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마지막 손님까지 전부 나가고 정다운과 윤지영이 정리를 한창 하고 있었다.
“나 오랜만에 왔는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요? 새우면 사업 진행 상황도 얘기할 겸 해서.”
정다운이 윤지영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안 셰프님한테는 인우 네가 일하면서 간략하게 말씀드려.”
“그래. 지영인 시간 괜찮아?”
“나? 나야 낼모레 오프라 얼마든지 콜이지. 다운 씨는 피곤하지 않겠어?”
“저도 좋아요.”
백화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프랜차이즈 호프집 2층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 오랜만이네. 우리 대학교 때 많이 갔었는데?”
“맞아. 여기 안주가 워낙 푸짐해서 우리 단골이었지.”
정다운과 윤지영이 메뉴판에 얼굴을 박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고시 공부하는 줄 알겠네.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나 배고픈가? 다 맛있어 보여. 다운 씨, 우리 뭐 먹을까?”
“우선 치킨 골뱅이 세트는 무조건 시켜야겠죠?”
“당연하지. 그리고 얼큰 어묵탕하고 음…살찌니까 짝태 먹을까?”
“그래요. 가볍고 좋아요.”
지금 이렇게 안주를 시키면서 살찌는 걸 걱정하는 건가?
그리고 뭐가 가볍다는 건지, 도저히 알다가도 모를 그들만의 대화법이었다.
시작은 가볍게 생맥 한 잔씩이었다.
배부르다는 이유로 주종이 소주로 바뀌면서 서인우만 빼고 다들 술이 술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 새우면이 이제 엠씨 백화점 식품관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얼굴이 발그레해진 윤지영이 이준형을 쳐다봤다.
“네. 다음 달부터 입점하기로 했습니다.”
“거기 식품관이 제일 크지 않나? 정말 대박이다.”
“뭐 그런 큰일을 제가 또 해냈지….”
“박정원 대표님이 역시 능력자시긴 하네요.”
“제가….”
“우리 아저씨가 운이 좋아요. 그런 파트너랑 일하면서 많이 배울 거고요.”
갑자기 큰 잔에 소주를 따라 원샷을 한 이준형이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OEM 맡은 공장에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알기나 합니까?”
분명 억울한 표정이었다.
눈치 빠른 윤지영이 이미 거의 다 먹어 찾기 힘든 안주 속에서 골뱅이를 애써 찾아 이준형 입에 쏙 넣었다.
“안주 먹으면서 마셔요. 앞으로 새우면 사업을 짊어질 이준형 씨가 건강해야 우리가 안심하죠.”
“그렇기는 하죠.”
그새 입이 귀에 걸린 이준형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내가 그 공장에 처음 간 날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렀는데, 그 얘기 해 줄까?”
“정말요? 얘기해 봐요. 재미있겠다.”
박정원을 쫓아가 처음 공장 청소했던 일과 그날 삼겹살을 먹으면서 있었던 일들을 신이 나 얘기하는 이준형의 얼굴에 건강한 생기가 넘쳐흘렀다.
단지 젊어서만은 아닐 거다.
저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저절로 만들어지는 얼굴일 거다.
서인우는 그런 이준형의 얼굴을 보면서 지금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아빠에게 한 번 더 감사함을 느꼈다.
“이제 박정원 대표님과 공동 투자하는 사업인 만큼 그 수입구조도 완전히 달라지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준형이 네가 더 바빠지겠다.”
“지난번에 네가 그랬잖아. 이제 돈 쓸어 담느라 바빠질 거라고. 들어간 돈도 많으니까 정말 제대로 해볼 생각이다.”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윤지영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지영아. 무슨 고민 있어?”
“나 요즘 여기서 일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왜 표정이 하나도 재미없는 사람같이 그래요?”
이준형의 질문에 윤지영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서인우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윤지영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나 지금 캐나다 가는 거 심각하게 고민 중이야.”
“왜? 너 꼭 가고 싶어 했잖아?”
