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오늘따라 일찍 출근한 정다운이 가게에 들어서기 무섭게 호들갑스럽게 서인우를 불렀다.
“사장님, 사장님 안에 계세요?”
서인우 뿐 아니라, 안상훈도 그리고 막 만두를 만들려고 준비 중이던 박은선과 이명옥 모두 정다운의 등장에 놀라 쳐다봤다.
“다운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
“어제 왔었던 남자 손님 있잖아요. 그 치즈 치킨밥 시키고 사진 찍고 막 그랬던 손님이요. 지영 언니가 잘 아는데….”
“그 남자 손님이 왜? 음식에 뭐 문제 있대?”
“아니요, 오히려 그 반대에요. 그 남자 유명한 사람인가 봐요.”
정다운이 핸드폰을 켜서 기사 하나를 찾아 보여주었다.
최고의 고수는 음식 맛뿐 아니라 인성도 최고였다!
나는 인기리에 종영한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 라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한 [서풍]의 서인우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역시 실력 있는 셰프답게 중화요리의 전설들만 입점한다는 MS 백화점 중식당에 [서풍TWO]라는 간판을 버젓이 내걸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많은 요리사가 어느 정도 인기를 얻고 나면 초심을 잃고 맛이 흔들리는 안타까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나본 서인우 셰프는 여전히 끝내주는 음식 솜씨에 따뜻한 인성까지 겸비해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었다.
내가 식당에 간 날 마침 앙상하게 마른 몸에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 노모와 함께 온 딸이 새우면으로 만든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지 물었다.
주방에 확인하고 온 직원은 밀가루 외에 다른 주의할 재료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말과 함께 서인우 셰프는 항상 손님의 건강을 가장 중요시 한다는 경영철학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딸이 먹겠다고 시킨 먹물 만두.
잠시 후 먹물 만두가 두 개의 접시에 따로 담겨 나왔다.
하나는 [서풍TWO]의 인기 메뉴인 오리지널 먹물 만두가, 또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둥그런 만두가 담겨 있었다.
다름 아닌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 손님을 위해 서인우 셰프가 만두소를 달걀에 굴려 만든 밀가루 없는 만두였다.
감동한 모녀가 눈시울을 붉히며 너무나도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옆에서 보는 나도 속에서 울컥하고 따뜻한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사진으로 꼭 남기고 싶었지만, 모녀의 행복한 식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글의 뒤에는 탕수육과 백 짬뽕의 사진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방송을 보며 너무 맛보고 싶었던 [서풍]만의 볶음 탕수육과 백 짬뽕.
탕수육은 전혀 느끼하지 않고 고소했으며 소스에 볶았는데도 바삭한 식감에 놀랐다.
백 짬뽕은 그냥 시원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반드시 먹어봐야 그 맛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며칠 뒤.
백화점에 입점하면서 내놓은 신메뉴를 먹어보고 평을 남기고 싶어 다시 찾은 [서풍 TWO].
신메뉴인 치즈 치킨밥이 나왔을 때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소한 치즈가 흘러내리는, 마치 근사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봄 직한 메인 메뉴에 청경채 볶음, 그리고 칠리소스로 화려하게 그려놓은 꽃.
마치 예술 작품 같아 손을 대기 미안할 정도였다.
과연 이게 뭘까 궁금한 마음에 치즈가 녹아있는 음식을 먹어보니 닭고기와 채소를 볶아 불린 찹쌀과 함께 고소하고 짭조름하게 찐 밥이었다.
치즈가 듬뿍 올라간 메뉴 안에 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너무 맛있다!
정말 유쾌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느 분야나 최고의 고수는 존재한다.
마치 신의 축복을 받은 듯한 서인우 셰프의 음식 솜씨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감동을 안겨주는 요리였다.
다음엔 뭘 먹어볼까?
오늘도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글이 끝난 뒤에도 치즈 치킨밥과 홍짬뽕의 사진이 이어졌다.
그리고, 만두 만드는 장면이 담긴 사진과 추가로 달린 멘트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매일 만두 전문가가 현란한 솜씨로 먹물 만두를 만드는 모습을 주방이 보이는 유리창을 통해 보고 주문해 먹을 수 있다.
