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정신없는 점심 장사가 얼추 마무리되어 갈 때쯤 안상훈이 통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착하셨어요? 그럼 9층 [서풍 TWO]로 올라오세요.”
핸드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안상훈이 목발을 어깻죽지에 끼웠다.
“사장님. 제가 말씀드린 만두 담당하실 분 도착하셨답니다.”
“아, 그래요? 제가 밖에 주방으로 안내 부탁한다고 얘기해놓을 테니 그냥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정다운의 안내를 받으며 50대쯤 되어 보이는 넉넉한 체구의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쭈뼛쭈뼛 들어왔다.
“안 셰프님. 아따 여서 보니까 억수로 반가워라이. 다리는 이제 좀 거시기허요?”
이게 어느 지역 말이더라….
“네. 잘 지내셨지요? 우선 인사부터 하세요. 여기 이분은….”
“아! 우리 안셰프님 따까리 맞지라? 반갑구마요.”
-푸하하. 따까리? 딱 어울리기는 하네.
당황한 안상훈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반갑습니다. 서인우라고 합니다.”
“낯빤데기가 여자깨나 울렸겠구마. 나는 이명옥이라고 허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쇼잉.”
“사장님, 이명옥 씨가 워낙 걸걸한 성격이시라서… 이분이 여기 사장님이십니다.”
“에? 어린놈이, 아니 어린 분이 여기 사장님이어라? 워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하, 정말 거시기허네.”
넉넉한 체구만큼 웃음소리 또한 호탕했다.
“안셰프님께 얘기는 들었는데, 지금 일하시는 곳은 언제까지 근무하시는 겁니까?”
“거긴 더 일해도 월급도 안 주는 사기꾼이어라. 내일이라도 바로 나올 수 있구마요잉.”
“그렇게 바로 가능하시겠습니까? 정리도 하셔야 할 텐데요.”
“아따 전혀 문제 없서라. 내가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이 몸뚱아리가 문드러질 때까지 일혔는디,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났단 말이어라.”
서인우가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 서인우를 힐끗힐끗 보며 뭔가 망설이는 듯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고 있는 이명옥의 눈이 불안해 보였다.
“여기서 일하시게 되시면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우선 서로 믿을 수 있게 계약서를 작성해서 나눠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 계약서가 있으면 절대 거시기는 못하겄죠잉?”
“네? 거시기? 뭐, 그런 약속이니까요.”
“정말 감사하구만요. 이런 말하기 쪼까 거시기 헌디 제가 만두는 정말 잘 만들어라. 우리 동네 유명한 중국 만두 전문점에서 배웠당께요.”
“그럼 내일 계약서 주고받으면서 시작하도록 하죠. 괜찮으십니까?”
“좋구만요. 나야 월급만 제대로 준다믄 뼈가 으스러지게 일할거구만요.”
서인우와 안상훈이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월급은 전에 받던 곳보다 30만원 더 드리겠습니다. 뼈가 으스러지게 일하시지 마시고, 편하게 가족처럼 일해 주세요.”
“네? 나한테 왜…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디요?”
“여기 안셰프님 소개라서 믿으니까요.”
“정말 감사혀요. 청소도 빨래도 다 자신 있어라.”
“만두 만드는 일만 제대로 솜씨 발휘해 주시면 됩니다.”
이명옥이 눈물을 글썽이며 안상훈을 쳐다봤다.
안상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내일 다른 직원들도 정식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라믄 내일 서둘러 오지라이.”
“조심해 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서인우의 정중한 인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연신 숙이던 이명옥이 안상훈의 손을 덥석 잡으며 또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 이명옥씨 실력 보고 같이 일하자고 하는 거니까 내일 와서 제대로 실력 발휘해 주세요.”
“그건 정말 자신 있당께. 그럼 내일 오겠습니다.”
이명옥이 나가자마자 박은선이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상훈 씨. 저분이야? 만두?”
