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지영 언니, 아니 사장님. 냉동만두 대 자 세 개 포장이요. 여기서 식사 마치시고 바로 찾아가신답니다.”
“알았어요. 정 매니저.”
MS 백화점 식품관에서 먹물 만두 판매를 맡아 운영한 지 6개월째인 윤지영 사장이 여전히 뛰어난 손놀림을 선보이는 이명옥의 어깨를 안마했다.
“사장도 피곤할껀디 이렇게 안마 받으니까 좀 거시기 허네.”
“명옥 언니 어깨 아프면 큰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다들 잘 배워보세요.”
새로운 직원들이 웃으며 이명옥의 만두 만드는 기술을 흉내 내려 애썼다.
“제시카. 일찍 왔네?”
김서원이 매장 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웃고 있었다.
“인테리어 회의 좀 하자더니, 바빠서 가능하겠어요?”
“바쁜 동생이 이렇게 몸소 와줬는데, 아무리 바빠도 시간 내야지.”
어디 가서 잠시 앉을 시간도 없었다.
옆에 놓인 테이블에 김서원이 사 온 커피를 앞에 놓고 대화를 이어갔다.
“언니, 그러니까 지금 잠실점 인테리어도 [서풍 TWO]랑 똑같이 하고 싶다는 거죠?”
“그렇지. 간판도 똑같이 할거고. 어차피 다 똑같은 [서풍] 이니까.”
“알았어요. 지금 우리 직원들이 아이디어 회의 중이니까 내가 같은 컨셉으로 약간만 차이 나게 해서 보여주고, 견적 뽑아볼게.”
김서원이 커피를 마시며 노트를 정리했다.
“그럼 다음 달부터 만두는 여기 백화점 식품관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겠네?”
윤지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거 확정 날 때까지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그래도, 이준형 사장이 많이 도와줬어. 역시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이제 완전 전문가더라고.”
말을 마친 윤지영이 김서원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너는… 괜찮은 거야?”
“나?”
김서원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 아빠야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게 당연하지. 거기서도 계속 오빠와 나를 조정해 보려고 난리에요. 그 상황에도 포기가 안 되나 봐.”
“그래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자주 찾아가. 그리고…”
윤지영이 잠시 말을 멈췄다.
“더는 우리 눈치 보고 힘들어하지 마. 물론 용서한다는 말은 절대 못 하겠다.”
씁쓸하게 미소 지어 보이던 김서원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웃으며 다가왔다.
“김서원 씨 맞죠?”
MS 백화점 마케팅부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유현주였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여기서….”
말을 하던 김서원의 시선이 유현주의 목에 매달려 있는 사원증에 꽂혔다.
“[만가복] 그만두고 여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벌써 다음 달이면 일 년이네요.”
“아, 그러셨구나. 전혀 몰랐어요. 축하할 일인 거죠?”
유현주가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보였다.
“안 그래도 커피 사서 9층에 서인우 씨 만나러 가려고 하다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와봤어요. 여기서 보니까 또 반갑네요.”
어색한 유현주의 웃음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여기 서 있는 김서원의 아버지, 김형식이 무슨 짓을 했는지 온 세상이 다 아는 지금 이 그림이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눈치 빠른 윤지영이 가볍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여기 김서원 씨는 우리 [서풍 TWO] 처음 오픈할 때부터 인테리어를 맡아서 해주신 분이에요. [바램 인테리어] 사장인데, 모르셨죠?”
“인테리어요?”
“네, 독일에 유학 가서부터 준비해서 들어오자마자 바로 시작했어요. 이제 직원 세 명인 작은 회사입니다.”
김서원이 수줍은 듯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며 작게 웃었다.
“지금도 다음 달부터 시작하는 [서풍 만두] 인테리어 때문에 의논 중이었어요.”
“축하해요. 음악 하시는 분이라고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음악은 부모님이 원하셨던 거고, 이 일이 제가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유현주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명함 가지고 계시면 저도 한 장 주세요. [서풍TWO] 인테리어 너무 좋았거든요. 인테리어 할 일 있을 때 의뢰해도 되죠?”
