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137화 (137/200)

제137화.

간단한 회식 후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몰래 도착한 와인 바.

유현주는 차성철 팀장이 자주 간다는 정보를 얻은 후 거의 일주일에 두어 번은 이곳에 들렀었다.

와인 한 잔에 취하는 주제에.

항상 와인 한 잔에 안주를 시켜 안주만 축내며 차성철이 혹시나 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와인 대신 마셨다.

하지만, 오늘은 차성철 팀장과 당당하게 약속을 잡고 이곳에 왔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만….

유현주가 도착하고 가게 문이 두 번 열렸었다.

물론 두 번 다 차성철은 아니었다.

8시 50분.

차성철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10분이 남아있었다.

가게 문이 세 번째 열리고 차성철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에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본 유현주가 피식 작은 웃음을 내보였다.

“갑자기 왜 웃습니까? 사람 보자마자.”

“아! 죄송해요. 그쪽 팀도 회식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근처에서 회식하고 온 겁니다.”

갑자기 유현주가 킁킁거리며 차성철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뭐 하는 겁니까?”

“술 안 마셨어요?”

“마셨습니다. 소주 반병.”

“그런데, 이렇게 아침에 막 출근한 사람 같다고요? 그게 가능한가?”

그리고는 어깨 아래로 내려온 자기 머리카락 끝을 들어 다시 냄새를 킁킁 맡았다.

“우린 삼겹살집에서 회식했거든요. 여기 돼지 냄새, 김치 냄새가 섞여서….”

“술맛 떨어지는데 그만하시죠.”

차성철이 일부러 더 거리를 떨어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에이 농담이에요. 냄새 별로 안나. 맡아볼래요?”

“돼, 됐습니다.”

여전히 웃으며 메뉴판을 쳐다보던 유현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주 뭐 시킬까요?”

“밥 먹었는데, 뭐든 가벼운 거로 시킵시다. 술도 못 마시면서.”

“오늘은 딱 와인 한 잔만.”

“안 됩니다. 딱 두 모금만 드세요.”

큐브 모양으로 잘라놓은 치즈와 과일이 담긴 기다란 접시가 놓였다.

검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유현주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시고, 치즈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뭡니까? 오늘 꼭 할 말이 있다면서요?”

차성철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이번 주가 마지막 출근이에요.”

“무슨 말입니까? 마지막이라면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입니까?”

다시 와인잔을 입에 가져가려던 유현주가 와인 대신 과일을 찍어 입에 넣었다.

“네, 저 사실 어제 사표 냈어요. 오늘 우리 팀 회식은 뭐 거의 송별회나 마찬가지였죠.”

“갑자기 이유가 뭡니까? 결혼합니까?”

“에이, 좋아하는 남자가 꿈쩍도 안 하는데 결혼은 혼자 하나요?”

유현주의 대답에 차성철이 잠시 멈칫하더니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금 홍보실에서 꽤 적응을 잘하고 있는 거로 아는데, 다른 곳에 스카우트 된 거 아니면….”

“힘들게 추측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전에 얘기했던 적 있었죠? 이 회사에 다니는 이유는 딱 하나 차 팀장님 때문이라고.”

차성철이 대답 대신 와인을 들이켰다.

“그런데, 지금은 …. 도저히 회장님의 행보를 절대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요. 이번 기사 난 거 보고 사실 오만 정이 떨어져 버렸죠.”

“그럴수록 더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그런 교과서적인 말들이 너무 좋아서 버텼는데, 이제 다른 곳에서 일해보려고요.”

말을 마친 유현주가 약속한 두 번째 와인 한 모금을 마셔버렸다.

“어디서든 잘할 거라는 건 알지만, 좀 뜻밖이긴 합니다. 나 때문에 회장님 경영 철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여기 다니는 거라고 하더니….” “내가 회사를 옮기는 거지 차 팀장님을 좋아하는 마음마저 없앤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 마음은…아직 그대로거든요.”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 차성철이 남은 와인을 마시고는 다시 한 잔 따랐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어디로 출근하는 겁니까?”

