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무려 다섯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베트남 호치민 공항.
MS 백화점이라고 크게 써서 들고 있는 현지 가이드 후인퀑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 유현주가 손을 흔들었다.
“저기 저분이 우리 가이드 맞아요?”
답사 팀 중에 유일하게 가이드와 안면이 있는 오진수가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맞아요, 맞아.”
키가 작고 동그란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동남아 어딘가 사람이라는 느낌이 바로 오는 얼굴이었다.
“안뇽하세요. 후인퀑탄입니다. 엠에쓰 백화좀에서 오신 분들 맞으시죠?”
특유의 강한 영어발음으로 MS를 콕 찍어 말하면서 답사팀 얼굴을 하나하나 보던 후인퀑탄이 오진수를 발견하고는 반갑다고 바로 팔을 벌려 안았다.
그런 인사에 익숙하지 않은 오진수가 엉덩이를 뒤로 빼고 어색한 듯 팔을 올려 안았다.
“이분은 우리 백화점 마케팅부 유현주 팀장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후인퀑탄입니다.”
오진수가 안상훈과 윤지영을 가리켰다.
“이 두 분은 우리 백화점에 입점할 중식당 [서풍] 답사팀입니다.”
“안상훈입니다.”
“신짜오, 윤지영입니다.”
센스 있게 베트남어 인사를 준비한 윤지영을 향해 함박웃음을 보인 후인퀑탄이 한 톤 올라간 억양으로 인사했다.
“다들 환용합니다. 요러분 베트남에 계시는 동안 푠안하게 일 볼 수 있도록 채선을 다하겟솜니다. 앞으로 푠하게 미스터 탄으로 불러주세요.”
다들 이름이 어려워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지 바로 가이드의 이름을 불렀다.
“네, 미스터 탄. 잘 부탁드려요.”
유현주가 비행기에서 전달해 준 일정표를 다시 꺼내 보였다.
“우선 숙소에 체크인하고 점심부터 먹도록 하죠. 그리고, 백화점부터 돌아보도록 합시다.”
미스터 탄이 그들을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까만 벤 트렁크에 짐을 옮긴 후 호텔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안상훈은 연신 노트를 펼쳐보았다.
“안 셰프님. 근처 호텔과 백화점 중식당에 가보고 싶으시다고 하셨죠?”
“네, 아무래도 현지 중식당을 둘러봐야 우리도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백화점 가까이에 베트남 최고 럭셔리 백화점이 있어요. 그곳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도록 합시다.”
미스터 탄이 빠르게 말을 섞었다.
“그로면 묜저 호텔로 모시겠솜니다.”
가장 번화한 곳 중심에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 MS 백화점, 그곳에서 가까운 호텔에서 3박 4일 일정이 이제 시작된다.
윤지영은 계속해서 창문을 통해 베트남 거리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윤지영 사장님. 직접 와보시니까 어때요?”
유현주가 윤지영이 보는 창밖을 같이 내다보며 물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요, 이맘때쯤 캐나다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여기 베트남에 와있네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그렇죠, 그게 인생이죠. 나도 베트남에 출장 올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흥분되고 재미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다 알면 재미없잖아요? 안 그래요?”
백화점 답사 팀의 오진수도 안상훈도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감정일 거였다.
화려하고 높은 호텔 앞에 차가 도착했다.
능숙하게 차를 주차한 미스터 탄이 그들을 도와 체크인을 마쳤다.
“잠시 짐만 올려놓고 다시 로비에서 보도록 합시다. 음…,지금 시간이 거의 2시니까 30분 후에 로비에서 만나요. 괜찮으시죠?”
“네, 조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시간을 들으니까 갑자기 배가 고프네요.”
미스터 탄이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러면 2시 30분까지 요기에서 대기하고 있겠솜니다. 제 전화번호는 오징수씨가 알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솜니까?”
오진수가 출발 전에 받아 입력해놓은 번호를 꾹 눌렀다.
미스터 탄이 눈으로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자기 핸드폰을 가리켰다.
“이 본호가 오징수씨 연락처입니까?”
“네. 다른 분들은 저랑 함께 있을 테니 이 번호로 연락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께이. 그러면 이따 봐겠습니다.”
“네, 바로 나오겠습니다.”