김서원이 가방에 넣어둔 명함집을 꺼내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최선을 다해 원하는 인테리어로 보답하겠습니다.”
셋이 잠시 웃었다.
이 세 명이 한 공간에서 웃고 있는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멀어지는 유현주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보고 있던 김서원이 씁쓸한 듯 웃음을 거뒀다.
“언니, 그러면 다른 요구 사항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줘요. 바쁜데 가볼게.”
“그래, 오빠는 안 보고 가려고?”
“다음에. 그럼 갈게요.”
웃으며 일어섰지만, 김서원의 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 * *
같은 시간 9층 [서풍 TWO]를 찾은 유현주는 아직 줄이 길게 서 있는 걸 보고 고개만 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팀장님.”
“아직 줄이 기네요. 점심시간도 한참 지났는데….”
“요즘엔 딱히 점심시간, 저녁 시간 따로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바빠요.”
정다운이 연이어 계산하느라 바쁜 와중에 웃으며 대답했다.
“사장님하고 잠시 면담하고 싶은데, 그럼 언제쯤이 편하실까요?”
“저녁 시간 지나야 시간이 좀 날 것 같은데요. 급하신 거면 지금 잠시 불러 드릴까요?”
“아니에요. 영업에 지장을 주면 안 되죠. 어차피 식품부 구본석 부장님이랑 같이 얘기해야 하니까 시간 정해서 연락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유현주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고도 식사를 위해 기다리는 줄은 여전히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안 셰프님. 이건 후추가 너무 과하게 들어간 향인데요?”
안상훈이 만든 백 짬뽕의 향을 맡아본 서인우가 먹어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게 느껴지십니까?”
“네, 여기 [서풍 TWO]의 백 짬뽕은 후추 향이 은은하게 돌면서 시원한 맛을 끌어내는 게 포인트입니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완전 똑같은 맛이 나와야지만 [서풍 TWO] 2호점이 가능하다는 거 그것만 명심해 주세요. 그리고, 그건 안 셰프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저기서 프랜차이즈를 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서인우는 그때마다 강하게 거절했다.
새우면이나 먹물 만두처럼 그대로 포장해 판매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닌 중식이다.
요리사의 솜씨와 화력, 재료의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맛은 달라질 수 있다.
중식도 덕에 정확한 크기의 재료로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었지만, 그건 서인우 만이 가능한 일이기에 안상훈에게 더 혹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제 입사 9개월 차인 강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처음으로 만든 민증을 들고 서인우를 찾아온 강진수.
대학 대신 [서풍TWO]의 셰프를 선택한 강진수는 수많은 지원자 중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서인우에 이어 안상훈이 요리를 만들어 내놓는 걸 한참 쳐다보고 있던 강진수가 물었다.
“저는 언제쯤 [서풍]의 백 짬뽕 만들어 보는 겁니까? 손님도 많은데 저도 돕고 싶은데요.”
“우선 기본기를 다 익히고 나면 내가 테스트해 준다고 했는데…. 계약 내용 잊어버린 건 아니지?”
“우리 할머니 요양원 가시기 전까지는 내가 요리 다 했다니까요. 이제 스무 살인데, 내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시면….”
“됐고, 빨리 어제 가르쳐 준 거나 더 연습하라고.”
중학생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는 강진수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요리했었다고 그랬다.
그의 요리에는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러기에 서인우의 요리를 감히 흉내 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사장님. 여기 손님도 대빵 많은데, 전국에 프랜차이즈내면 그냥 한순간 빡 재벌이 되는 거라고요. 그런데, 왜 매번 거절하세요?”
강진수가 손으로 크게 제스처를 취해 가며 물었다.
“내가 볼 때 진수 너처럼 재능이 있는 사람은 한 달만 배워도 어디서든 짜장면 가게 할 수 있어.”
벌써 무슨 말을 할건지 안다는 듯이 손님이 주문한 백 짬뽕을 완성한 안상훈이 씩 웃으며 벨을 눌렀다.
강진수만 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저 한 달만 배우면 여기 3호점 낼 수 있는 건가요?”
“내가 언제 [서풍]을 낼 수 있대? 그냥 짜장면 가게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요, 그게 그 말 아니냐고요?”