“응, 내일 계약서 쓰고 정식으로 인사시켜 드릴 거야.”
“그렇구나, 알았어.”
박은선의 얼굴이 아주 편안해졌다.
대충 50은 넘어 보이는 외모에 푸근한 인상이 그 어떤 위화감도 조성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이렇게 서풍의 평화는 유지되어 갔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우르르 여섯 명의 남자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어머, 아저씨.”
정다운의 외침에 다들 고개를 돌려보니 이준형이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잘들 있었어요? 나 없으니까 많이 힘들지?”
정다운도 윤지영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여기 이분들은 우리 새우면을 맡아서 제작해주고 있는 공장 사장님과 직원분들이셔.”
“안녕하세요.”
발 빠르게 주방으로 들어와 소식을 알려준 박은선 덕분에 서인우가 젖은 손을 닦으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서인우입니다.”
“어, 맞네! 맞아. 방송에서 봤던 그 셰프네. 이야, 실물이 더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우린 오늘 여기 이사장 소개로 직원 회식하러 왔어요. 방송 보면서 정말 먹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또 인연이 되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메뉴 천천히 보시고 주문하시면 최선을 다해 끝내주는 요리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서인우가 뒤돌아서자 한기영 사장이 메뉴판을 직원들에게 넘겼다.
“자 뭐든 맘껏 시켜. 나는 짜장면.”
“네?”
“지난번 봤던 코미디 프로에서 한 대로 따라 해봤어. 농담이야, 농담.”
평상시 장난 좋아하는 한기영 사장을 잘 아는 직원들이 한바탕 웃고는 편안하게 메뉴를 골랐다.
“우선 나는 여기 탕수육이 너무 먹어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무조건 탕수육은 하나 시키고, 나머지는 자네들이 알아서 골라봐.”
한기영 사장이 픽한 탕수육과 직원들이 꼭 먹어보고 싶었다는 양장피를 시키고, 각자 식사를 주문했다.
물과 밑반찬을 열심히 나르고 있는 이준형을 보고 한기영 사장이 물었다.
“그럼 이준형 사장은 투잡인건가?”
“저와 조금 전 인사한 서인우 이렇게 둘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입니다.”
“젊은 사람이 그러면 사업체가 두 개인 거네?”
“새우면 사업은 이제 시작입니다. 이런 말 제 입으로 하기 좀 쑥스럽지만 여기 있는 우리 식구들 앞날이 저한테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혀 쑥스러워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오히려 어깨까지 들썩여가며 말하는 이준형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윤지영이 피식 웃었다.
저 너스레는 누구도 못 따라갈 거다.
잘 튀겨진 고기를 윤기 나는 소스에 재빨리 볶아 접시에 수북하게 담았다.
띵!
윤지영이 달려와 접시에 담긴 탕수육 양을 보고는 놀란 눈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오빠, 이거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우리 새우면 제작을 맡아주시는 분들인데 넉넉하게 드려야지.”
“하여튼 우리 오빠는 참 속이 깊어. 가끔 나랑 한 살 차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로 말이야.”
멋진 웃음을 날려 보이며 윤지영이 수북한 탕수육을 들고 한기영 사장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가져갔다.
“주문하신 탕수육 나왔습니다.”
“이거 대자가 아니라 특특대 인데요?”
“사장님이 새우면 제작 잘 부탁드린다고 특별히 넉넉하게 만드셨다고 하네요.”
“이야, 이 윤기 봐라. 요즘은 이 볶먹이 대세긴 해.”
“볶먹이요?”
“응, 찍먹도 부먹도 아니고 볶은 탕수육.”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무기 장착에 들어갔다.
“소스에 볶았는데 어쩜 이렇게 바삭합니까? 이거 진짜 예술이네요.”
“그게 또 여기 서풍의 노하우 아닌가? 그때 방송에서도 튀김옷의 바삭함을 그대로 살리며 볶아내서 감탄을 자아냈었지.”
