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만두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팔자는 제안을 먼저 꺼낸 사람이 다름 아닌 박은선이었다.
하지만, 남편 안상훈이 새로운 직원을 소개하겠다는 말이 나온 후부터 얼굴색이 어둡게 변했다.
“언니, 뭐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요? 표정이 안 좋은데….”
윤지영이 박은선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상훈 씨. 지금 말한 그 사람 혹시 여자야?”
아!
남편에게 전화해서 울고불고한데다가 마음이 안 좋고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으니….
마침 밖에 인기척이 들리자 정다운과 윤지영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잽싸게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 사람 여자냐고?”
“응, 여자분이셔.”
“몇 살인데?”
“스무 살?”
“뭐?”
박은선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주문이 곧 들어올 듯해서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서인우와 달리 안상훈의 얼굴은 편해 보였다.
“스무 살 여자애? 그 어린 애가 자기한테 전화해서 울고불고했다는 말인 거야, 지금?”
이런… 둘 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서인우는 목 끝까지 나오는 말을 꾹꾹 눌러 참았다.
-서인우, 저 두 사람, 말리지 마. 겁나 재밌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싸움 구경 아니냐?
그런데, 잠깐.
만두인생 10년이 넘었으면 열 살도 안 돼서 시작했다는 거고, [서풍] 없어지고 갔던 식당이면 못해도 4년이나 5년 전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다섯 살에 만두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건가?
뭔가 이상했다.
안상훈이 여전히 웃으며 여유 있는 모습도 이해 안되는 상황이었다.
“저 안 셰프님. [서풍] 없어지고 바로면 최소 4년에서 5년은 됐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 직원분은 다섯 살부터 일하셨다는 말입니까?”
서인우의 질문에 박은선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생각해도 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제야 안상훈이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더 설명하려고 했는데, 자기가 갑자기 파르르 해서 화를 내는 게 너무 귀여워서.”
안상훈이 여전히 웃으며 박은선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에이. 저 두 사람. 이제 나가라고 해. 아니 꺼지라고 해!
서인우도 지금 상황은 좀 보고 있기 거시기했다.
“뭐양? 자기 지금 나한테 장난 친거양?”
박은선의 혀가 갑자기 꼬이기 시작했다.
-인우야. 나 칼 들었다고 전해라.
“자기보다 스무 살 많다고. 그 얘기 하려 했는데, 귀엽게 파르르 하고 말이야.”
크흠.
결국 서인우의 헛기침 소리에 몸을 비비 꼬던 박은선이 마지막으로 주먹을 쥐어 안상훈의 가슴팍을 톡 치고는 홀을 향해 달려 나갔다.
-오늘 하마터면 송장 치를 뻔했다. 나 정말 많이 참았다.
하루하루 알게 되는 안셰프의 발견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듯했다.
좋은… 일인 거지?
* * *
다음 날도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새벽 운동하고 장을 봐온 서인우는 활기찬 하루를 위해 팔을 쭉쭉 펴 스트레칭을 했다.
“사부, 오늘도 파이팅!”
-이런 날에는 바바리 빼입고 낙엽 좀 밟아줘야 하는데.
“사부는 가을을 유독 좋아하나 보네.”
-남자의 계절 아니냐. 네가 아직 인생을 많이 안 살아봐서 그런데, 가을 스산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면 한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내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지.
“기억에도 없는 인생을?”
-너 자꾸 아픈 곳을 찌를래?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
어디서 뭘 봤는지 목소리를 크게 뱉어낸 중식도의 말에 한참을 웃었다.
-다행히 오늘은 기분이 괜찮은 것 같다. 머리 아픈 일은 좀 정리가 된 거냐?
“아니, 아직.”
-그래?
“응, 하지만 그 생각에만 매달려 끙끙거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다 멈췄다.
-잘 생각했다. 네 아빠 서동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아주는구나.
탁탁탁탁.
쓱쓱쓱쓱.
경쾌한 도마 소리와 함께 양파, 양배추 등 채소가 수북이 쌓였다.
전복, 새우, 바지락 등 싱싱한 해물도 각각 손질해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8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안상훈과 박은선이 출근해 주방으로 들어왔다.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사장님 아직 아침 식사 전이죠?”
