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이러다가 잔에 담긴 술이 다 쏟아질 것 같았다.
최영만이 심하게 떨리는 오른손을 맥없이 테이블에 뚝 떨어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최영만의 얼굴에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웃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저씨 아들 동훈이 형은 잘 지내고 있나요?”
“뭐?”
놀랐는지, 당황했는지 최영만의 목소리가 심하게 크게 나왔다.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 아저씨를 오해하고 의심하는 거 정말 힘듭니다.”
“무슨….”
결국 최영만이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냐고 묻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아저씨 아들 최동훈이 우리 아빠 돌아가시기 전에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었나요?”
“뭐? 교통사고?”
최영만이 잠시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꾹 다문 입을 열어 술잔을 비웠다.
“운전하다 보면 가벼운 접촉사고는 한 번씩 있기 마련이다. 아마 운전이 서툴 때 한두 번 접촉사고를 냈던 것도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벼운 접촉사고 확실한 건가요?”
“그, 그럼. 차만 살짝 찌그러졌지, 별문제 될 거 없는 작은 사고였어.”
그런데, 왜?
말하면서 서인우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술잔을 잡은 손은 심하게 떨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최영만이 떨리는 손으로 술을 따라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술기운이라도 빌려야 된다는 것처럼.
서인우는 그런 최영만을 바라보며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기를 바랬다.
아니, 반드시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우가 말을 꺼내면서부터 보여주는 눈빛과 행동들이 점점 확신을 안겨주고 있었다.
“정말 가벼운 접촉사고였습니까? 길 가던 사람을 차로 친 게 아니고요? 그것도 술을 마신 상태로 말입니다!”
평상시보다 높아진 서인우의 목소리에 흰머리 가득한 최영만이 잔뜩 주눅이 들어 보였다.
서인우를 겁내고 있지는 않을 거다.
분명 드러내기 두려운 진실을 겁내는 거겠지.
“너…너 도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갑자기 찾아와서 나한테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거냔 말이다.”
“아빠… 아저씨를 끝까지 믿고 좋아했던 제 아빠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들었습니다.”
서인우의 눈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북받치는 감정에 가까스로 내뱉은 아빠라는 소리를 들은 최영만의 어깨가 흔들렸다.
“흐흑!”
“아저씨, 그럴 리 없잖아요? 제발 내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 달란 말입니다.”
“내가…내가 그땐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됐었던 거야.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제 아들 살리자고 ….”
“으악!”
서인우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동물이 포효하는 듯한 어둡고 무거운 소리가 서인우에게서 흘러나왔다.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렸지만, 지금 서인우도 최영만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흐흑!”
여전히 커다란 어깨를 흔들며 이제는 거의 오열하는 최영만이 서인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우리 동훈이 인생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되겠니?”
거칠게 손을 빼낸 서인우가 최영만을 노려봤다.
“네 아빠와 내 아들 동훈이를 사이에 두고 선택을 해야했단 말이다. 죽을죄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다른 선택의 기회가 없었어.”
“어떻게 아저씨가 아빠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제발…아니라고 말하란 말이야!”
최영만이 주섬주섬 일어나 더러운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 마세요! 절대, 절대로 용서 못 해!”
“나도, 이런 선택을 하게 한 김형식도 용서하지 마라. 정말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조금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이야!”
소리를 버럭 지른 서인우가 거칠게 일어나 가게를 빠져나갔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남아있는 최영만의 흐느끼는 소리만 작은 가게에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 * *
“아버지. 아! 회장님. 참 대단하십니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던 김원상이 손뼉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대꾸도 하기 귀찮다는 표정으로 김형식이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아들도 이렇게 잘 케어하시고,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멀쩡하게 이 회장직을 맡고 계시다니 말입니다.”
“그게 힘인 거야. 네 놈은 흉내도 못 내는 힘 말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죠. 내가 이 자리에 앉으면 또 어떤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될지 어떻게 압니까?”
김형식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크게 비웃었다.
“막강한 힘? 네 주제에?”
“정 궁금하면 이제 저한테 좀 맡겨보시면 어떻습니까? 이런저런 구설수에 계속 [만가복] 이름만 더럽히지 말고 말입니다.”
“뭐야? 건방진 놈. 기사 보고 화가 나서 이러는 건 알겠는데, 선 넘지 마라!”
이 정도쯤이면 눈꼬리를 내리깔며 눈치를 실실 보던 김원상이 전과 다르게 여전히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나 여쭙죠. 그 기사 보고 내가 정말 열이 많이 받았었는데, 그게 어느 대목을 보고 그랬을 것 같습니까?”
매서운 눈빛이 김원상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이번에도 역시 김원상이 그 눈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지금 이 아비랑 장난하자는 거냐?”
“여쭙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일 너를 심신 불안정한 환자로 그려야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는 거였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래서 아버지도 역시 저를 잘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김원상이 목소리에 힘을 줘 또박또박 한 마디씩 말했다.
“나는 그 셰프의 다리를 부러트려서 심사에 못 오게 해야 아들이 간신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게 화가 나는 거라구요!”
흥분한 김원상이 앞에 놓인 신문을 움켜쥐어 구겨 버렸다.
구겨진 신문을 테이블에 힘주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난 김원상이 아버지 김형식의 눈을 가까이 다가가 노려봤다.