“사장님이 요리방송 마니아인 줄은 몰랐네요.”
“자네들도 결혼해서 30년 정도 살아봐. 내가 리모컨을 잡아 본 게 어언 몇 년인지 기억도 안 나.”
“그럼 사모님이 요리방송을 좋아하셔서 같이 보신 건가요?”
“그렇지, 내가 사실 그때 생각하면 저 셰프가 곱게 안 보인다니까.”
탕수육을 동시에 두 점 집어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한기영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난 이제 곧 60이고, 저 셰프는 20대인데, 피부 탄력이며 몸매며 같을 수가 있나? 물리적으로 말이야.”
“왜요?”
“우리 마누라가 그 방송 보면서 저 셰프 얼굴만 나오면 나를 요래요래 노려보면서 얼마나 혀를 차던지, 내 참 더러워서.”
눈을 찢어 한껏 노려보는 흉내를 내는 한기영 앞에서 직원들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탕수육 접시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 그때 이곳 분위기는 전혀 모르는 서인우가 완성된 양장피를 들고 유독 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주문하신 양장피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소스를 부어 재빨리 섞어 주며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보여주는 서인우를 빤히 쳐다보던 한기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장님, 뭐 불편하신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서인우셰프라고 했나요?”
“네, 사장님.”
“진짜 열받게 잘생기긴 겁나 잘생겼네. 뭐 먹고 살면 그렇게 피부도 좋고 몸매도 끝내주고 그러나? 쩝!”
“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마지막까지 백만 불짜리 미소를 던져주고 돌아서는 서인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기영의 눈빛은 분명 부러움이었다.
“사장님. 다음 생에….”
“그래야겠지? 이번 생에는 텄지?”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각자 주문한 짬뽕과 짜장면 등 식사까지 푸짐하게 놓이자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꽉 찬 테이블 여기저기서 정겨운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흘러넘쳤다.
그야말로 잘 익어가는 가을 저녁이었다.
* * *
울긋불긋 곱게 물든 나무들로 가득 찬 정원을 지나 있는 이 층 짜리 커다란 카페.
그곳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형식이 말없이 커피만 들이켰다.
“내가 임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별문제는 없는 거겠지요?”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해서 벌어진 어긋난 부정에 포커스를 잘 뒀어요. 의도한 바와 다르게 사건이 커져 먼저 자수하는 형식으로 일을 진행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이런 일에 굳이 내가 임 변호사를 고용한 이유는 잘 알고 있겠지요?”
가지런히 넘긴 은발의 머리를 쓱쓱 누르며 임명진 변호사가 느긋하게 커피 향을 맡고 있었다.
“처음 핸드드립 커피가 유행할 때는 바리스타들이 참 지극 정성이었는데, 요즘은 별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지금 한가하게 커피 맛을 운운하고 있는 거야?’
거액의 돈이 넘어가고도 아직 어떻게 결정 날지 모르는 상황이 기가 막힌 김형식은 자꾸만 입이 마르는 걸 느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나는 그저 임 변호사만 믿습니다.”
“검사장 출신인 내가 이미 여러 번 손을 맞춰본 후배 검사랑 같이 진행하고 있는데 뭐 그리 애가 타 그럽니까? 집행유예로 빼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 말에 조금은 편안해진 듯 커피를 홀짝이는 김형식이 전혀 티 나지 않게 눈만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임 변호사님. 지금 타고 다니시는 차가 벌써 1년은 된 거지요? 1년이면 질릴 때도 됐습니다.”
“에헤이, 내 차 아직 멀쩡합니다.”
“요즘 누가 차 성능 보고 갈아탑니까? 그저 기분전환이지요.”
“아! 그런 건가요?”
낮은 대화 소리 사이사이 작은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렇게 알고 계시고 혹시 모르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럼 좋은 소식 곧 전해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양복 주름을 살짝 다잡은 임명진 변호사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뒤돌아 카페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김형식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