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오상준이 안상훈의 칠리소스 꽃을 한 번 더 유심히 보더니 바로 오른손을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손끝의 움직임에 따라 화려한 꽃이 조금씩 완성되어 갔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나머지 강진수와 차민정, 김현수도 부지런히 꽃을 그려나갔다.
오상준이 완성한 칠리소스 꽃을 보던 서인우와 나머지 직원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뭡니까? 과학 전공이라더니 미술도 전공입니까? 보통 수학, 과학 잘하는 사람들이 국어나 미술, 음악 뭐 요런 거는 잘 못 하지 않나?”
강진수가 괜히 심통이 난 듯 투덜거렸다.
서인우 뿐 아니라 안상훈도 오상준이 그려 낸 꽃을 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복사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안상훈의 꽃을 완벽히 재연해놓았다.
“오상준 씨. 또 이런 매력이 있네요. 그럼 다른 분들 솜씨도 한 번 볼까요?”
연신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 강진수의 접시를 보는 순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박장대소를 했다.
커다란 동그라미 위에 꽃잎인 듯 보이는 세 개의 작은 동그라미.
얼핏 보면 곰돌이 얼굴 같기도 하고, 강아지 얼굴 같기도 한 강진수의 칠리소스 꽃.
한바탕 웃음을 웃고 나자 강진수가 한마디 했다.
“이래서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저 형님은 과학 수재였다는 분이 그림까지 잘 그리면 어쩌라는 겁니까?”
“강진수. 그게 화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몰라요. 그냥 열받아서….”
“각자 잘하는 분야가 있는 거지. 강진수씨는 요리에 타고 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번 백짬뽕 육수 비결도 강진수씨만 알아냈으니까요.”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강진수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슬쩍 자리 잡았다.
“그럼 앞으로 치즈 치킨밥의 칠리소스 꽃은 오상준씨가 마무리해 주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자, 그럼 시식해 볼까요?”
서인우가 앞접시를 나누어주며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쳤다.
“나까지 여섯 명이 만든 여섯 개의 치즈 치킨밥이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중 가장 맛있는 서풍의 맛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대로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야 당연히 사장님이 만드신 거죠.”
“누구든 똑같은 레시피로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으면 그게 서풍의 치즈 치킨밥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목표는 여기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거니까요.”
각자 시키지 않아도 만들어 놓은 치즈 치킨밥을 서로 시식해 보고 비교 평가했다.
다들 서인우가 만든 치즈 치킨밥을 먹으며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밥의 질감부터 볶은 닭고기의 고소함, 소스의 풍부함이 달랐다.
“역시 게임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이 맛 잘 기억해서 똑같이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간 5년차 차민정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이 아닌 서로 문제점을 찾아주고 보완해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어서인지 주방에 유독 활기가 넘쳐흘렀다.
오늘의 첫 주문이 들어왔다.
삼선볶음밥과 어향육슬(위샹로우쓰).
어향육슬을 만들기 위해 서인우가 먼저 소스를 준비했다.
맛술과 설탕, 식초, 후추를 넣고 색을 내기 위해 굴소스를 조금 넣었다.
전분물을 약간 넣고 나서 가장 중요한 두반장을 넣어 소스를 만들어 놓았다.
샥샥샥.
착착착.
순식간에 파, 당근, 죽순 그리고 목이버섯, 샐러리를 채 썰어 놓고, 돼지고기를 편으로 얇게 저민 후 뚝딱 채를 썰어 준비했다.
웍에 고추기름을 넣고 다진 마늘과 채썬 파를 넣은 다음 고기를 집어넣어 볶으며 간을 했다.
바로 이어 나머지 채썬 재료들을 넣어 동시에 휘리릭 잘 섞은 후에 준비해 둔 소스를 부어 볶아내자 맛있는 향이 가득했다.
띵!
완성된 요리가 나가자마자 또다시 새로운 주문이 들어왔다.
오늘도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주방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던 서인우의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날아 들어왔다.
[내부 회의 결과 서풍 만두와 서풍 새우면, 그리고 서풍 TWO 모두 베트남 백화점에 입점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음을 알립니다. 이른 시일 안에 미팅 날짜 잡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케팅부 팀장 유현주.]
* * *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 준 김서원 덕분에 예정대로 [서풍 만두] 잠실점이 문을 열었다.
누가 봐도 서풍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게 레트로한 천막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서풍 만두]는 오픈 날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백화점보다 더 많은 직원이 만두를 만들어 제공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은 다행히 아주 길지는 않았다.
