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강진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짧게 한숨을 내쉰 서인우가 소스를 작은 접시에 덜었다.
“이거 맛을 한 번 보세요. 지금까지 강진수 씨가 맛봤던 칠리 새우 소스가 맞는지 확인해 보라는 말입니다.”
소스를 입에 넣은 강진수가 시큼한 맛에 눈을 살짝 감았다.
“분명히 이 맛이 맞습니까?”
“죄송합니다. 식초량을 착각했나 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사람은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왜 [서풍]의 맛이 아닌 음식을 내놨냐는 겁니다. 강진수 씨라면 분명 맛봤을 때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워낙 바쁜 상황이라서 제가 실수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마침 음식을 가지러 들어온 정다운이 놀란 눈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정다운 매니저. 지금 1번 룸에 가서 서비스 음료 내드리고, 칠리 새우 다시 만들어 올린다고 전하세요.”
대충 상황이 짐작된 정다운이 여러 가지 음료수를 준비해 룸으로 들어갔다.
“이 음료는 사장님이 칠리 새우가 잘못 만들어져서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드시고 계시는 칠리 새우는 다시 해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왜요? 신맛이 좀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맛있었어요.”
“이건 [서풍]의 맛이 아니라서요. 곧 다시 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후 서인우가 완성한 칠리 새우를 들고 다시 룸으로 들어왔다.
“칠리 새우 다시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테이블에 새로 올려진 칠리 새우를 앞접시에 덜어 한 입 베어 문 조금 전 맛있었다는 손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머 이 감칠맛이 완전 다른 요리였네. 이런 [서풍]의 맛을 모르고 갈뻔했네요. 감사합니다.”
주방으로 급히 돌아온 서인우가 풀이 죽어 눈치만 보고 있는 강진수의 어깨에 지긋이 손을 올렸다.
-저 친구 완전 기가 죽었네. 그동안 잘한다고 칭찬만 받다가 충격이 클 거야.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대충 넘어가는 거 난 절대 봐줄 수 없어.’
-그래도 잘 달래줘라. 저 큰 놈이 곧 울겄다.
서인우가 어깨에 올린 손을 살며시 누르며 가볍게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맛이 다르면 그건 [서풍]이 아닌 거야. 네가 만들어 낸 요리는 네 작품이라고 생각해. 절대 대충은 없어. 알았지?”
“네,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실수 없을 겁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믿어. 자! 다 같이 파이팅합시다.”
-아주 바람직한 전개야. 저 봐라, 짜식 진짜 울겄다.
뽀얀 국물에 야들야들한 게살이 먹음직스럽게 담긴 게살스프를 여섯 개의 그릇에 옮겨 닮았다.
띵!
게살 스프가 나간 뒤 곧장 다음 코스인 유산슬을 만들 준비를 했다.
유산슬의 '류[溜]'는 '녹말을 끼얹어 걸쭉해진 것'을 말하고, '산[三]'은 '세 가지 재료'를 뜻하는 거였다.
그리고 '슬[絲]'은 중식 칼질의 기본인 '가늘게 썰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육류와 해산물을 가늘게 채를 썰어 볶은 후 걸쭉하게 만드는 것이 유산슬이다.
고기, 채소, 해산물의 짭짤한 조화가 맛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해삼, 표고, 죽순과 새우, 돼지고기 그리고 팽이버섯, 부추가 지금 바로 요리를 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강진수, 유산슬 만들어 볼까? 지난번에 했던 모양과 맛 잘 기억하도록 하고.”
“네, 셰프.”
다행히 금세 미소를 찾은 강진수가 전분과 흰자에 버무린 고기와 새우를 넉넉한 기름에 튀기듯이 볶아 내놓았다.
그리고는 바로 기름을 두른 팬에 대파, 마늘, 생강을 넣어서 볶다가 청주, 간장을 넣어서 향을 내기 시작했다.
데친 해삼, 표고, 죽순에 새우, 고기, 팽이버섯, 부추를 넣어서 볶은 다음 굴 소스로 간을 보고 닭 육수를 부었다.
