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유재철입니다.
“안녕하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직 오픈 전이죠? 지금 백화점 입구에 와있는데, 10분만 시간 좀 내봐요, 잠시 봅시다.
“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식당 오픈까지 1시간도 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유재철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전부터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던 느낌 또한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오픈 전에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는 서인우가 간단한 설명과 함께 급하게 자리를 비우는 모습에 윤지영과 정다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아마도 유재철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더 긴장한 듯 보였다.
슬쩍 쳐다본 박은선은 그런 그들의 눈길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명옥과 열심히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
굳게 닫힌 백화점 입구 한쪽에 서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유재철의 모습이 보였다.
“왔어요? 시간 없으니까 본론만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재철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났다.
“서인우씨가 말한 최영만이라는 사람과 그 아들 최동훈…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뭐가 있다니요?”
“아들 최영훈은 지금 유명 전자 회사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서동수 사장님이 죽기 1년 전에 교통사고를 냈었던 기록이 있었습니다.”
“교통사고요?”
유재철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보였다.
“이게 사고 기록입니다. 아마 회사에 막 입사했을 때인 것 같은데, 이걸 파보다 보니 좀 이상한 것들이 계속 얽혀 나오더란 말입니다.”
마른침을 삼킨 서인우가 물었다.
“이상한 것들이라면…?”
“단순 접촉사고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처음 접수했던 파출소에서 수소문한 결과 최동훈이 그때 술을 마신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럼 음주운전이라는 말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
유재철이 서인우가 보고 있는 서류의 뒷장을 꺼내서 보였다.
“그리고 사고 한 달 후 피해자 아버지의 통장에 오천이 들어갔어요. 그전에 현금도 더 오갔을 겁니다.”
“피, 피해자는요?”
“그게…서류상에는 아무런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피해자의 행방을 힘들게 추적하다 보니 한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더라고요.”
“네?”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놀라 커진 눈으로 유재철을 바라봤다.
“그럼 그 사고로 상해를 입은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정리하자면 음주운전으로 길 가는 사람을 친 최동훈이 단순 접촉사고로 기록을 남기고 지금 멀쩡하게 대기업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지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잠시 휘청거리는 몸을 벽에 기댄 서인우가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일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서인우가 믿고 따르던 최영만이 벌인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확실한 건가요?”
유재철이 말없이 서인우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제가 아저씨를 만나봐야겠습니다. 유 부장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요.”
“이해합니다. 그럼 이 자료 가져가세요. 그리고, 오늘은 요리에만 집중하십시오. 이 일이 서인우 씨 요리에 지장을 주게 되면 최만수 회장님한테 꾸지람 듣습니다.”
“네, 최대한 잊고 요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식당으로 돌아온 서인우를 말없이 지켜보던 윤지영이 조용히 주방으로 따라갔다.
“오빠, 무슨 일이야? 얼굴색이 너무 안 좋은데….”
웍을 손질하고 있던 안상훈과 만두 만들기 삼매경에 빠져있던 박은선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뭐 좀 알아볼 게 있는데, 우선 오늘 장사부터 잘해야 하겠지? 다들 걱정하지 마시고 오픈 준비합시다.”
윤지영이 다시 한번 서인우와 눈을 마주치고 밖으로 나가자 중식도의 소리가 들렸다.
-너 머리 깨지게 한 그 일이냐? 서동수의 친구?
‘응,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점점 현실이 되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 사부.’
-진실은 절대 덮을 수 없다는 거 몰라? 만약 네가 알고 있는 내용이 진실이라면 어떻게든 밝혀진다. 지금처럼 말이야.
‘그래도 난 아직 못 믿겠어. 아저씨를 만나서 직접 물어볼 거야.’
-정말 믿고 싶지 않다면 너만 잊어버리면 되는 거야. 그냥 땅속 깊이 묻어버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두렵지만 반드시 알아낼 거야.’
중식도와 대화하느라 더 굳어버린 서인우의 표정을 보며 안상훈이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혹시 제 사고에 관한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박은선이 들을까 조심조심 쳐다보며 묻는 안상훈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그 일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나중에 알아보면 되는 일이니,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신경 안 쓰이게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바로 손질해놓은 채소들과 고기, 해물들을 다시 점검했다.