서풍의 대표 만두인 먹물 만두와 기본 고기 만두, 해물 만두, 그리고 비건주의자들을 위한 오이 만두가 주메뉴였다.
흔하게 접하는 한국식 만두와 어딘가 다른 매력에 손님들이 줄을 서서 먹고 갔고, 그 입소문에 또 길게 줄을 섰다.
정신없이 바쁜 점심 피크 시간이 지나고 홀 안에는 두 테이블에서 손님들이 맛있게 만두를 먹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 회의 있으시죠?”
“매니저님, 그게 오늘이었나? 나 완전히 깜빡할뻔했네.”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아무래도 용량 초과인 것 같아. 언니랑 명옥 언니 아니었으면 난 시작할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박은선이 윤지영의 어깨를 안마해주며 웃었다.
“오늘 회의하고 나면 구체적인 일정 같은 거 잡히는 건가?”
“아마 그러겠죠.”
“베트남 가기 전에 여기 직원들이 언니나 명옥 언니처럼 만두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나도 총주방장 명옥 언니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 연륜은 무시 못 해, 정말.”
투명하게 보이는 주방에서는 이명옥이 만두 만드는 법을 설명하며 연신 웃느라 정신없었다.
긴 테이블에 세 명씩 마주 보고 앉아 종류별 만두를 만들었고, 포장 작업 후 냉동 저장하는 사람, 끓는 물에 즉석에서 만두를 삶아 제공하는 사람. 주방이 늘어난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이명옥과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 윤지영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가게를 나섰다.
* * *
베트남 진출을 위해 다시 모인 MS 백화점 11층 회의실.
백화점 측에서는 각 부서에서 전문 인력을 모아 TFT(Task Force Team)을 결성했다,
서풍 측에서는 이전처럼 서인우와 이준형, 윤지영, 그리고 바쁜 스케쥴에도 시간을 내준 박정원이 회의에 참석했다.
“우선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저희 TFT는 여기 구본석 부장님이 총괄 책임자로 일해 주실 겁니다.”
구본석이 테이블 위에 서류 더미를 잔뜩 올려놓고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지금까지 베트남 진출 준비는 원활하게 잘 되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아서 예상보다 빨리 진행될 것 같습니다.”
앞에 놓인 음료수를 벌컥벌컥 단숨에 비워버린 구본석이 준비한 서류를 서인우와 이준형, 박정원, 윤지영 앞에 놓았다.
“다음 달에 저희 TFT와 함께 베트남 현지답사를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사전에 현지 사정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현지인들의 입맛도 알아봐야 하고, 식자재도 꼼꼼하게 체크해야 하고 말입니다.”
경험 많은 박정원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서풍 TWO]의 서인우 씨가 직접 답사해주시면 좋겠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입을 꾹 다물고 듣고 있던 서인우가 바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서풍 TWO]는 [서풍]의 맛을 똑같이 낼 수 있도록 준비 중인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가게를 비우기는 힘듭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대표님이 음식 맛이나 식자재에 워낙 깐깐하시고 정확해서 제일 적임자시긴 한데….”
구본석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에 유현주가 말을 이었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절대 가게를 비우지 않으시잖아요. 그럼 [서풍]을 대표해서 현지답사 해주실 분을 선정해 알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 팀원 중 두 분과 [서풍]에서 선정해주신 두 분 이렇게 넷으로 답사 팀을 꾸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박정원이 혼자 피식 웃음을 보였다.
“박정원 대표님, 왜 웃으세요?”
유현주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 서 대표 성격상 분명 혼자라도 현지답사 가게 될 건데…지금은 절대 그럴 시간 없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네?”
“다 내 경험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음식 장사하는 사람, 특히 음식에 진심인 사람은 장사할 곳 식자재 상태와 그곳 사람들의 입맛을 모르고는 장사 못하는 거거든요. 특히 저 서인우 대표같이 고객의 입맛을 최우선시하는 사람은 절대 그냥 못 있지.”
다들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익히 예상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맞습니다. 저도 궁금하고 답답하긴 하지만, 여기서 제 요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실망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요. 지금 교육하고 있는 직원이 워낙 감각이 있어서 곧 여유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 혼자라도 날아갔다 오겠지. 뭐.”