정다운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지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서 마켓팅 공부 1년 더하느니 여기서 실전 경험을 쌓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내가 했던 고민을 그대로 하고 있군.”
이준형이 윤지영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처음 인우랑 이 사업을 시작하려 마음먹었을 때 똑같은 고민을 했어요. 그때 내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런 대기업에만 원서를 내고 있었으니까.”
윤지영이 금세 잔을 비우고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결심하게 된 거예요?”
“딱 하나만 봤어요.”
“딱 하나?”
서인우도 궁금하다는 눈으로 이준형을 쳐다봤다.
“내가 청춘을 걸어도 될 만큼 가능성이 있는지 그것만 고민했습니다.”
“가능성?”
“동업을 결심한 결정적인 사람, 바로 서인우의 가능성을 봤으니까. 인우와 함께 하는 일이라면 뭐든 성공할 자신 있다는 것과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거.”
이준형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뜻대로 되지 않고 실패한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죠. 해보지 않아도 우리는 최선을 다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도 비슷해요. 난 오빠의 근성을 익히 알고 있어서 이 일에 내 젊음을 불사르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 끓어오르네요.”
“언니!”
조용히 듣고 있던 정다운이 꽤 묵직한 목소리로 윤지영을 불렀다.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만, 언니의 심장이 원하는 일을 해요.”
정다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난…아시다시피 힘든 가정 형편 때문에 일찍부터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많은 사람을 접해봤어요. 그런데, 요즘 가슴이 뛰는 걸 느껴요.”
“가슴이 안 뛰면 병원에 가야….”
이준형이 툭 말을 던지자 윤지영이 조용히 숟가락을 바로 잡아 들었다.
“쏴리. 갑자기 너무 진지해서.”
정다운이 나머지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렁그렁한 눈이 반달 모양을 만들며 크게 웃고 있었다.
“월급이 많아지면서 집에서 누나 역할도 제대로 하고, 인격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으며 어울려 일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다운 씨가 받는 월급은 정당한 거야. 우리한테 그만큼의 힘이 되어주니까 받는 거라고.”
이준형이 빈 잔들에 다시 술을 채웠다.
“자 우리 거국적으로 부딪혀볼까?”
쨍!
경쾌한 소리를 내며 투명한 잔에 술이 출렁거렸다.
“혹시 말입니다. 윤지영 씨가 캐나다행을 취소할 생각이 있다면, 새우면 사업과 먹물 만두 사업을 같이 진행하면 좋을 것 같은데…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입니다.”
서인우가 윤지영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지영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 그거 외엔 바라는 게 없다. 너처럼 똑 부러진 사람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그야말로 최고지. 하지만, 강요는 하고 싶지 않아.”
이준형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나, 나도 강요는 아닙니다. 뭐 지영씨가 강요한다고 따를 사람도 아니고, 안 그래요?”
“그럼요. 이제 내가 좀 파악이 되나 보네?”
윤지영이 웃으며 이준형의 잔을 부딪쳤다.
“내가 보니까 지금 새우면 사업에 만두 사업까지 일은 점점 커지는데, 그걸 체계적으로 운영할 사람이 필요하긴 한 상태에요.”
“그렇죠. 인우 이놈은 누가 뭐래도 요리에 죽고 요리에 살 사람이니까.”
이준형이 서인우의 잔을 쨍 부딪치며 웃었다.
“내가 딱 일주일만 더 고민해보고 통보하겠습니다. 그럼 반대하는 사람은 없는 거죠?”
“그건 우리도 고민을 좀….”
“뭐라고요?”
“농담입니다. 지영 씨 같은 인재는 두 팔 벌려 환영이죠. 안 그렇냐 인우야?”
서인우가 대답 대신 따뜻한 미소로 윤지영을 바라봤다.
그 미소가 담고 있는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었다.
적당히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신 술은 그 누구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쌩쌩한 젊음을 자랑하며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다.
안상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아직 출입 카드가 없어서 그래요. 잠시만요, 우리가 처리 하도록 할게요.”