빠른 속도로 쌓여가는 만두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부, 오늘도 파이팅하자고.’
-그래, 머릿속에 있는 잡생각은 떨쳐버려. 지난번처럼 나 혼자 둥둥 떠 있는 그런 사고 치지 말고.
‘알았어. 걱정하지 마.’
“어서 오세요, 서풍입니다.”
오픈을 알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온 식당에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주방 안에 짜장과 짬뽕 향이 가득했다.
게다가 고소한 고기 튀김 냄새에 짭조름한 해물 냄새, 매콤한 불향이 주방을 가득 채운 열기와 섞여 사라질 줄 몰랐다.
주문을 알리는 화면이 깜빡거리는 것과 동시에 주방으로 들어온 윤지영이 박은선과 이명옥을 향해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보이는 곳에서 직접 만두를 만들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테이블마다 만두 주문이 끊이질 않아요.”
“거 잘됐어라. 밖에서 보면 옆모습은 좀 봐줄 만합디까?”
“네, 아주 멋지게 보여요. 파이팅!”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박은선을 따라 수줍은 듯 웃으며 이명옥이 어정쩡하게 손을 올렸다 내려놨다.
시간이 12시를 향해 가면서 대기 줄은 점점 더 길어졌다.
만두와 요리 주문하는 손님이 많은 날은 테이블 회전도 그만큼 더 늦어졌다.
띵!
완성된 요리를 가지러 주방에 들어온 정다운이 벌게진 얼굴로 정신없이 음식을 가지고 나갔다.
박은선까지 홀에 합류해 다들 일당백으로 열심히 뛰어주었다.
띵!
백 짬뽕 두 개, 탕수육 하나.
박은선과 윤지영이 달려와 쟁반을 들고 막 가려는 걸 붙잡고 물었다.
“지금 대기가 몇 번까지 있나요?”
“방금 번호 남긴 손님이 24번 대기에요. 백화점이니 그나마 다행이에요. 쇼핑하다가 오면 되니까요.”
“아!”
안상훈과 서인우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으러 왔다가 기다리며 쇼핑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두 남자가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특히 살면서 쇼핑이라면 30분을 넘겨본 적이 없는 서인우한테는 완전 다른 세계 이야기인 듯했다.
환풍기와 에어컨이 열 일을 하고 있는데도 주방이 열기로 가득했다.
정신없이 볶고 삶고 튀기고 하며 이것저것 만들어 내느라 목 뒤 옷깃이 젖어 있었다.
“안 셰프님 다리 괜찮으세요?”
“갈수록 저 의자는 그림의 떡이네요.”
오늘도 잠시 엉덩이 한 번 붙여보지 못한 안상훈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입은 웃고 있었다.
내가 만든 음식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은 에너지 음료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안상훈의 발목은 거의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휴, 이제 대기 손님 없어요.”
윤지영이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지?”
“응, 힘은 드는데 이게 돈 냄새가 솔솔 나니까 기운이 또 팍팍 솟아난단 말이지.”
두 팔을 들어 근육을 만들어 내는 윤지영을 보고 있자니 서인우 역시 피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 엿본 홀에는 빈 테이블 없이 꽉 찬 사람들이 제각각 본인들의 스토리를 열심히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정다운이 후닥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주방에서 나가려던 윤지영이 그런 정다운을 보고 다시 발걸음을 안으로 향했다.
“다운 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 이거 봤어요? 이 기사 말이에요.”
“뭔데 그래?”
“그 [만가복] 늙은이 있잖아요. 나쁜 놈.”
“김형식 회장?”
만가복과 김형식이라는 이름에 서인우도 안상훈도 긴장되는 눈으로 정다운에게 다가왔다.
“네, 지난번 자수네 뭐네 쌩 쇼를 하더니 벌금형으로 끝났어요.”
“뭐? 그럴 리가….”
심신 미약한 아들을 위하는 어긋난 부정은 잘못이나, 피해자에게 겁만 주려고 했다는 것, 그런 의도보다 일이 커지자 바로 자수하고 수습하려 했다는 점에서 실형이 내려지지는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분명 먼저 손을 쓴 걸 거예요. 왜 드라마에서 보면 돈 많은 놈들은 다 힘 있는 변호사 사서 벌도 안 받고 빠져나가잖아요?”