미스터 탄의 어설픈 한국 발음을 듣고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유현주와 윤지영이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옆방은 바로 안상훈과 오진수가 이용하기로 했다.
각자 시원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로비로 모였다.
“우선 우리 백화점부터 빨리 구경시켜 드리고 싶지만, 원래 너무 허기지면 좋은 걸 봐도 제대로 못 느끼는 법이죠. 그러니 당연히….”
“밥부터 먹어야겠죠?”
윤지영이 재빨리 대답했다.
눈치 빠른 미스터 탄이 바로 차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면 빠리 타세요. 출발합시다.”
“네. 과연 베트남 최고의 럭셔리 백화점은 어떨지, 또 거기에 입점해 있는 중식당의 음식 맛은 어떨지 기대되네요.”
호텔에서 채 10분도 가지 않아 도착한 베트남 최고의 럭셔리 백화점.
로비에 들어서자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테리어의 카페가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정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카페와 고급스러운 골드 톤에 마치 공주가 살 것 같은 궁처럼 꾸며 놓은 카페 등이 네 명의 시선을 홀딱 뺏어버렸다.
“여기 뭐예요? 어떻게 백화점 1층에 이런 인테리어가 가능하죠? 확실히 우리나라와는 느낌이 다르네요. 이국적이야.”
윤지영의 반응에 유현주 또한 벌린 입을 간신히 다물며 말을 더했다.
“오 과장님. 우리 백화점도 이 정도 수준으로 준비하고 있는 거 맞죠? 이거 괜히 경쟁심 생기네.”
“유 팀장님. 점심 먹고 우리 백화점 가보시면 또 깜짝 놀라실 겁니다. 물론 아직 내부 인테리어가 완성되기 전이지만, 나도 지난번에 와서 보고 놀랐다니까요.”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안상훈이 조금 전부터 계속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듯 보였다.
“안 셰프님. 뭐 찾으세요?”
“밖에서 보니까 여기는 우리나라처럼 백화점이 길쭉하지 않고 좀 특이하네요? 그러면 식당들은 몇 층에 있나요?”
“서울에 우리 백화점처럼 9층이나 10층을 찾고 계셨나 보네요. 여기는 4층이 식당가에요.”
“하긴 백화점마다 건물 층수는 다 제각각이니까요. 빨리 가보죠. 궁금해 죽겠네.”
윤지영이 궁금한 건지 배고픈 건지 사람들을 재촉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4층에는 베트남 식당부터 시작해 한식, 일식, 중식 그리고 양식까지 종류는 한국 백화점과 다를 게 없었다.
“저기 한국 고깃집도 있고, 이런 백화점에 분식집도 있네요?”
“여기는 현지인들이 하는 식당들이 많아서 완전 똑같은 맛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들었어요.”
식당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다 모두의 발이 동시에 멈췄다.
입구에 다가가지 않아도 익숙한 향에 저절로 끌려간 식당.
바로 중식당이었다.
“여기는 중국 화교가 셰프로 있어서 아주 유명합니다. 맛도 끝내좁니다.”
“아! 진짜 궁금하네. 빨리 들어가 봐요.”
입구에서부터 골드 장식이 눈에 띄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붉은 홍등을 연상케 하는 조명 장식이 한눈에 중식당임을 알게 해주었다.
촌스럽지 않은 홍등 모양의 조명과 진회색의 가죽 의자, 그리고 대리석 느낌의 테이블이 적절히 섞여 고급스러운 느낌을 선사했다.
“여기 너무 분위기 있다. 음식 냄새도 맛있게 나고.”
유현주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을 때, 직원이 다가와 테이블을 안내했다.
물론 네 명 모두 가이드를 해주는 미스터 탄만 맹목적으로 쳐다봤다.
영어라면 띄엄띄엄 알아듣기라도 할 텐데, 이건 완전 외계어였다.
“운이 좋솝니다. 창가 자리가 방금 비어서 앉을 수 있다고 홉니다.”
“잘됐네요. 뷰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다들 분위기를 살피고 흥분해 있는 속에서 안상훈 혼자 노트에 뭔가를 계속 적고 심지어 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다.
서인우를 대신해 왔다는 책임감이 그를 한시도 쉬지 못하게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메뉴판을 보고 있던 윤지영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났다.
“빨리 골라십시오. 배고파 죽습니다.”
미스터 탄의 말에 다들 참고 있던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다들 먹고 싶은 거 하나씩 골라봐요.”
