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인우야! 정신 차려! 눈 좀 떠보라고!
중식도의 간절한 외침이 서인우에게 닿지 못했다.
쓰러져 있는 서인우 위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던 중식도가 서인우의 팔을 툭툭 쳤다.
하지만, 작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너 빨리 안 일어나! 내 앞에서 사라지는 건 서동수 하나로 충분하다고. 빨리 정신 차려!
중식도가 힘껏 외쳤지만, 듣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들리는 인기척에 중식도가 바닥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장비서,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서인우 셰프가 아직 오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그래서 제가 오픈하면 가시자니까요.”
“그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얘기도 못 해. 식당은 이 시간이 제일 여유 있어. 그나저나 어디 있는 거야?”
둘의 대화 소리에도 서인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장비서가 주방으로 향했다.
“회, 회장님!”
“왜 그런가? 늙은이 놀라게…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서인우, 이봐, 서인우 정신 차려!”
장비서는 급하게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서인우의 입에서 옅은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봐, 서인우. 정신이 좀 드나?”
“어! 회장님.”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던 서인우의 팔에 뭔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아니, 지금 몇 시죠? 오픈 시간이….”
“아직 오픈 30분 전이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죄송합니다. 빨리 가게에 가봐야 합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멍청한가?”
하루 사이에 퀭해진 눈으로 최만수를 바라보던 서인우가 무슨 말인지 이해 안 된다는 듯이 큰 눈을 깜빡거렸다.
“성공할 거라면서? [만가복]을 이겨볼 거라면서?”
“네, 꼭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런 사람이 몸을 이따위로 혹사해?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도대체 진통제를 몇 개를 먹은 거야?”
평상시보다 더 심한 두통과 근육통에 몇 개 때려먹은 약이 좀 과했나 보다.
“의사가 그러더군. 심한 스트레스에 약물 과다까지 겹쳤다고. 그러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어. 그걸 몰랐나?”
최만수의 목소리가 병실에 크게 울렸다.
옆에 서 있던 장비서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자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효과를 좀 빨리 본다는 생각에 과했습니다. 실수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도 약이지만, 자네 지금 얼굴을 좀 봐. 도대체 요즘 잠은 자는 건가?”
서인우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유재철한테 얘기 들어서 나도 다 알고 있네. 그 일 때문에 걱정돼서 일찍 찾아왔는데, 우리가 못 봤으면 어쩔 뻔했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갑자기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 앞에서 걱정해주고 있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이런 인연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아빠의 뜻인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실을 끝까지 밝혀내야지. 내가 뭐든 힘이 돼 줄 테니까 자네는 건강관리 잘하고, 그 축복받은 솜씨를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게 열심히 요리하라고. 내 말 알아듣겠나?”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말려도 갈 거지?”
“네, 죄송합니다.”
“그 고집을 누가 꺾겠나? 최고의 고수 자리까지 올라간 근성인데. 담당의 오라 할 테니 정리하고 가자고.”
장비서가 놀라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장비서는 아직 서인우 파악이 덜된 건가? 이 친구 링거 꽂고도 요리 할 사람이라는 거 몰라?”
“그래도 아직 검사도 더 해야 하고, 영양제도 다 맞으려면….”
“감사합니다. 벌써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봤지? 포기하라고.”
뒷머리를 긁적거리던 장비서가 이내 포기한 듯 병실을 나가 담당의를 호출했다.
* * *
장비서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안상훈의 얼굴이 근심으로 꽉 차 있었다.
항상 웃고 긍정적인 서인우가 요즘 부쩍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혼자 쓰러져 있을 정도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모든 게 다 몸이 불편한 자신 때문인 듯 자책이 들었다.
출근한 직원들에게 서인우의 소식을 전하면서 다 같이 합심해서 더 힘내 차질없이 일하자는 각오를 더 단단히 했다.
만두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던 박은선이 결국 눈물을 보였다.
분명 주방에서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그런 몸 상태로 만두 소를 만들어 준비해놓은 걸 보자 뜨거운 눈물이 참을 새도 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보, 이럴수록 우리가 더 힘내자고 했잖아?”
“그 몸으로 어떻게 평상시랑 똑같이 준비해놓을 수가 있어? 우리 사장님 정말 너무 대단한 것 같아. 나보다 어리지만 나는 우리 사장님 존경해.”
아직 서인우를 포함해 여기 사람들 파악이 안 된 이명옥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
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도 테이블 정리도 평상시보다 더 열심히 하며 각자 서인우의 몫까지 해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오빠!”
카운터 정리를 하고 있던 윤지영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서인우와 최만수, 장비서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이랑 장비서님 아니었으면, 흐…흑….”
윤지영이 많이 놀라기는 했나 보다.
평상시 똑 부러지는 성격의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 버렸다.
“그모므르…흐흑…으그에…왜…다시으그 흐…아, 정말 …주방에…흐흑…쓰러즈그…머리는….”
“지영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아앙! 나도 몰라 흐흑….”
결국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펑펑 울기 시작한 윤지영을 어린 정다운이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고 있었다.
서인우가 윤지영의 팔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미안해, 지영아. 나 이제 괜찮아.”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윤지영을 대신해 아픈 다리로 한걸음에 달려 나온 안상훈이 물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쓰러지면서 머리나 어디 다친 곳은 없고요?”
“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걱정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최만수가 안상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행히 큰 외상은 없는 듯합니다. 바로 요리해야 한다고 튀어나와서 자세한 검사는 못 했어요.”
“그럼, 안 되는데…쓰러지면서 머리라도 부딪쳤을지 모르니 MRI라도 찍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박은선이 서인우의 머리를 유심히 살폈다.