“정말 여우 같은 늙은이네. 진짜 열받아.”
정다운과 윤지영이 씩씩거리며 서로 욕 베틀을 하고 있는데, 막상 서인우와 안상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
힘의 차이를 느껴서일까?
제대로 굳어진 표정만큼이나 입도 굳어 버린 것 같았다.
김형식에게는 이 세상이 뜻대로 되어만 가는 살맛 나는 곳일 거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사람이 살맛 나는 세상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 더 성공해야 했다.
그와 같은 눈높이에 서서 경쟁하고 싶었다.
당당하게 실력으로.
* * *
백화점을 마감하자마자 최영만의 [양자강]을 찾았다.
미리 연락 없이 무조건 달려왔다.
오늘 못 만나면 내일 다시 올 생각으로.
다행히 아직 영업시간이라 최영만이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어! 인우야. 우리 서 사장님이 바쁜데 웬일이냐, 연락도 없이?”
“아직 가게에 계실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동안 잘 계셨죠?”
“나야 뭐 하루하루가 똑같지. 이 나이 돼봐. 달라지는 건 주름하고 건강뿐이야.”
말을 하며 갑자기 찾아온 서인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빈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잠깐만 앉아있어. 오랜만인데 술 한 잔 줄까?”
“가게 비우셔도 괜찮으시면 밖으로 나가시죠? 제가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아, 이제 어엿한 백화점 중식당 사장이라는 거지? 이런 구석진 동네 가게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백화점 말이야.”
“매번 아저씨가 사주셨으니까 저도 한 번 쯤은 사드리고 싶어서요. 어서 준비하고 나오세요.”
서인우는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농담하고 살갑게 대하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중식도의 얘기와 유재철을 만나 들은 얘기들로 머릿속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게에서 나와 제육볶음으로 유명한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서인우가 전에 갔던 갈빗집으로 가자고 졸랐지만, 아무래도 저렴한 곳을 일부러 택한 것 같았다.
서인우가 대접한다는 말 때문에.
진심으로 서인우를 아끼고 챙겨주는 이런 아저씨가 절대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
서인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을 따라주고, 밑반찬도 자기 가까이 놓아주는 최영만을 보며 너무 혼란스러웠다.
제육볶음 2인분과 소주를 시키고 차마 최영만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 서인우는 냉수만 두 잔째 들이켜고 있었다.
“인우 네가 오늘 많이 바빴나 보구나. 물만 계속 들이켜는 거 보니까. 그러고 보니 얼굴도 까칠한 게 어디 아프냐?”
“아니에요. 오늘 손님이 좀 많았어요. 여기 물이 시원하고 맛있네요.”
“에이 무슨 물이 맛있을라고.”
최영만이 다시 비어있는 서인우의 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따라만 놔. 그러다 물배 차서 제육볶음도 못 먹겠다.”
막 부친 작고 동그란 김치전하고 시원해 보이는 물김치, 콩나물과 어묵볶음이 가지런히 놓인 테이블에 소주잔과 소주가 놓였다.
“먼저 한 잔 받으세요.”
“어. 그래, 그래.”
오랜만에 찾은 서인우가 반가워 연신 싱글벙글한 최영만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최영만이 잔에 입을 가져가는 걸 보자마자 바로 술을 비워버렸다.
“천천히 마셔라. 아직 안주도 안 나왔는데.”
“아저씨, 저 오늘 정말 미칠 것 같아서 왔어요. 여기가 답답하고 뜨거운 불이 붙은 거 같다고요.”
가슴을 쿵쿵 세게 치며 말하는 서인우를 최영만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인우야! 너 오늘 무슨 일 있어?”
빈 잔에 다시 술을 부어 연신 두 잔을 들이켰다.
“이, 이놈이 오늘 왜 이래? 무슨 일이야?”
“아저씨. 아저씨는 저한테 진실만을 얘기해 주셨죠? 한 번도, 단 한 번도 거짓을 말씀하신 적은 없죠? 절대!”
“뭐?”
잔을 들던 최영만의 손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서인우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이미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