끓기 시작하자 서인우가 물 전분을 넣어 걸쭉하게 만들고 마지막에 참기름을 휙 둘렀다.
작은 접시에 덜어 강진수에게 건넨 서인우가 맛을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어때?”
“소금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얼마나?”
“반 스푼 정도입니다.”
서인우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자 평상시의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한 강진수가 소금을 추가했다.
그리고 다시 덜어 간을 본 후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간 채 서인우에게 작은 접시를 디밀었다.
“평가해 주십시오.”
“이미 향은 합격이고, 맛은….”
작은 접시에 담긴 유산슬을 조금 집어 입에 넣어 잠시 음미한 서인우가 여섯 개의 작은 그릇을 준비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옮겨 담고 다음 코스 준비해야지.”
“네! 셰프!”
어찌나 큰 소리로 답을 했는지, 홀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직원들이 주방이 궁금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얼추 저녁 주문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김서원이 조심스럽게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다운 씨. 잘 지냈어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사장님이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셔서요. 지금이 조금 한가한 시간이라고 해서 왔는데, 맞나요?”
“네, 사장님 모셔 올게요.”
“고마워요. 그런데, 다운 씨.”
“네?”
몸을 돌리던 정다운이 다시 김서원 앞에 멈춰 섰다.
“요즘 뭐 좋은 일 있어요?”
“아니요. 뭐 특별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왜요?”
“얼굴이 완전히 피었잖아. 너무 예뻐지는 거 아니에요? 그냥 있어도 이쁜 나이인데, 정말 봄꽃처럼 화사한 게…혹시 남자친구라고 생긴 거 아닌가?”
“네? 몰라요.”
수줍은 듯 주방으로 달려가는 정다운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김서원이 서인우의 등장에 바로 미소를 집어넣었다.
일 년이 지났지만, 아직 죄인이라는 미안한 마음을 숨기기는 어려웠다.
가슴 아파도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끊어보려고도 했지만, 감사하게 서인우와 윤지영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지금 김서원은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일로나마 보답하려는 생각에 인테리어 현장에 종일 살다시피 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네. 현장에서 인부들하고 같이 먹고 왔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상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심정을 서로 이해한다는 듯 정다운이 가져다준 녹차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아?
뭐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던 사람이 눈도 못 마주치고 있는 건데?
서인우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는 한편, 가슴 한쪽이 아리는 것 같았다.
김서원을 볼 때마다 답답하고 쓰리쓰리한 가슴이 무엇 때문인지 서인우는 알지 못했다.
“혹시 지영이한테 우리가 MS 백화점 해외사업에 동참하기로 했다는 얘기 들었어요?”
“아니요, 최근에 언니가 새로 오픈한 매장 때문에 바쁜 것 같아서 한참 못 봤어요.”
“지금 지영이 안셰프님이랑 같이 베트남에 현지답사 갔습니다.”
“베트남이요?”
김서원이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 백화점이 베트남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같이 입점할 업체들 속에 우리 [서풍]도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아서 수락한 상태입니다.”
“정말요? 너무 잘됐다. 정말 축하해요. 사업이 커지는 거니까 축하할 일 맞죠?”
축하하는 김서원의 눈이 이상하리만큼 슬퍼 보였다.
‘죄인이라도 이렇게 가끔 얼굴 보면 좋았는데…. 이제 그것도 힘들게 됐네.’
김서원은 자기도 모르게 드는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김서원씨?”
“아!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그러면, 여기는 안상훈 셰프님이 맡아서 하시는 건가요?”
“네, 그래서 오늘 뵙자고 했습니다.”
‘벌써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가슴 한쪽에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허전한 마음을 한숨으로 대신한 김서원이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놀러 갈게요.”
“거기도 인테리어를 …. 네?”
둘이 동시에 말을 하면서 오디오가 겹쳐버렸다.
서인우가 김서원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별, 별말 아니었어요. 방금 뭐라고 하신 건지….”
