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미스터 탄의 강력한 어조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베트남에서 가게를 열려면 반드시 이쪽 현지 업체랑 일해야 한다는 말씀인 건가요?”
“그렇솜니다. 여기 소방서와 뭔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면 더 좋고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고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아는 인테리어 업자가 있솝니다. 그 사람을 통하면 훨씬 안존하고 쉽게 해결헐 수 있솝니다.”
“그 문제는 저희 대표님하고 좀 더 의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상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미스터 탄이 한마디 덧붙였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솝니다. 그 업자가 워낙 실력이 좋아서, 아주 바빠요. 일이 많솝니다.”
“네,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현주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오늘은 다들 푹 쉬고 내일 일정대로 움직이도록 합시다.”
윤지영이 일정표를 보이며 물었다.
“아침 식사 시간 8시 맞죠?”
“네, 내일 저녁은 호치민 시에서 가장 인기 많은 중화요리 집으로 예약해놨습니다. 한국분이 하시는 곳이니까 확실히 비교되겠죠?”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뵙겠습니다. 미스터 탄 오늘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미스터 탄이 돌아가자 안상훈이 윤지영과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룸에 안 들어가세요?”
“저희는 벤탄 야시장에 가보려고요. 같이 안 가실래요?”
“어머, 나 야시장 너무 좋아하는데. 여행 가서 야시장을 가야 그 나라 문화를 제대로 느끼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나도 가려고 검색해보고 왔는데….”
“잘됐네요. 그러면 오진수 씨는 어떻게 하실래요?”
“저는 지난번에 갔었습니다. 오늘은 몸살 기운이 있어서 내일을 위해 일찍 약 먹고 자야겠어요.”
“어쩐지 좀 피곤해 보이신다 했어요. 그럼 들어가서 푹 쉬세요.”
오진수를 제외하고 셋이 택시를 타고 유명한 벤탄 시장으로 향했다.
입구부터 북적북적 사람도 많고, 베트남 만의 풍경인 오토바이도 많았다.
심지어 엄마, 아빠, 아이. 그렇게 온 가족이 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 모자 너무 이쁘지 않아요?”
유현주가 베트남 전통 모자를 하나 들어 써보고는 흥분하며 바로 계산을 하려 했다.
“유 팀장님. 제가 오기 전에 조사해본 결과 여기서 부르는 가격의 무조건 삼 분의 일로 깎으라고 하더라고요.”
“정말요? 이 가격도 많이 싼 것 같은데?”
“여기 물가가 워낙 싸서 다들 싸게 샀다고 좋아하다가 나중에 가격 알고는 분노한다고 하더라고요.”
해물을 파는 곳도 있고, 각종 채소를 파는 곳도 보였다.
야시장답게 여기저기 식당 밖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맥주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내일 아침 시장에서 쌀국수 먹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요. 우리 지금 한 그릇 먹는 거 어때요?”
“좋아요. 베트남 쌀국수는 길거리 어디에서 먹어도 맛있다고 하던데….”
허름한 가게 밖에 앉아 손짓·발짓해가며 쌀국수를 시켰다.
라임과 고추, 채소가 담긴 접시를 먼저 내려놓은 아주머니가 잠시 후 연기가 펄펄 나는 쌀국수를 가져다주었다.
진한 이국의 향이 느껴지는 쌀국수 국물을 쭉 들이켜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윤지영은 향이 강한 쌀국수를 먹고 나니 하루 만에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저 가방가게 구경할까요? 선물도 살 겸.”
쇼핑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안상훈도 선물이라는 말에 흔쾌히 따라나섰다.
“이거 진짜 소가죽인데, 한국 돈으로 이만 원 정도면 너무 싼 거 아니에요? 진짜 이쁘다.”
“우리 와이프 하나 사주게 좀 골라주세요.”
안상훈이 쑥스러운 듯 가방을 몇 개 손에 들고 살피고 있었다.
안상훈은 아내와 딸 선물을, 윤지영은 [서풍 만두] 직원들 선물을, 그리고 유현주는 전 직원을 줄 생각인지 가방을 열 개도 넘게 샀다.
“우리 저기 가봐요. 내가 또 직업정신이 딱 발휘되네.”
튀긴 듯한 만두가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가게 앞에 발길이 멈춘 윤지영이 안상훈과 유현주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거 먹어보자는 얘기죠?”
“네, 이건 철저하게 직업정신입니다. 절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할 거면 침이나 삼키지 말지.
연신 꼴깍꼴깍 침을 삼키며 윤지영이 동그란 모양의 튀긴 만두를 시켰다.
만두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윤지영이 계속 옆 사람이 마시고 있는 초록 병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나 시킬까요?”
“저게 베트남 맥주인 거죠? 나 너무 궁금한데….”
결국 SAIGON이라 적혀있는 베트남 맥주를 시켜 시원하게 들이켰다.
특이한 속으로 꽉 찬 튀긴 만두에 맥주까지 마시며 베트남 야시장을 만끽했다.
“내일은 새벽시장에 가볼 생각입니다. 해물과 채소 상태와 가격 등 알아볼 게 많아서요.”
“여기 시장도 새벽 4시 정도부터 문을 연다고 들었어요.”
“네, 우리 대표님이 한국에서 새벽시장 나가시는 시간입니다. 이곳에서는 제가 대신해서 최대한 알아보려 합니다.”
야시장에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던 안상훈의 노트가 내일은 더 꽉 채워질 것 같았다.
* * *
가게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안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셰프님. 지금 통화 괜찮으신가요? 여기가 11시니까 거기는 9시쯤 됐겠네요?”