그 또한 먹는 재미에 보는 재미까지 일거양득이 아닐까?
음식 평론가 박인식.
그렇게 많은 양을 차지하는 기사가 끝이 났다.
기사를 읽고 또 읽고 있던 안상훈이 서인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혹시 이 평론가 알아요?”
“아니요,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얼굴 없는 평론가로 요식업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람입니다. 조용히 음식을 먹고 간 후에 가차 없이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하고, 맛부터 서비스까지 꼼꼼히 살펴 고객들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주기로 유명해요.”
이제 막 출근한 윤지영이 무슨 일인가 궁금한 눈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정다운의 설명을 듣자마자 놀란 윤지영의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대박! 어제 만두 만드는 것까지 사진 찍길래 내가 한마디 했는데, 그게 이 사진이었네. 우리 가게 홍보 제대로 해줬는데?”
“그렇죠? 전혀 모르는 사람도 한번 와보고 싶게 너무 광고를 잘 해줬어요.”
안상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맛이며 서비스 모두 정말 이 평론가 맘에 들었나 봅니다. 혹평에 심지어 가게 문까지 닫은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는 음식 만드는 것도 손님 대하는 것도 다 진심이니까요. 진심은 통하는 거죠. 물론 실력이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에요.”
정말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서인우는 다른 무엇보다 그가 마지막에 남긴 한 문장.
바로 감동을 안겨주는 요리라는 그 말이 정말 고마웠다.
아빠가 평생 들어왔던 최고의 찬사.
그 감동을 주는 맛을 다시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서풍TWO] 였기에, 서인우는 지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다 우리 식구들이 내 일처럼 열심히 해준 결과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우리 사장님의 신급 요리실력에 아이돌급 외모, 거기에 타고난 인성이 합해져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키는 거라고요.”
정다운이 흥분했는지 웬일로 말이 길어졌다.
“저는 여기서 일하게 된 걸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일 년 후, 그리고 또 십 년 후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벅차요.”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려는 서인우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어댔다.
-오늘 아침은 분위기가 괜찮나? 컨디션은 어떤가?”
“회장님. 안녕하세요. 다시 원상복구 됐습니다.”
-젊음이 좋긴 좋군. 회복도 금방 되고 말이야.
“네, 앞으로는 걱정 끼쳐 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오픈까지 시간 좀 있지?
서인우가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한 후 바로 답을 내놓았다.
“네, 어디 계신지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여기 11층 회의실이네. 시간 많고 한가한 노인네가 움직여야 하는데, 다른 직원들이 들으면 좀 문제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바로 올라가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서인우가 안상훈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홀에 있는 윤지영에게 다가갔다.
“오빠, 왜? 혹시 또 어지러워?”
“아니, 어제 오셨던 최만수 회장님하고 잠시 얘기 좀 하고 올게.”
“오빠, 요즘 무슨 일 있지? 얼굴색도 안 좋고, 어제 일도 그렇고 말이야.”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우선 최만수 회장님부터 만나고 내려올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좀 줘.”
윤지영이 서인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오빠 없어도 음식 만드는 거 빼고는 다 커버 가능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마주친 눈에 감사의 뜻을 담아 웃어 보이고는 바로 계단을 이용해 11층으로 향했다.
임원 회의만 주로 한다는 회의실은 기다란 테이블에 큰 의자가 가운데 하나, 양쪽으로 세 개씩 놓여있었다.
이미 비서에게 지시해놓았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차 포트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따뜻하게 국화차 한 잔 마시자고.”
투명한 포트에 노란 국화가 활짝 피어 둥둥 떠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가운데 자리에 최만수가 그의 왼쪽 의자에 장비서, 오른쪽에 서인우가 앉았다.
서인우는 솔직히 국화차 맛은 잘 몰랐다.
녹차보다는 좀 부드럽다는 것 정도?
“이번 일, 우선 자네 생각을 듣고 싶었네. 죽은 서동수 셰프, 그러니까 자네 아버지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들었는데….”