전화를 끊은 안상훈이 서인우를 쳐다보며 다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이명옥 씨가 도착한 지 30분이 넘었는데 아직 오픈 전이라 못 들어오고 있다네요.”
일찍 온다고 분명 그랬는데, 아직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이라 출입 카드가 없는 게 문제였다.
서인우가 급하게 조처를 하고 잠시 후 이명옥이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따 다시 보니까 더 반가워라이.”
“우선 여기 앉아서 계약서 작성하고 우리 식구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 일가족이 같이 일하는 것인갑소?”
일가족?
이제는 정말 매일 보는 가족이 맞는 듯했다.
얼굴색 하나만 안 좋아도 금방 알아차리고 몰래 걱정해주는 사이가 된 그들이 서인우한테는 가장 든든한 재산이었다.
순조롭게 계약서를 작성해서 하나씩 나눠 가진 후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서로 인사를 나눴다.
“여기 식당은 낯빤데기를 보고 사람을 뽑는 건가 본디요, 다들 인물이 빼어나서 하는 말이지라.”
이준형이 새우면 사업으로 자리를 비워 들을 수 있는 얘기인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윤지영은 항상 웃는 얼굴에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삐쩍 마르고 우울한 모습의 정다운이 요즘 부쩍 얼굴이 피는 듯 보였다.
주방 안쪽으로 준비해 둔 기다란 테이블에 먹물 만두를 만들기 위한 만두피와 만두소를 준비해 두었다.
“오전에 출근하면 이곳에서 여기 박은선씨하고 같이 만두를 만들 겁니다.”
“만두라면 내가 정말 자신이 있서라. 그런디, 밖에서 보이는 곳이라 여기 있는 고븐 얼굴들이 있어야 할 턴디 나 같은 쭈구렁 바가지가 있어서 쪼까 거시기헌디요.”
“명옥언니, 이렇게 부르면 되나요?”
박은선이 물었다.
“네? 그냥 아무렇게나 편하게 불러부러요.”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신선한 재료로 만두를 맛있게 만들고 있는지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명옥 언니 인상이 참 좋아요.”
“내가 한때는 동네 총각들이 쫓아오고 했었는디, 세월에 장사 없지라.”
웃으며 손을 깨끗이 씻고 자리에 앉자 이명옥이 완전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깨끗이 닦은 테이블 위에 밀가루를 쫙 흩뿌리더니 만두피를 뚝 잘라 길게 밀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칼로 뚝뚝 자르면서 동시에 밀대로 쓱쓱 세 번 돌리자 넓적한 만두피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든 만두피를 휙휙 던지자 순식간에 쌓이기 시작했다.
유리창 밖에는 정다운과 윤지영이 주방에서는 서인우와 안상훈, 박은선이 동시에 얼이 빠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와, 대박! 이렇게 순식간에 피를 만들어 버린 거예요? 명옥 `언니 손이 보이지 않아요?”
나름 만두 만드는 모양과 속도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보였던 박은선이 한큐에 패배를 인정해 버렸다.
그 뒤가 더 가관이었다.
휙휙 던져 쌓아놓은 만두피가 마르기 전에 만두소를 넣어 왼손으로 그냥 꾹 누르는 듯 하자 만두가 완성되었다.
열심히 만두 끝을 눌러 붙이고 있던 박은선의 손과 눈이 모두 멈춰 버렸다.
“이렇게 대충 붙이면 만두가 터져….”
하지만, 절대 터지지 않을 정도로 만두 끝이 야무지게 꽉 붙어 있었다.
유리창 밖에서 정다운과 윤지영이 환호성과 함께 쌍따봉을 보냈다.
쑥스러운 듯 미소만 지어 보이던 이명옥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내일부터는 반죽부터 지가 해 보면 사장님이 좀 거시기허요? 만두의 시작은 반죽인디.”
서인우도 저절로 엄지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서풍]의 이름으로 팔릴 먹물 만두의 앞날이 환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서인우의 핸드폰이 무겁게 울렸다.
액정에 떠오른 유재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