“네, 여기서 가장 크고 유명하다는 벤탄 야시장에 왔습니다.”
“그곳 현지 문화를 제대로 경험하고 계시겠네요. 많이 보고 오세요. 그럼 내일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서인우는 안상훈이 통화하기 편하지 않은 상태일 듯 느껴져 전화를 끊으려 했다.
“사장님, 인테리어 문제 때문에 전화하신 거죠?”
“그것도 궁금해서 전화하긴 했는데, 내일 조용한 곳에서 통화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번 3박 4일 일정 중에 결정해야 할 것이 있어서 지금 통화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번 일정에 결정해야 할 거라면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안상훈이 장소를 옮겼는지, 주변의 소음이 확연히 작아졌다.
“오늘 가이드한테 인테리어 건에 관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여기 가이드 말에 의하면 소방법 통과가 쉬운 일이 아닌데, 아는 인테리어 업자가 여기 소방서랑 관계가 좋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 업체와 인테리어를 하면 식품 안전 조건 적합 증명서(Certificate of Fulfillment of Food Safety Conditions)도 쉽게 받아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현지 상황을 잘 아시는 분의 도움을 받는 게 현명한 일이겠죠. 알겠습니다. 저도 며칠 더 알아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안상훈의 대답이 선뜻 넘어오지 않았다.
“안 셰프님. 듣고 계세요?”
“네, 그게…. 그 업체가 인기가 워낙 많아서 우리 일을 흔쾌히 해줄지 모르겠다고 하네요.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예약이라도 해놔야 한다는 뉘앙스였습니다.”
“안 셰프님 생각은요?”
“사장님이 허락하시면 내일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여기 답사팀이 그 업체 사장과 미팅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요.”“그렇네요. 제가 갔어야 했는데, 안 셰프님 부담이 커져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정말 공부 많이 되고 있습니다. 내일 저녁에 여기 현지 교민들 사이에 제일 인기 많은 중식당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다녀와서 또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전화 통화는 끝났다.
통화하는 내내 안상훈은 평상시보다 훨씬 많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말이 없는 안상훈이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얘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일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일 거다.
서인우는 핸드폰에 저장된 박정원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췄다.
벌써 11시를 넘긴 늦은 시간이라는 걸 인지한 서인우는 아쉽지만, 다음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 *
H백화점 중식당 입점을 결정한 김원상은 오랜만에 [만가복] 마포점을 찾았다.
“점장님, 아니 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승연 홀 매니저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버지 김형식 대신 회장직을 맡은 후 정말 오랜만에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차은석과 김지호, 그리고 새로 들어온 보조 셰프들까지 일제히 나와 인사를 했다.
“다들 잘 지냈습니까?”
“네, 여기는 꾸준히 손님도 많아서 저희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차은석은 별말이 없었다.
“그럼 다들 수고해 주시고, 차은석 셰프는 나 좀 봅시다.”
일부러 오후 브레이크 타임에 들른 김원상은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차은석이 내온 차를 마시고 있었다.
“회장님.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여전히 나를 보는 눈빛이 곱지 않군.”
“그럴 리가 있습니까? 회장님이신데요.”
차은석은 어떤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종일 음식 만들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 교육하고 하느라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봅니다.”
“이제 김지호 셰프가 꽤 요리해내지 않나? 그럴 때가 된 것 같은데.”
“네, [만가복]의 모든 메뉴를 혼자 해낼 수 있을 만큼 많이 성장했습니다.”
“다 능력 있는 사수를 만나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차은석이 김원상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지금까지 겪어본 김원상이라는 사람은 절대 남의 칭찬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누군가를 칭찬한다면 그건 뭔가 얻어내야 할 게 있을 때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김원상이라는 사람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린 차은석은 대화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열심히 지도 하겠습니다. 내가 없어도 [만가복]을 끌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까요. 듣자 하니 김지호 셰프도 지금 이미 그런 능력까지 온 것 같던데….”
대화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차은석이 순간 미간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제 본론을 말하려고 했어요. 성격이 더 급해졌나?”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웃는 김원상의 얼굴에 순간 김형식의 비릿한 웃음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차은석이 기분 나쁜 표정을 애써 숨기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회장님 아니십니까? 이렇게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말입니다.”
“그래도 한솥밥이 몇 년인데, 그렇게 선을 그어놓으면 섭섭하지. 하여튼 내가 오늘 찾아온 이유는 이제 [만가복] 마포점은 김지호 셰프한테 맡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김지호 셰프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여기를 끌고 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작년에 새로 들어온 직원들도 알아서 잘해내고 있고 말입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차은석이 김원상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 저는 여기를 그만두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여기 일을 정리하고 새로 맡아줘야 할 일이 있어서요.”
“새로 맡아줘야 한다면…. 새로운 지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우리 [만가복]이 H 백화점에 입점하기로 했습니다.”
“H 백화점이라고요?”
차은석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놀라움과 동시에 화가 난듯한 목소리였다.
“백화점 측에서 정중하게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우리야 뭐 아쉬울 게 없지만….”
“그런데요? 아쉬울 게 없는데 그 제안을 받아들이신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원상이 엄지손톱 끝으로 눈썹을 긁적였다.
“그 백화점 이미지와 우리 [만가복]이 어쩐지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할 수 있으면 나쁠 것도 없고 해서 말입니다.”
“그게 이유 확실합니까?”
차은석의 질문에 김원상의 미간에 살며시 주름이 잡혔다.
“무슨 말이에요? 차셰프?”
“[서풍] 때문에 그렇게 결정하신 게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김원상과 차은석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