
“거의 다 왔다고 홉니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미스터 탄보다 조금 더 큰 체격의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미스터 탄이 손을 들어 보이자 바로 다가온 남자는 어설픈 한국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뇽하세요.”
안상훈 일행도 반갑게 인사했다.
미스터 탄이 그 남자에게 한 사람씩 소개해주고, 마지막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 사람 이름은 응우엔 민 찐입니다.”
역시 어려운 이름이 입에 딱 붙지 않자 유현주가 먼저 물었다.
“그러면 미스터 찐 으로 부르면 될까요? 이름이 너무 어렵네요.”
“네, 나초롬 그렇게 부르면 됩니다.”
응우엔 민 찐, 다시 말해 미스터 찐이라는 남자는 한국어 단어를 하나씩 섞어 쓰기는 했지만, 잘 모르는 듯했다.
가이드를 사이에 두고 모든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답답했지만, 그래서 더 지금 이곳이 외국이라는 실감이 들기도 했다.
미스터 탄의 도움으로 간략한 현지 상황과 인테리어 할 때 주의 사항들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11월쯤으로 계획하고 있는 [서풍]의 인테리어도 도와줄 수 있다는 확답을 얻었다.
저녁 식사가 예약된 호치민 푸미흥이라는 한인타운에 있는 중식당에 도착했다.
“역시 한인타운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한국어 간판이 많이 보이네요.”
예약된 룸으로 들어가 앉으며 윤지영이 한 말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중식당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 교민들한테 제일 인기 있는 메뉴를 물어봤는데, 코스 A를 권해 주시더라고요. 메뉴 한 번 보세요.”
유현주가 보여주는 메뉴판은 [서풍]의 것과 그닥 다를 게 없었다.
차이라면 음식 이름이 베트남어와 한국어 두 가지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과 가격이 현지 가격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거였다.
“코스 A 가격이 1인 600,000VND면 얼마인 거예요?”
“대략 한국 돈으로 3만원 정도 되는 거네요.”
“한국으로 치면 비싸지 않은데, 여기 물가치고는 꽤 가격이 나가는 편이네요?”
“여기서는 외국 사람이 하는 외국 요리니까요. 현지 음식하고는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교민들이 권해주는 코스 A로 주문을 하자, 밑반찬이 깔렸다.
흔히 보는 단무지와 양파 외에 볶은 땅콩과 초록색 절임 고추가 같이 놓였다.
메뉴판에 있던 순서대로 제일 먼저 양장피가 나왔다.
가늘게 채썰어진 각종 채소에 고기와 해산물을 바로 볶아 올려 전체적으로 음식이 냉채라기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겨자 소스는 따로 나와 양을 조절해가며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 [서풍]의 대표 메뉴인 양장피와 비교 평가 부탁드립니다.”
윤지영이 음식을 덜어주며 잊지 않고 말하자, 다들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한 눈빛을 보이며 양장피를 입에 넣었다.
“우리 [서풍]에서는 재료마다 온도를 다르게 해서 한 데 섞이는 맛이 있는데 반해 여기 양장피는 정말 따뜻한 요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네요.”
“안 셰프님 말이 맞아요. 맛은 있는데 겨자소스도 좀 밍밍하고, 난 좀 더 차가우면 좋을 것 같아요.”
안상훈과 유현주의 평이었다.
전체적으로 맛은 나쁘지 않았으나 중식요리 순서의 첫 번째인 량차이, 즉 차가운 요리라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는 요리였다.
다음으로 나온 요리는 게살수프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수프는 다들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세 번째 메뉴로 나온 크림 중하 새우.
아무래도 깔끔하고 약간 느끼한 듯한 맛이 윤지영과 유현주의 입에 제일 잘 맞는 듯했다.
“여기 사장님이 한국에서 오랫동안 요리를 하셨던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마치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흔히 먹는 그런 맛이죠?”
“네. 여기 와보니 특별히 맛을 현지화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윤지영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여기는 위치도 한인타운이니까 아무래도 타겟층이 현지 교민들이겠죠? 우리는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중심에 있는 백화점에 들어갈 거니까 얘기는 다르다고 봐요.”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으로는 적채와 당근, 오이 그리고 죽순과 파인애플이 들어간 소스가 부어져서 나온 탕수육이었다.
이 곳은 부먹, 찍먹 고민할 필요 없이 소스가 부어져서 나왔다.
“여기는 그냥 부먹이네요. 고기 잡내가 전혀 없어서 아주 맛있어요.”
“새벽시장에서 보니 노상에서 파는 고기들이 워낙 신선하고 상태가 좋았습니다. 그날 가져온 고기는 거의 그날 완판이라고 하는 거 보니 매일 신선한 고기로 요리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맛있는 고기가 잘 튀겨진 맛, 딱 그 맛이에요.”
모양은 비슷해도 가게마다 맛이 조금씩 다른 탕수육이다.
이곳의 탕수육은 한국에서 가장 흔히 보고 먹어왔던 옛날 탕수육 느낌이었다.
코스의 마지막 요리인 고추잡채가 나왔다.
뽀얀 꽃빵에 청홍피망과 돼지고기가 고추기름에 볶아져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이거 보기보다 매콤해요. 난 원래 좀 매콤한 고추잡채를 좋아해서 딱 내 취향이에요.”
오진수가 맛있다는 말을 연신 하며 고추잡채를 먹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윤지영이 오진수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서풍]보다 맛있어요?”
“네? 에이 내가 매콤한 고추잡채를 좋아하게 된 게 다 [서풍] 때문인데,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역시 그렇죠?”
다들 먹으며 평가하며, 또 서풍의 맛과 비교하느라 입도 눈도 바빴다.
마지막으로 식사가 나왔다.
짬뽕 둘.
짜장면 둘.
서로 나눠 먹어가며 맛을 보았다.
그리고는 다들 말 대신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눈빛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비교 평가 끝!
다시 말해 게임 종료!
호텔로 돌아온 윤지영이 계속해서 핸드폰으로 시간만 확인하다 11시가 되어가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영이니? 잘 지내고 있지?”
-오빠, 마감했지?
“가게 정리 중이다. 어디냐? 호텔이야?”
-응, 마감 시간 기다리고 있었어. 오늘 여기 한인타운에서 제일 인기 있는 중식당에 가봤는데…. 이건 게임 아웃이야.
“무슨 말이야?”
-우리 서인우 셰프가 와주기만 한다면 여기 베트남에 있는 교민들과 현지인들 입맛 모두 확 다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어.
“원래 팔은 안으로 ….”
-나 유연해서 밖으로도 잘 굽거든! 답사 종료. 우리 [서풍] 여기 들어오기만 하면 다른 중식당은 다 죽었어!
윤지영의 흥분된 목소리가 핸드폰 밖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