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뭘 기대하고 있었을까?
제이는 연신 눈을 깜빡거리며 서인우의 답을 기다렸다.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습니다.”
“네?”
제이와 달리 숟가락을 든 매니저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제이를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얼른 먹자. 따뜻할 때.”
“분명 내 눈을 보며 땀을 흘렸는데….”
“이거 겁나 뜨거워. 불 앞에서 이런 요리를 막 만들어 왔는데, 땀이 안 나면 비정상이지. 잘 먹겠습니다.”
먹는 것에 진심인 매니저 덕분에 위기를 넘긴 서인우가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말과 함께 미소를 지어 날려 보냈다.
서인우가 나가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제이가 물었다.
“오빠, 방금 봤지? 나보고 진짜 환하게 웃는 거.”
“응, 봤어. 지난번에 나보고도 저렇게 웃었어. 저 사장 원래 웃는 상이던데. 야, 진짜 끝내준다.”
시종일관 윤기 좔좔 흐르는 마파두부에만 정신이 꽂힌 매니저가 제이의 눈총을 애써 외면하며 자다가도 뺏어 먹고 싶을 정도로 정말이지 맛있게 음식을 먹어 치웠다.
“인정, 진짜 인정이다.”
“그렇게 맛있어?”
“중화요리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고급스러운 맛을 내는 것 같아.”
“그래? 그러면 우리 다음 주에도 여기 와서 먹을까?”
“나야 좋지…아니야, 너 관리 들어가야 하니까….”
제이가 급하게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같이 와서 오빠만 먹으면 되지. 난 구경만 할게.”
“그러려면 퇴근 후에 나 혼자….”
“안 돼! 절대 혼자 오는 건 안 돼! 알았어?”
“어? 아, 알았어.”
면이 불고 있는 줄도 모르고 뭘 생각하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제이 앞에 손을 흔들어 보인 매니저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이거 안 먹어?”
“입은 먹고 싶은데, 그러면 나 얼굴 통통 붓겠지?”
“응. 그래.”
영혼 없는 대답과 함께 백 짬뽕을 자기 앞으로 가져간 매니저가 조금 전 앞접시에 덜어놓은 마파두부를 슬쩍 밀어주었다.
“대신 이거라도 먹어.”
아쉬운 듯 백 짬뽕을 쳐다보다 포기했는지 마파두부를 조금 입에 넣었다.
“뭐야? 이거 뭔데 이렇게 맛있어?”
“끝내주지? 다음에 뭐 먹어 보면 좋을지 벌써 기대된다.”
“응, 나도 다음번이 기대되.”
서로 다른 기대를 하는 듯했지만,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펴며 남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매니저가 다 먹은 그릇들을 여러 장 사진 찍은 제이가 핸드폰으로 뭔가를 막 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제이의 핸드폰을 빼앗아 든 매니저가 다급하게 물었다.
“너 이거 또 어디 올리려고 그러지?”
“이제 이런 취미생활도 못 하게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네가 지난번에 이 식당 왔다 간 뒤로 올린 사진 때문에 여기 사장하고 사귀는 거 아니냐고 기자들이 난리도 아니었어.”
걱정스러운 매니저의 눈빛과 달리 제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정말? 그걸 왜 이제 얘기해?”
“괜히 너 스트레스 받을까 봐 그랬지.”
“나 이 바닥 생활 벌써 7년 차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핸드폰을 다시 가져간 제이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 * *
마치 핸드폰 화면으로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들이밀고 보고 있던 [만가복] 마포점 차은석 셰프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렇게 아들을 완전히 보내버리는구나.”
요즘 툭하면 싸우고 그만두겠다고 엄포를 놓긴 했지만, 막상 김형식이 짜놓은 판을 보니 그저 김원상이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아들이라?
하긴, 요즘 김원상을 보면 멀쩡한 정신으로 살고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기는 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습니까?”
갑자기 주방으로 들어온 김원상을 보고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떨어트린 차은석이 잽싸게 바닥에 널브러진 핸드폰을 주웠다.
“누구랑 내 욕이라도 신나게 하고 있었나 보군.”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사람 기분 나쁘게.”