“네. 조금 있다가 빵이나 한쪽 먹으면….”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이거 좀 드세요.”
많이 본 긴 머리 공주가 서인우를 보고 웃고 있었다.
“이 도시락은…?”
“네, 맞아요. 우리 유진이가 제일 아끼는 공주 도시락이에요.”
안상훈의 표정이 덜 익은 감을 베어 문 듯 떨떠름했다.
“오늘 유진이 체험학습 가는 날인데, 김밥 대신 유부초밥을 싸달라고 하도 졸라서요.”
“그 이유가 뭔지 압니까?”
강한 콧바람을 휭 내뿜으며 안상훈이 물었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이상하게 공손해져야 할 듯한 분위기에 서인우가 눈치를 실실 보며 답했다.
갑자기 박은선이 꺄르르 웃더니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였다.
“김밥은 한 번 먹어봤으니 유부초밥을 만들어서 줘야 한다네요. 이 도시락이 질리면 자기한테도 질릴 거라나 뭐라나.”
“네?”
“여기 이 하트는 유진이가 직접 그린 겁니다.”
유부초밥 위에 삐뚤빼뚤 토마토케첩으로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보고 바로 바라봐서 착시현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상훈의 눈에서 붉은빛이 살짝 나오는 듯 보였다.
“이이는 자기 것에는 하트 안 그려 줬다고 지금까지 이렇게 심통이 나서…하여튼 남자들은 나이를 어디로 먹나 몰라요.”
서인우가 도시락을 받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유부 안에 고기와 다진 채소가 어울려져 있는 모습에 절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사장님은 이거 드시고, 저희는 오늘 만두 빚는 거 연습하려고 일찍 나왔어요.”
“내가 이거 빨리 먹고 하면 됩니다.”
“어차피 이제 제가 할 건데, 연습도 할 겸 해서요. 재료 얼른 내놔요.”
박은선이 웃으며 커다란 통에 담겨 있는 만두소를 힐끗 쳐다봤다.
면 보자기로 덮어놓은 거무스름한 반죽과 완성해놓은 만두소가 담긴 통을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그럼 먼저 만들고 계세요. 이 귀한 유부초밥 맛있게 먹고 커피 한잔하면서 다 같이 만들어요.”
적당히 짭조름하고 고소한 유부초밥이 하나 들어가자, 긴 공복에 잠들어 있던 위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지난번 김밥에 이어 이번 유부초밥도 끝내주는 맛이었다.
아무래도 박은선은 손재주를 타고난 듯 보였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그런데, 이 도시락을 저한테 빌려줬으니 유진이는 뭘 가져갔나요?”
“아, 이 공주가 자기한테 원탑이라 지금 마음속에 원탑인 오빠한테 빌려주는 거라고 우리 유진이가 꼭 전해달라 했습니다.”
“원탑이요? 그런 표현을 할 줄 알아요?”
“무슨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다고 그러더라고요.”
안상훈이 반죽을 툭툭 쳤다.
“하여튼 방송이 애들을 다 망친다니까. 우리 유진이가 얼마나 순수하고 맑은 아이인데….”
한 마디 더하면 저 반죽이 날아올 수도 있겠다 싶은 판단이 선 서인우가 조용히 남은 유부초밥을 해치웠다.
향이 진한 커피를 앞에 놓고 셋이 열심히 만두를 빚었다.
역시 박은선의 솜씨는 서인우와 겨룰 만했다.
속도와 모양에서 절대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딘가 일자리를 찾는 거면 믿을 수 있는 이곳에서 일하기를 바라서 권한 자리였는데, 오히려 서인우에게 큰 도움을 주는 셈이 됐다.
-저 직원 솜씨가 제법이다.
‘내가 인복이 참 많은 것 같아. 너무 든든한데?’
-원래 좋은 사람 옆에는 좋은 사람들이 꼬이는 거지. 그래서 까마귀 노는 데 백로야 가지 마라 그러잖냐?
‘오늘 오후에 만두 담당 직원 한 명 보기로 했어. 이렇게 나가면 곧 만두 판매도 가능할 것 같아.’
-그럼 나한테 야근까지 하라는 거냐? 내가 싫다고 드러누우면 어쩔 건데?