박정원이 혼잣말처럼 작게 웅얼거렸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 * *
백화점 측에서는 유현주와 식품부 과장인 오진수가 [서풍]에서는 서인우 대신 안상훈과 윤지영이 현지답사 팀으로 결정되었다.
“내일 7시 30분 비행기라고 했지?”
백화점 마감 시간에 맞춰 [서풍 TWO]를 찾은 윤지영이 계속 불만을 쏟아냈다.
“나 바빠죽겠는데 정말 오빠가 도저히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가주는 거야.”
“너 베트남 요리 좋아하잖아? 여행도 좋아하고.”
“이게 여행이야? 출장이지? 그래도 현지 음식 실컷 먹어보는 건 좋긴 해.”
안상훈 역시 두꺼운 노트를 펼쳐놓고 계속해서 뭔가 적고 있었다.
“안 셰프님은 아까부터 계속 뭘 그렇게 적으세요?”
윤지영이 슬쩍 노트를 쳐다봤다.
“저도 해외는 처음이라 긴장돼서요.”
“대박! 베트남 유명 중식당 리스트, 인기 메뉴 가격 비교, 이건 뭐예요?”
윤지영이 노트에 안상훈이 그려놓은 그림을 가리켰다.
“지난주 내내 베트남 요리 관련 영상을 많이 찾아봤습니다. 우리한테 좀 생소한 채소가 있어서 그림으로 그려 봤습니다.”
“이게 또 그림이 되니까 가능하네요. 내가 그렸으면 줄기랑 이파리 정도?”
낯선 나라에 가서 전혀 모르는 언어를 접하게 된다는 스트레스는 안상훈과 윤지영 모두 엄청난 듯했다.
“유현주 팀장이 말씀하신 것처럼 현지 가이드가 있으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거기에서는 딱 두 가지만 고려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안상훈이 또다시 노트에 적을 준비를 했다.
“첫째는 현지인들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서풍] 맛을 그대로 고수 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안 셰프님은 믿을 수 있지만 난 자신 없어.”
“너 입맛도 정확하잖아. 난 걱정 안 한다. 둘이 잘하고 오리라 믿어.”
“내가 없어서 은선 언니가 엄청나게 바빠질 거예요. 베트남 다녀오면 보너스 확실히 챙겨줘. 알았지, 대표님!”
서인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미소로 때울 생각은 하지 말고.”
“보너스 두둑하게 챙겨줄 테니 좋은 곳에서 직원 회식하도록 해.”
윤지영이 핸드폰을 펼쳐 메모해둔 내용을 보였다.
“안 셰프님도 이미 아시겠지만, 지금 베트남은 우리나라 여름하고 같으니까 완전히 여름옷으로 챙겨오셔야 해요. 비도 자주는 아니어도 올 수 있으니까 우산도 챙기시고요, 우비도 있으시면 챙기시고요.”
“안 그래도 우리 유진이가 자기가 아끼는 겨울 공주 우산을 빌려준다고 난리입니다.”
“네? 유진이 너무 귀여워요.”
“그 우산 제 것 아닙니다. 사장님도 같이 가시는 줄 알고 빌려준다는 겁니다.”
“고 쪼만한 게 우리 사장님을 향한 사랑이 오래가네요.”
윤지영이 소리 내 웃었다.
“애 엄마가 사장님 팬이 돼서 매일 자랑하니까 애가 판단이 흐려져서 그렇습니다. 다 허상이죠, 허상.”
서인우는 마땅한 리액션을 찾지 못해 어정쩡하게 웃었다.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데 이제 일어나시죠. 나머지 정리는 제가 할 테니 빨리 들어가셔서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지영이 너도 얼른 들어가서 짐 챙기고.”
“그래야지.”
“이모, 이모부하고 통화도 잘하고.”
“아빠랑 벌써 연 삼 일 통화했어. 내가 무슨 오지에 가는 줄 알아.”
“그게 다 부모 마음입니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베트남 도착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서인우도 일어나 안상훈의 어깨를 묵직하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모든 말을 전하듯이.
이제 서풍의 맛을 그대로 낼 수 있는 안상훈이 있어서 마음먹은 베트남 진출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서인우를 믿고 열심히 일해 주는 식구들을 위해 사업 확장을 결정했지만,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조금이라도 안일함이 생긴다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더 이번 답사가 중요했다.
아직도 깐깐하게 재료구매부터 손질 대부분을 혼자 하는 서인우 로서는 직접 가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매일 백화점 오픈 시간 전부터 줄 서 있는 손님들을 위해 그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