“죄송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핸드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깊이 찔러넣은 차은석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김원상을 쳐다봤다.
“뭐 하실 말씀 있으셔서 오신 거 아닙니까?”
“차 셰프가 고집 꺾고 만든 치즈밥이 인기가 많다고 그 말 하러 왔습니다.”
“그래서요?”
“그만둘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한 번 더 못 박아 두려고.”
점점 욕심이 아버지 김형식을 닮아가는 건가?
조금 전 솔솔 피어났던 안쓰러운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후임을 찾아놓고 그만두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도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차 셰프가 그래도 실력은 좋아서 그 정도 솜씨 있는 후임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든 구해보죠. 할 말 다 하셨으면 저는 다시 음식 만들어야 해서.”
결국 위로 한마디 하지 못하고 뒤돌아서 웍을 정리하던 차은석이 또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김원상은 저녁 장사가 마무리되어 가면서 급히 피곤함을 느꼈다.
카운터에서 정리를 하고 있던 오승연 홀 매니저에게 마감을 부탁하고 일찍 들어가 쉴 생각이었다.
핸드폰 벨이 울려대기 전까지는.
“네가 웬일로 전화냐?”
-가게에 있지?
“응. 이제 퇴근하려고 하는데.”
-5분만 기다려. 나 곧 도착하니까.
갑자기 전화해 앞뒤 사정도 말하지 않고 무조건 기다리라는 동생 김서원의 태도에 짜증이 올라왔다.
언젠가부터 뭔가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짜증이 심하게 났다.
이게 예부터 내려오는 화병이라는 건지.
혼자 그런 생각이 들자 피식 알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들이 보면 아쉬울 것 하나 없이 다 가진 사람일 텐데….
그런 부러움을 온몸에 받으며 행복에 겨워 살아야 하는데, 하루하루가 재미없고 짜증 났다.
“안녕하세요.”
입구 쪽에서부터 동생 김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홀 매니저 오승연이 반갑게 대답해주었다.
“오빠, 괜찮아?”
“나? 안 괜찮지. 오늘 손님이 엄청 많았다. 돈은 많이 벌었는데, 억수로 피곤하다.”
오빠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걸 본 김서원은 이걸 안심해야 하는 건지, 언젠가 알게 될 사실을 대비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디 가서 맥주 한 잔만 딱 하고 집에 들어가 푹 쉬어.”
“피곤한데 무슨 술이냐? 그냥 들어가서 잠이나 잘란다.”
“그러지 말고 나랑 딱 한 잔만 해.”
평상시 같지 않게 착 달라붙어 졸라대는 김서원이 낯설게 느껴지며 동시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너 나한테 뭐 할 말 있지?”
얼른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김서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차은석도 어딘지 이상한 낌새를 보였는데…
이건 분명 뭔가 있다.
“알았어. 그럼 딱 맥주 한 잔만 마시고 각자 갈 길 가자고.”
“그럴 게 아니라 오빠네 집에서 한잔할까? 나 한 번도 안 가본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이렇게 친하게 구는 거지?
또 친한 남매인척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뭐 그러던지. 차는?”
“집에서 가까우니까 여기 세워두지 뭐. 가자.”
오승연에게 다시 인사를 하며 뒤돌아 나가는 김서원이 오늘은 쬐끔 진짜 동생처럼 느껴졌다.
지난번 술자리에서 김서원이 했던 말들이 김원상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다.
물론 그 평화는 바닥에 닿지 않는 어딘가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온전한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집 앞 멕시코 음식점에서 타고를 하나 시켜 포장해 집으로 들어갔다.
항상 혼자 들어가던 불 꺼진 집에 동생 김서원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현관문을 열었다.
이 모든 게 끔찍할 정도로 낯설었다.
동생이 독일에 갔던 5년 전 아버지 김형식의 불만과 강요, 협박 등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시작했던 독립.
그 독립이 주는 해방감보다 아무도 없이 혼자라는 외로움이 점점 더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우와, 여기 한강이 한눈에 보이네. 오빠네 집 엄청 부자인가 보다.”
“뭐?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한다.”