“음…우리 [만가복]이 입점 하려고 했던 백화점이요.”

“네? MS 백화점 말입니까?”

“네, 거기에서 마케팅과 홍보 일을 해줬으면 하네요.”

바로 차성철의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새로 따른 와인을 마신 후 남은 와인을 빙빙 돌리다가 뚝 손을 멈춘 차성철이 유현주의 눈을 바라봤다.

“축하합니다. 유 대리한테 더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쩌면 우리 둘이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네, 그럴 줄 알았지만…절대 잡지는 않네요.”

“네?”

“농담입니다. 그럼 와인 딱 한 모금만 더해도 되겠죠?”

‘또 취하면 근처 공원이라도 가서 입으로 내는 나팔 소리 좀 들어주면 되는 거니까.’

차성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주는 생각했다.

마지막 세 번째 머금은 와인은 유독 쓰다고.

* * *

서인우와 김서원은 술집에서 나와 한 블록 더 가서 있는 편의점 파라솔 아래 잠시 앉았다.

오늘은 정말이지 어딘가에 다시 들어가 둘이 눈 마주치며 얘기할 자신이 없었다.

“서인우 씨 얼굴이 오늘은 정말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고 쓰여 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쫓아와 시간 내달라고 한 제가 죄송하죠.”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잠시만요.”

김서원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캔맥주 두 개를 사서 들고 왔다.

“알코올의 힘을 좀 얻어야 해서….”

이 여자는 또 왜 알코올의 힘까지 얻어야 하는 걸까?

처음 만났을 때 밝고 유쾌했던 제시카의 얼굴은 지금 그녀에게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망설이며 500밀리짜리 맥주 캔을 하나 다 비워갈 때쯤 김서원이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에 관한 기사 봤어요. 안상훈 셰프님 사고가 정말 아빠가 한 짓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김서원의 눈은 이미 반쯤 젖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백화점에서 구 과장님이 하셨던 말씀을 들었을 때, 조금 걱정하긴 했어요. 혹시나 그게 사실이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말이에요.”

서인우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오늘은 더.

“사실이 아니기만 바랬는데, 기사를 보고 너무 화가 나고 놀랐어요. 그리고, 지금은 정말 창피합니다.”

“김서원 씨 잘못이 아닙니다.”

“네, 그게 더 화나요.”

“더 화가 나다니 무슨 말입니까?”

김서원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은 서인우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차라리 그런 짓을 벌인 사람이 나였으면 제대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을 텐데…아빠는 오빠를 이상한 환자로 만들면서까지 자기 잘못을 피해 가려고만 했으니까요.”

아니, 당신이었으면 그런 짓 자체를 벌이지 않았겠지.

절대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런 당신도 밉다.

김서원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사실 오늘 백화점 마감 후에 서인우 씨 집에 갔었어요. 그런데, 집에 불이 꺼져 있더라고요.”

“집에까지 왔었다고요?”

그 기사를 보고 혼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괴로워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서인우 씨에게, 아니 서풍의 모든 사람에게 사과하고 싶었어요. 물론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은 서인우는 그냥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집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혹시나 하고 저 술집에 와봤던 거예요.”

“그런 줄 몰랐습니다.”

처음부터 만날 생각에 기다리다 일부러 왔던 거였는데…말 한마디 붙일 틈도 주지 않고 차갑게 내쳐버렸다.

“서인우 씨까지… 저를 이해해준다고 했던 서인우씨 까지 이제는 날 이렇게 힘들어하네요.”

“네?”

가슴이 철렁했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저 깊이 어딘가에 있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그, 그건 아닙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정말 오늘은 내가 너무 힘든 날이라서 그랬습니다. 김서원 씨 아니라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며 얘기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김서원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서인우를 유심히 바라봤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 일 말고 혹시 또 다른 일이 있는 거냐고 묻는 거예요.”