“괜찮습니다. 그냥 잠시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내가 평상시 만들어놓은 체력이 있어서 금방 회복됐습니다. 이럴 시간 없어요. 곧 손님 들이닥칠 텐데….”
모두 걱정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막상 서인우를 대신할 사람은 이 중에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전 세계에 한 명도 없다.
“사장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장님은 아프면 안 돼요. 우리 누구도 사장님을 대신할 수 없단 말이에요.”
잘 참고 있던 정다운도 눈시울이 붉어져서 급하게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아프면 안 됩니다. 이제 멀쩡하니까 오늘도 다들 힘냅시다. 회장님, 그리고 장 비서님 식사하시고 가세요.”
“오늘은 됐네. 다음에 자네 컨디션 좋아지면 다시 오지.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자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후에 틈나는 대로 전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만수가 장비서에게 나가자는 눈신호를 보냈다.
“그럴 필요 없네. 내일이라도 다시 올 테니까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네, 내일은 맛있는 요리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그래도 좋고. 그럼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내일 보자고.”
최만수와 장비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풍 직원 모두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하나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허리를 크게 숙이며 인사했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인우야. 너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미안해, 사부. 내가 며칠 잠을 못 자서. 이제 괜찮아.’
-너 왼쪽 어깨가 아주 뻐근할 거다. 다행히 머리보다 어깨가 먼저 닿아서 지금 그 머리가 멀쩡히 붙어있는 줄이나 알아.
‘내가 운동 좀 해서 그런가? 어깨 깡패라서?’
-농담이 나오냐? 난 말이다.
중식도가 낮게 깔린 소리를 냈다.
-서동수는 그 죽음을 내가 미리 봤었다. 그랬는데도, 정말 많이 힘들었어.
아빠 얘기에 다시 간신히 끄집어 보인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번에 네가 쓰러지는 건 보이지 않았어. 나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큰일이었으면 보였겠지. 그만큼 별거 아니야.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뭐? 이상한 일?’
-너 쓰러지는 걸 보고 아무리 소리쳐도 네가 꼼짝도 하지 않았지. 그래서 너무 무섭고 답답해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때.
잠시 중식도의 말이 멈췄다.
서인우 또한 긴장한 탓에 말라비틀어진 입안이 더 바짝 타들어 가며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던 장면이 보였어.
‘그, 그게 어떤 장면이었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엄청나게 큰 궁 같은 곳에서 요리하고 있었어. 그 남자 주위에 수십 명의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뭔가를 묻고 따라 하고 하는 장면이었어.
‘잘 생각해봐. 정말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그랬다니까. 옷도 이상하고 머리 모양도 이상하고…그런데 말이야,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하는 요리는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어.
‘혹시 사부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건 아닐까?’
-글쎄.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더는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첫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는 안상훈과 박은선의 시선이 느껴져서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치즈 치킨밥과 짬뽕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치즈 치킨밥은 오랜만에 주문이 들어왔네요. 아직 사람들에게 낯선 메뉴라 따로 홍보를 좀 해야 하는데….”
안상훈이 청경채 볶음을 준비하며 치즈 치킨밥과 짬뽕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는 서인우의 재빠른 손동작에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우리 정다운 직원이 그런 거 잘합니다. 다음에 한 번 부탁해 보기로 하죠.”
아직 컨디션은 별로였지만, 음식 만드는 데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다.
고소한 치즈향이 주방에 가득했다.
띵!
예쁜 칠리 소스 꽃까지 완성된 치즈 치킨밥과 짬뽕을 가지러 온 윤지영이 서인우의 안색을 살폈다.
“나 멀쩡해. 빨리 내가기나 해.”
“저 손님은 지난번에도 왔었는데, 꼭 혼자 와서 두 가지를 시키네.”
“대식가인가 보지 뭐.”
윤지영이 치즈 치킨밥과 짬뽕을 올려놓자, 지난번과 똑같이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음식을 유심히 살펴봤다.
“듣자 하니 이 치즈 치킨밥이 [서풍 TWO]에만 있는 스페셜 메뉴라고 하던데, 맞나요?”
“네, 저희 사장님이 중국 여행 다녀온 사람들이 소개하는 음식에서 힌트를 얻어 정말 열심히 개발하신 메뉴입니다. 한 번 드셔보세요.”
“보기만 해도 벌써 군침이 도네요. 이 예술 작품 같은 화려한 꽃까지 중식당에서는 정말 처음 보는 비주얼은 맞는 것 같습니다.”
트렌치코트 남자가 음식을 여러 각도로 사진찍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치즈밥을 파헤치더니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
마치 와인을 시음하듯 눈을 감고 그 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더니 또다시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실실 얼굴에 웃음이 자리 잡더니 치즈밥과 짬뽕을 번갈아 가며 맛있게 먹었다.
“언니, 저 남자분은 음식에 정말 진심인 것 같죠?”
“그러게, 저렇게 모든 음식을 진지하게 먹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혹시 어디서 짜장면 가게 차리려고 염탐 온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어떻게 하죠?”
“그래봤자 이 맛은 우리 사장님 아니면 못 내.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다운 씨.”
둘이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짧게 대화하고는 바로 손님을 맞았다.
음식을 먹으며 연신 통유리를 통해 만두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던 트렌치코트 남자가 식사를 마치고는 급기야 일어나 그 광경을 서서 한참 지켜봤다.
찰칵!
“손님, 여기 일하시는 분들 사진은 좀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이렇게 만두 만드는 테이블과 손만 찍었습니다. 이건 괜찮겠죠?”
윤지영이 영 맘에 안 드는 표정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확히 다음 날 그 사진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