“나 사는 원룸 전체가 여기 거실보다 작은데…이렇게 빈부 차가 나도 되는 건가?”
“그러니까 왜 방을 네 맘대로 구해서 그래? 아빠나 나한테 얘기했으면 쓸만한 걸로 구해줬을 텐데….”
“그랬겠지. 으리으리한 집에서 온갖 간섭과 강요 속에 난 점점 미쳐갔겠지. 오빠 집 화장실만 하다 해도 난 내 집이 좋아.”
겉에 걸쳤던 남색 맥코트를 벗어 식탁 의자 위에 올려놓은 김원상이 와인잔을 두 개 꺼냈다.
“와인 괜찮지?”
“알콜 있는 거면 실험실 불붙이는 램프도 괜찮아.”
어색한 분위기에 농담을 건네봐도 아무 반응이 없는 김원상이 정말 우울증인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잠시 한 김서원이 혼자 멋쩍게 웃었다.
냉장고에 있던 치즈를 몇 개 꺼내 접시에 놓고, 조금 전 포장해온 나초를 펼쳐놓았다.
와인병을 기울이자 또로로록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검붉은 와인이 잔에 조금씩 차올랐다.
“오빠는 여자친구 없어?”
“그런 거 안 키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안 키우는 게 아니라 못 키우는 거겠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제 본론을 말해보지. 오늘 왜 온 거냐?”
결국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닥쳐왔다.
“오빠 오늘 정말 바빴나 보네?”
“그랬다니까. 아까부터 피곤하다고 했잖아. 왜?”
김서원이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가방에 넣어둔 테블릿을 꺼내 전원 버튼을 눌렀다.
“뭔데?”
말없이 김형식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는 기사를 펼쳐 김원상 앞에 놓아주었다.
한 줄 한 줄 시선이 내려갈수록 김원상의 얼굴이 비참하게 굳어갔다.
결국 마지막 글자까지 빼놓지 않고 읽은 김원상의 입에서 한동안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빠!”
“우리 아버지 정말 대단한 분 아니냐? 난 이 사람, 우리 아버지 말이야 정말 존경한다.”
“오빠….”
오빠 김원상에게도 필요한 말은 똑 부러지게 했던 김서원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말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이거였어. 너 오기 전에 차은석 셰프가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나를 보고 놀라 떨어트렸다. 내용을 보니 그럴 만도 하네.”
와인잔을 힘주어 휙 한 번 돌리더니 바로 입에 한가득 머금고는 삼켜버렸다.
“오늘따라 이 와인이 왜 이렇게 달지? 서원아, 나 정말 우울증이 맞나 보다. 우리 아버지는 역시 내가 절대 흉내도 못 낸다니까.”
“오빠, 그만해.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야?”
“당해? 내가? 아니야. 아버지가 나를 보호해 주고 있는 거잖아. ”
화가 난 김서원도 잔에 담긴 와인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입술 안쪽이 진한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버지한테 오빠 생각을 확실히 말해. 정말 후계자 자리를 원한다면 그것도 확고히 해놓고 말이야.”
“내가 그럴 힘이 있을 것 같아? 넌 아무것도 몰라.”
“제발, 아빠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지 말라고. 오빠의 인생을 살아.”
“내 인생? 난 한 번도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빈 잔에 와인을 따르고 있는 김원상의 눈에는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서풍]의 그 셰프 말이야. 다리가 부러져서도 심사에 참석했어. 아버지가 나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그런 짓까지 벌였다고.”
“오빠! 정신 차려. 진심 아니잖아? 그 날일 오빠도 화나고 자존심 상했잖아?”
“아니, 넌 몰라.”
김원상이 완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와인잔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내가 정말 화나고 자존심 상한 건, 그런 상황에서도…아버지가 그런 일까지 벌였는데도…내가 서인우한테 졌다는 사실이야.”
김원상이 입 밖으로 뱉어버린 말들이 무거운 공기 사이에 소용돌이치듯이 돌아다녔다.
그런 정적을 깨며 김원상이 낮게 한 마디 더했다.
“언젠가 내 손으로 끝낼 거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