최영만 얘기가 나오자 어제 다친 왼쪽 어깨가 다시 뻐근하게 아팠다.
“네, 지금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빠와 가장 친한 고향 친구셨습니다. 지금 [만가복]의 김형식과 그렇게 셋이 중식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최만수의 눈썹 사이가 살짝 일그러졌다.
“유재철에게 듣자 하니 결국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친구를 저버린 것 같던데…참 인생이 허무해. 한순간의 실수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끔찍한 일로 남아 버렸네.”
“아들의 음주운전 사고를 덮어주려 했던 마음, 제가 아는 그 아저씨로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가족을 끔찍하게 아꼈으니까요.”
최만수와 장비서 모두 서인우가 힘겹게 꺼내는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끔찍한 아들을 위해서라 해도 어떻게 우리 아빠를…난 절대 용서 못 합니다. 반드시 벌 받게 할 거예요. 아저씨도 그렇게 강요한 김형식도 말입니다.”
“그래야지. 그 사람이 아들을 위해 한 일이 결국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어 버린 셈이군. 어리석어, 정말 참으로 어리석다고!”
대화하면서 최만수도 화가 나는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장비서가 서인우의 손을 말없이 잡아 주었다.
“그렇게 결심 했으면 나머지는 우리한테 맡기고 일에 전념하세요. 지금 유재철이 증거를 모으는 중이고, 여기 회장님이 이 일 만큼은 지난번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게 비밀리에 준비해 터트릴 계획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찾아서 하겠습니다.”
최만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서풍 TWO] 기사 난 거 봤지?”
“네, 회장님도 보셨습니까?”
“아침에 현주가, 아니 내 외손주가 전화해서 말해주더군. 아! 우리 외손주 모르지?”
“네, 만나 뵌 적이 없어서요.”
“이제 여기 백화점에서 일할 거니까 언제 한 번 소개해주지. 아주 미인이야.”
그 말에 서인우가 자기도 모르게 장비서를 쳐다봤다.
“네. 그분은 친탁했습니다.”
최만수가 남자답게 선이 굵은 얼굴이지만, 여자 얼굴로 봤을 때 미인형일 수는 없었다.
“잠깐만,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현주가 나를 안 닮았고 친가를 닮아서 예쁘다는 말인가 지금?”
“솔직히 회장님 쪽은 선이 너무 굵지 않습니까? 현주양이 외탁했으면 예쁜 얼굴이 아니라 잘생긴 얼굴이었겠죠?”
최만수가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럼 내 딸이…?”
“회장님. 서인우 씨 곧 손님 들이닥칠 텐데…더 하실 말씀이라도 ….”
“없네. 우선 자네 뜻 알았으니까 내려가서 오늘도 최고의 맛을 선사해줘. 그리고….”
일어서려는 장비서의 팔을 잡아끌며 최만수가 말을 이었다.
“장비서는 더 앉아있게. 얘기 마무리 지어야지?”
헛기침을 연신 하는 장비서가 아무래도 혹독하게 혼쭐이 날 듯싶었다.
진심을 담아 고개 숙여 인사한 서인우는 급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 * *
“이 작자 뭐야? 이거 분명 서인우한테 돈 받고 쓴 글이 틀림없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뒷돈을 받고 이런 글을….”
점심 장사를 막 마치고 오승연 홀 매니저가 보여준 [서풍 TWO]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있던 김원상이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 그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차은석이 혀를 끌끌찼다.
“차셰프! 지금 뭐 하는 태도야? 그 태도가?”
“이 음식 평론가 모르십니까?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펜대를 잡고 있다는 박인식 음식 평론가 말입니다.”
“내가 그런 자를 어떻게 알아?”
“우리 회장님이 크림 새우를 처음 선보였을 때 몰래 [만가복] 본점에서 먹어본 후 엄청난 극찬을 했었던 사람 아닙니까? ”
김원상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때 이 사람의 평가가 있고 나서부터 [만가복] 크림 새우가 불티나게 팔렸던 거고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질문하는 김원상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오 매니저. 이 사람 섭외 좀 해봐요. 당장!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