오진수가 제안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림만 볼 수 있을 뿐 메뉴 이름은 아무도 읽지 못했다.
다행히 간단한 영어로 표기된 걸 보며 미스터 탄의 도움을 받아 넷이 하나씩 고른 요리와 식사 메뉴인 면 요리 한 개, 만두 하나, 볶음밥 하나, 마파두부 하나를 시켰다.
“우리 너무 많이 시킨 거 아닌가요?”
“배고프니까 골고루 많이 먹죠. 뭐.”
잠시 후 차가운 요리라는 설명과 함께 처음 보는 요리가 나왔다.
코스요리로 말하면 냉채에 해당하는 요리인 듯 했다.
“안 셰프님. 이런 요리가 우리 가게에도 있나요?”
윤지영이 신기한 듯 요리를 보며 물었다.
“이건 중국 현지 요리입니다. 저도 먹어보지는 않았는데, 중국 요리 공부하면서 본 적은 있습니다.”
마치 넓적 당면처럼 생긴 야들야들한 면과 오이 등 채를 썬 채소에 땅콩 소스와 시큼한 소스가 함께 뿌려져 있었다.
“먹어볼까요?”
유현주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익숙하지 않은 시큼한 향에 선뜻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가리는 음식 없이 뭐든 잘 먹는 윤지영이 먼저 젓가락을 들어 앞접시에 덜어 입에 넣었다.
“이거 떡볶이에 넣는 넓적 당면 같은 식감인데, 소스가 특이해요. 나는 맛있는데, 다들 먹어봐요.”
윤지영의 말에 용기를 내 하나씩 음식을 덜어가고 있는데, 다음 음식이 동시에 나왔다.
쇠고기와 콩 껍질을 볶은 듯한 요리가 뜨거운 철판에 올려 나오고 바로 마치 [서풍]의 칠리 새우와 비슷한 새우요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가리비에 가는 당면이 올라가 있는 요리가 이어 나왔다.
“이 새우는 [서풍]이랑 비슷하니까 비교가 되겠네요.”
직원이 마파두부와 만두를 들고나오자 윤지영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이건 딤섬이 아니라 만두인 거죠?”
미스터 탄을 보고 묻자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이건 만두입니다. 속에 고기, 새우, 보솟 그런 게 들어가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보솟? 아! 버섯! 그럼 내가 먼저 먹어볼게요. 이건 철저한 직업정신으로다가.”
만두를 앞접시로 가져가 반을 잘라 속을 꼼꼼하게 살핀 윤지영이 반쪽을 바로 입에 넣었다.
“흐음. 맛있다. 역시 만두는 중국이네요. 다들 먹어보세요.”
안상훈은 모든 요리를 먹고 그 맛과 재료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특히 서풍과 비슷한 메뉴인 새우요리와 마파두부가 나왔을 때는 마치 해부학 실습을 나온 의대생같이 자세하게 살폈다.
마지막으로 면과 밥이 나왔다.
라면보다 가느다란 갈색을 띠는 면이 고기, 채소 등과 볶아서 나온 볶음면이었다.
볶음밥이 가장 비슷할 거로 생각했던 모두에게 반전을 안겨 주었다.
흔히 먹는 각종 다진 채소나 새우가 들어간 볶음밥이 아닌 양상추와 달걀이 들어간 담백한 볶음밥이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모두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낯선 음식도 있었지만, 익숙하지만 어딘가 다른 음식도 있었다.
식사 시간 내내 진지하게 맛을 보고 꼼꼼하게 사진도 찍고 기록한 안상훈의 얼굴이 이제야 조금 편해 보였다.
“우리 들어올 때 봤던 예쁜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음식평을 해 볼까요?”
유현주의 제안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안상훈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네, 안 셰프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여기 주방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같은 중식을 하는 곳이라 주방 구조가 궁금해서요.”
유현주와 오진수가 가이드 미스터 탄을 쳐다보자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식당 직원에게 다가갔다.
둘이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직원이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다시 미스터 탄에게 뭐라 말을 건네는 듯 보였다.
“주방 내부는 보여 주는 거 안 돼요. 안에서 일하는 셰프들이 싫어한다고 홉니다.”
“아!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입구를 막 나서려 할 때였다.
셰프 복을 차려입은 건장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