손에 끼고 있는 실리콘 장갑을 문지르며 강진수가 물었다.
“아니지. [서풍] 이름을 걸고 하는 건 그 정도 실력으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이야.”
여전히 웃고 있는 안상훈을 슬쩍 쳐다본 강진수가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인정. 나도 아무 짜장면집은 관심 없어요. 반드시 [서풍]이라는 이름을 걸고 말 거라고요.”
가만히 듣고 있던 중식도가 불쑥 한마디 했다.
-저놈 제법 쓸만하던데? 어린놈이 감각도 있고.
‘그래서 좀 가르쳐 보려고. 타고난 감각이 있으니 노력하면 되지 않겠어?’
-뭐 나와 너의 콜라보는 흉내 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으니 잘 키워봐.
9개월째 중식도 훈련부터 시작해, 웍을 다루는 훈련까지 솔직히 강진수는 지금이라도 허락만 하면 바로 손님 테이블에 요리를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이 좋았다.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하나씩 요리를 시켜보려고.’
서인우의 그런 속마음은 눈치도 채지 못한 강진수가 뾰로통한 얼굴로 양배추를 열심히 채썰고 있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저녁 식사를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소금과 후추로 재어 놓은 싱싱한 새우에 튀김옷을 입혀 팔팔 끓는 깨끗한 기름에 하나씩 넣었다.
튀김옷이 노랗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새우 살이 붉은색을 띠며 익어갔다.
매콤한 칠리소스를 완성해 휘리릭 볶아 접시에 담았다.
띵!
벨을 누르자마자 다시 시작된 요리.
밖은 점점 싸늘해져 가는데, 주방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 * *
10층 회장실에 앉아 회의 보고를 하고 있던 차성철이 언짢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회장님, 아니 전 회장님이 해오셨던 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그런 유명한 말도 모르시나?”
김원상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임원진 교체 방안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차 팀장 똑똑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차성철이 잠시 짧은 한숨을 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회장님은 정말 계속 저렇게 두실 겁니까? 저희가 뭐든 방법을 찾아서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이미 물밑작업이 시작되지 않았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인데 말입니다. 거기서도 절대 그냥 있을 노인네가 아니지.”
말을 하는 김원상의 표정이 소름이 끼치게 차가웠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지요.”
“새로 회장직을 맡으신 지 이제 일 년입니다. 그런 지금 시점에서 임원진을 대거 교체하시려 하는 이유가….”
차성철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김원상의 눈을 노려봤다.
“그 이유가 회사를 위한 것은 확실한 겁니까?”
김원상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리며 휘었다.
“지금 그 질문의 요지는 회사의 이득을 위한 교체인지, 내 편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교체인지를 묻는 거 맞나요?”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지지 않고 김원상의 눈을 노려보는 차성철을 잠시 빤히 쳐다보던 김원상이 갑자기 웃으며 손뼉을 쳤다.
“노인네가 차 팀장을 곁에 끼고 있던 이유가 이거였군. 다 잘 보이려고 굽신거리는 사람들 속에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는 유일한 사람.”
차성철은 여전히 김원상을 향한 시선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이제 내가 맡았으니 내 책임이지. 그런데, 내가 말이야 이 회사를 맡으며 마음먹은 게 하나 있거든.”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중식계의 모든 업체가 다 내 밑이라는 걸 인정하게 하겠다는 거. 다시 말해 대한민국 최고의 중식당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이번에는 차성철이 피식 작은 웃음을 보였다.
“차 팀장의 웃음은 무슨 의미이지?”
“전 회장님이 항상 하셨던 말씀을 똑같이 하셔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 부전자전인가?”
“하지만, 결국 [서풍]을 이기지 못했고, 그 욕심의 끝이 지금 철창신세를 지게 했다는 거죠.”
“뭐야?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르는 김원상을 향해 한치의 꺾임도 보이지 않는 차성철이 한마디 더 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제 목표는 회사의 성장뿐입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하고 나가는 차성철을 한참 멍하니 쳐다봤다.
‘목표가 같다니 나쁠 것 없지. 그럼 한 번 달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