“네, 나한테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이미 무너진 하늘인데, 다시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아시겠어요?”

서인우의 목소리가 조금 커진 듯했다.

억누르려 애써도 더는 되지 않았다.

‘내가 그래서 오늘 하루는 못난 놈으로 넘어가려 했는데….’

놀란 김서원이 아무 말도 내놓지 못했다.

항상 밝은 모습의 서인우에게서 처음 보는 절망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은 김서원의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도저히 더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 일어나봐도 되겠습니까?”

“네. 죄송해요. 하루라도 빨리 만나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조급했어요.”

“한마디만 하고 일어나겠습니다.”

서인우의 비장한 얼굴을 본 김서원은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뭔가 듣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진실에 맞닥뜨릴 것 같은 불안함에 온몸이 떨려왔다.

“이번 일도, 앞으로 어떤 일이 또 벌어져도 그건 모두 김서원 씨 잘못이 아닙니다. 그 사실 하나만 명심해 주세요.”

괴로운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린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서인우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쳐다봤다.

한참 그렇게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던 김서원은 순간 커다란 돌덩이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서인우가 남긴 말이 귀에 들어왔다.

‘이번 일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건 모두 내 잘못이 아니라고?’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김서원이 몸서리를 쳤다.

분명 엄청난 일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함에 정신없이 방망이질해대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듣는 이 없는 허공에 끊임없이 혼잣말을 되뇌고 있었다.

이미 서늘해진 찬 공기가 닿은 볼에는 눈물 자국이 여러 개의 선을 만들고 있었다.

* * *

밤새 끙끙 앓았다.

온몸이 뜨거웠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고, 팔과 다리에 10킬로짜리 모래주머니를 달아놓은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무엇보다 제일 힘든 건 그 와중에 정신이 너무 말짱하다는 거였다.

차라리 정신까지 멍한 상태라면 좋을 텐데.

전날 최영만과 나눴던 대화, 김서원과 나눴던 대화가 다 흐리멍덩한 기억으로 바래져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침 운동을 못 하였다.

지금 몸 상태로는 아침 시장은 고사하고 출근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서인우 한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거였다.

약통을 뒤져 진통제와 해열제를 때려먹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매일 가던 대로 새벽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박은선이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장 보기 편한 조그만 벤을 중고로 샀다.

물건을 적재할 공간이 크다는 이유로.

하지만, 이제 재료 양도 점점 많아져 새벽시장에 대한 고집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머리가 깨질 듯이 울렸다.

장 봐온 채소와 해물들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오자 중식도의 소리가 들려왔다.

-인우야! 너 거울 좀 봐봐.

“사부, 나 오늘은 장난할 기분도 아니고, 그럴 기운도 없어.”

-지금 장난 아니야. 너 코피 난다. 그것도 쌍코피.

“뭐?”

급하게 휴지로 코를 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뚝 뚝!

뜨거운 코피가 세면대 위에 떨어졌다.

흐르는 물로 코피를 닦아내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급하게 세수를 다시 하고 주방으로 들어가자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며 서인우 주변을 맴돌았다.

-너 결국 만난 거냐? 그 서동수 친구?

서인우가 대답 대신 고개를 서서히 끄덕였다.

-계속 아니라고 발뺌하지? 그런 적 없다고 하지 않아?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걸. 울면서 용서를 빌더라고. 정말 기분 엿 같아!”

-인우야. 너 그래서 아픈 거냐? 네 몸이 이렇게 될 때까지 끙끙거리다 나온 거냐고? 너 지금 상태로 절대 일 못 해.

“걱정하지 마. 내가 할 일은 반드시 해낼 거니까.”

이를 악물고 장사 준비를 위한 채소 손질과 해물 손질을 끝냈다.

머리에서 뎅 뎅 울리던 종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순간 핑 도는 어지러움에 잠시 벽을 잡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막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세상이 깜깜해지더니 갑자기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툭!

-인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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