“내가 반드시 보여드리죠. 어떻게 [서풍]을 발밑으로 끌어 내리는지. 두고 보시란 말입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눈빛이군.”
김형식의 입가에 슬며시 자리 잡는 비릿한 미소를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그대로 회장실을 박차고 나오던 김원상이 마침 회장실로 다가오는 차성철 팀장과 마주쳤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차성철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김원상이 순간 화난 표정을 감쪽같이 지우며 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 * *
최영만과 헤어져 무작정 집을 향해 걸었다.
가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 잠깐잠깐 멈춰 섰다가 또다시 걸었다.
아무리 받아들이려 해도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최영만과 울며 쏟아낸 말들이 다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주 기분 나쁜 악몽을.
또다시 걸음이 멈췄다.
이번엔 다리에 힘이 풀려서가 아니라 그냥 하늘을 쳐다보고 싶었다.
캄캄한 하늘에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그래도 어딘가 작게라도 빛나는 별이 있다면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별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자주 가던 술집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어! 어떻게 혼자 왔네?”
“안녕하세요. 저 매운 어묵탕에 소주 한 병 주세요.”
주로 앉는 구석 자리에 앉아 다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사람들.
심각한 대화에 얼굴이 붉어진 사람들.
부부인지 연인인지, 아니면 불륜인지 모를 커플들.
모두 그들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며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술집 사장이 접시에 담긴 오이와 작은 그릇에 담긴 과자를 먼저 내와 소주 뚜껑을 따서는 한 잔 따라주었다.
“웬일로 혼자인지는 모르겠는데 천천히 마셔.”
“네, 감사합니다.”
어묵탕이 나오기도 전에 술병의 반을 비웠다.
기분은 더럽고 술은 썼다.
혀끝에서 쓴맛이 느껴질수록 더 퍼붓고 싶었다.
뭐 때문인지 몸을 혹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또 한잔 쓴 술을 들이부었다.
“어묵탕 나왔어, 별일 없는 거지?”
술집 사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네, 그냥 술 취해서 푹 자려고 그럽니다. 한 병 더 주세요.”
“그래, 가끔은 술이 약이 될 때도 있으니까. 그럼 안주 잘 챙겨 먹으면서 마셔.”
얼큰한 어묵 국물이 들어가자 오래 비웠던 위장에 싸르르한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 전 술을 들이부을 때와는 또 조금 다른 그런 싸르르함이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이준형이 떠올랐다.
하긴, 이런 심정 이런 상황에 떠오르는 유일한 친구니까.
핸드폰을 들어 이준형의 이름을 찾아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춰버렸다.
지금 서인우가 알고 있는 진실을 누군가에게 뱉어낼 자신이 없었다.
모든 고민과 기쁨을 함께하는 가장 친한 이준형마저도.
다시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술잔을 비웠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최영만이 말한 대로 절대 용서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할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나약해지면 안 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를 죽게 한 범인을 찾았는데, 왜 통쾌하지 않은 건지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복잡한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그 순간 술집 사장님의 반기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혼자 왔습니까?”
“네. 그냥 한잔만 하고 가려고요.”
대답하며 전에 자주 앉았던 자리를 둘러보던 김서원의 눈에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듯한 서인우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혼자 마시고 있는 거예요?”
“아! 김서원 씨.”
서인우의 눈이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으로 살짝 흔들렸다.
최근 들어 계속해왔던 걱정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김형식의 악행을 다 알게 됐을 때도 이 여자와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식구로 지낼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도 전에 김서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하필 가장 감정이 고조된 지금, 이 순간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혼자 마시고 있었습니다. 곧 일어날 겁니다.”
김서원이 머뭇거리고 있는 걸 알았지만 같이 한잔하자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눈치챈 듯 다른 테이블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김서원의 뒷모습이 슬퍼 보였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죄가 있다면 그런 놈의 자식이라는 거지.’
서인우는 말로 내뱉지 못한 생각을 술과 함께 삼켰다.
추가로 주문한 소주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으며 술집 사장이 슬쩍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그런 모든 상황이 다 싫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김서원과 마주 앉아있을 자신이 없었다.
새 술의 뚜껑을 열어 바로 잔을 채웠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어졌다.
어묵탕에 둥둥 떠 있는 어묵은 두 배 크기로 불어있었다.
하나라도 입에 넣으면 목 안에 콱 막혀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았다.
그저 매운 국물만 떠먹으며 술을 마셨다.
앞쪽 빈자리에 앉은 김서원의 테이블에도 소주 한 병과 연기 나는 어묵탕이 놓였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쓴웃음이 나왔다.
끝까지 같이 가자고, 어떤 상황에도 우린 다 같이 식구라고 그렇게 말해놓고는….
같은 술집에 같은 안주를 시켜놓고 따로 떨어져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두 사람.
그런 상황을 만든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게 너무 싫어 김서원이라는 이름 대신 제시카로 살고 싶어 했던 여자인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남은 술을 단숨에 다 비워버렸다.
띵하는 어지러움에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테이블 위에 놓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서원이 있는 자리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한마디 전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김서원 씨.”
김서원이 말없이 슬픈 눈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오늘은 내가 참 못났습니다. 딱 하루 오늘만 좀 못날 테니까 이해해주세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계산하고 술집을 나와 몇 걸음 채 걷지 않았을 때였다.
뒤에서 서인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인우 씨.”
김서원이었다.
“딱 하루 못난 서인우 씨와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안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