잠시 웃어 보인 서인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베트남 백화점 [서풍]도 여기와 똑같은 컨셉으로 하고 싶어서요. 혹시 그곳 인테리어도 의뢰하면 가능한지 의논하고 싶어서 오늘 보자고 했습니다.”
“베트남뿐 아니라 오지라도 [서풍]이 문을 연다면 얼마든지요. 하하.”
계속 어색한 웃음을 웃는 김서원이 재밌게 느껴진 서인우도 이유 없는 웃음을 따라 웃었다.
“그러면 오케이 한 겁니다.”
“네. 일정만 잡히면 알려주세요.”
“둘이 답사갔다가 돌아오면 미팅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릴게요.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네. 그리고, 제시카 씨.”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김서원이 그대로 고개를 돌려 일어서는 서인우를 쳐다봤다.
“다음에는 식사하지 말고 오셔서 전처럼 맛있게 [서풍] 음식 드셔 주세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김서원이 돌아가고 서인우는 직원들과 부지런히 가게 뒷정리 및 청소를 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사장님.”
하나둘 인사하며 주방을 나서는데, 강진수가 쭈뼛쭈뼛 뒷머리만 긁적이며 서 있었다.
“안가고 뭐해?”
“오늘 일 정말 반성 많이 했습니다. 사실 그 정도 실수는 티 나지 않을 거라는 건방진 생각에 하마터면 [서풍] 이름에 먹칠을 할 뻔했습니다.”
“[서풍] 3호점 내고 싶다면서?”
“네,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스스로 편해질 수 있는 핑곗거리를 만들지 마. 손님들 입맛에 맛이 없다면 그 어떤 핑계도 용납되지 않는 거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네! 셰프!”
“목소리 좀 작게 하고. 매장이 울리네! 울려. 얼른 퇴근해서 쉬고.”
강진수가 씩 웃어 보였다.
“저 집에 가서도 안 쉽니다. 계속 소스 연습해요. 사장님 말씀대로 열 번을 해도, 아니 백번을 만들어도 똑같은 맛이 날 수 있게. 내 몸이 기억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래, 강진수 네가 경력이 짧은데도 이런 중요한 역할을 맡게 해준 건 다 네 뛰어난 감각과 성실함을 알기 때문이야. 그러니, 몇 배로 더 노력하라고.”
“네. 셰프!”
“시끄러워. 빨리 꺼져.”
실실 웃으며 주방을 나가는 강진수를 매장 한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정다운이 오랜만에 만난 애인처럼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강진수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정다운에게 고개를 옆으로 픽 눕혀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했다.
정다운이 까치발을 하며 강진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다시 둘이 뭐라 떠들더니 헤헤거리며 매장을 빠져나갔다.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서인우에게 중식도의 소리가 들려왔다.
-난 이 고요함이 좋다가도 싫다.
“응?”
-너와 차분히 대화하는 시간이라 좋은데, 갑자기 훅 사람들 소리가 사라진 지금 외로움이 옆구리를 타고 들어온단 말이야.
“사부!”
-그렇다고 진지한 말투 사절이다. 난 밝고 가벼운 게 좋거든.
“내가 자리를 비워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저들을 믿기로 맘먹어서 채용한 거잖아? 그럼 끝까지 믿어줘야지. 그리고, 우리의 고독한 안 셰프가 있잖아.
서인우는 안상훈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짧은 회상에 젖었다.
“말도 없고 눈도 잘 못 맞추던 안 셰프님이었는데…. 지금 언어도 안 통하는 그곳에서 잘하고 있을까?”
-인우야! 베트남까지 텔레파시가 통하나 보다.
“응? 뭐라고?”
순간 서인우의 핸드폰이 몸을 흔들어댔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은 다름 아닌 안상훈 셰프였다.
“대박! 사부 소름!”
-다 아는 사실에 놀라기는.
서인우가 반가운 마음을 듬뿍 담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 셰프님. 별일 없으시죠?”
-사장님.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네? 무슨….”
서인우는 평상시보다 더 진지한 안상훈의 목소리를 들으며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이어지는 얘기를 차분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