손으로는 열심히 만두를 빚으며 마음속으로 중식도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인우가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렸다.
“사장님. 무슨 재미있는 생각 하세요?”
아차차.
“지금 형수님 만두 만드는 솜씨 보니까 내가 계획했던 만두 판매 사업이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그렇게 계속 웃고 계셨구나.”
휴우.
하마터면 이상한 사람 될 뻔했다.
이제 아무렇지 않게 중식도와 대화하는 게 습관이 돼버린 서인우가 좀 더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에 표정을 바로 잡았다.
정다운과 윤지영도 출근하면서 새로운 하루 영업이 시작되었다.
먹물 만두와 짬뽕.
첫 주문이 들어왔다.
막 빚은 만두를 팔팔 끓는 물에 넣어 동동 떠오르자 안상훈이 건져 접시에 담았다.
서인우가 잡은 웍에 크게 불길이 일었다 사라지며 제대로 불향을 입힌 짬뽕도 완성됐다.
띵!
벨 소리에 정다운이 음식을 가져가 손님 테이블에 놓았다.
그와 동시에 주문 화면이 연달아 번쩍거렸다.
홀이 점점 가득 찰수록 주방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사장님, 짜장면 새우면으로 가능한지 묻는데요?”
“네, 가능합니다.”
윤지영이 답을 듣자마자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모녀로 보이는 두 명의 손님에게 다가갔다.
“가능합니다, 손님.”
“그러면 엄마, 새우면으로 만든 짜장면하고 삼선 볶음밥, 그리고 먹물 만두 이렇게 시킬까?”
“너는 그냥 면으로 먹어도 되잖아? 괜히 나 때문에 그러지 말고 너 먹고 싶은 걸로 시켜.”
“나도 새우면 궁금해서 그래. 오늘 먹어보고 괜찮으면 여기 식품관 가서 사 가자.”
“그럴까?”
가느다란 목에 혈관이 도드라져 보이는 70대로 보이는 엄마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아픈 환자 손님 경험이 많은 윤지영이 자상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른 피해야 할 재료가 있으신가요? 사장님이 손님 건강에 최대한 맞춰 즉석에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엄마는 밀가루만 아니면 됩니다.”
“저…만두피는 밀가루로 만들었는데요. 괜찮으신가요?”
“그건 제가 먹으려고. 엄마는 속만 하나 맛보실 거라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맛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온 윤지영이 조금 전 대화를 그대로 전했다.
아주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한 서인우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안 셰프님. 새우면 짜장면과 만두 제가 만들겠습니다. 삼선 볶음밥 준비해 주세요.”
끓는 물에 잘 삶기만 하면 되는 만두는 평상시 안상훈 담당이었다.
안상훈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바로 볶음밥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이 끓어오르자 만들어놓은 만두 일 인분과 따로 만두를 세 개 꺼내 만두피를 벗겨 달걀에 굴려 끓는 물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안상훈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서인우답다는 듯이.
띵!
벨 소리에 윤지영이 주방으로 들어오자 서인우가 만두를 두 개의 접시로 구분해 담아 주었다.
“아, 이게 글루텐 프리?”
“맞아. 달걀로 만들었어.”
“좋았어.”
물을 마시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모녀의 테이블에 두 종류의 만두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 만두는 어머니께예요. 밀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만두니까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에구머니나. 이렇게 손님이 많아 바쁜데 나 때문에 따로 만드신 거예요?”
“우리 사장님 성격입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맛있게 드셔 주시면 됩니다.”
옆에서 짬뽕과 탕수육을 열심히 먹고 있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저, 뭐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윤지영을 향해 질문을 던진 트렌치코트 남자가 조금 전 테이블에 올려놓은 만두를 가리켰다.
“저 밀가루 없는 만두는 도대체 뭐로 만든 겁니까?”
“사장님이 달걀로 만두피를 대신하셨다고 했습니다. 손님도 혹시 밀가루를 못 드시나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질문하며 자연스럽게 넘어간 시선에는 짬뽕 그릇이 이미 바닥을 휑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완뽕입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윤지영이 다른 주문을 받는 동안 계속해서 그 모녀의 식사를 지켜보던 트렌치코트 남자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전체적으로 휙 둘러보더니 계산을 마치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때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