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서인우의 목소리가 홀에까지 살짝 흘러나왔다.
화들짝 놀란 윤지영이 당황하지 않으려 애쓰며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의 계산을 도왔다.
“안녕히 가세요.”
“잘 먹었습니다. 또 올게요.”
“감사합니다.”
다행히 홀에서 그와 관련해 웅성거리는 움직임은 없었다.
손님이 나가자 바로 주방으로 뛰어 들어온 윤지영이 평상시와 다르게 인상을 쓰고 있는 서인우를 향해 다가갔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놀란 윤지영 곁으로 다가온 정다운이 핸드폰을 켜서 조금 전 화면을 펼쳐 보여주었다.
“나도 이거 봤는데… 그래도 김형식 회장이라는 사람이 양심은 있는 거 아니야? 끝까지 모른 척하지 않고 자수했다잖아?”
“다 거짓이야. 지금 최만수 회장님 지시로 김형식이 안셰프님 사고를 사주했다는 걸 밝혀냈는데…그쪽에서 먼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선수 친 거라고.”
“그게…무슨 말이야, 오빠? 그럼 이 내용이 다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야?”
서인우의 눈빛이 강하게 이글거렸다.
윤지영과 정다운 모두 처음 보는 모습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더구나 안상훈의 아내 박은선이 무슨 일인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게 보이자 얼른 주방을 빠져나갔다.
“뭐예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정다운 씨가 뭐 좀 물어볼 게 있었나 봐요. 이거 새로 들어온 주문인가요?”
“네, 별일 없는 거 맞죠? 좀 전에 주방에서 무슨 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윤지영과 정다운이 슬쩍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니래요. 그런데, 유진이 한 번 데려오세요. 그렇게 귀엽다는 데 나만 못 봐서 너무 보고 싶어요.”
“네? 우리 유진이가 오면 영업에 방해될지 모르는데….”
“방해되긴 할 것 같아요.”
박은선이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난 그 귀여움에 녹아버릴 것 같거든요. 장사고 뭐고 유진이하고만 놀고 싶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제야 작은 웃음을 내놓는 박은선을 보며 윤지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기 남편의 사고가 누군가 고의로 한 짓이라는 걸 알면 얼마나 무섭고 받아들이기 힘들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 내용을 부디 보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새로 주문받은 탕수육을 만드는 서인우의 머릿속이 막 기름에 넣은 고기보다 더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이런 시베리안허스키 같은 놈, 이런 개새. 시방새. 와씨, 인우야. 뭐 좀 더 쎈 욕 없냐? 진짜 열받네.
‘자신은 엄청난 아들 사랑에 눈이 멀어 잠깐 실수한 거고, 강기태라는 사람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갈 생각인 거지.’
-이거 빨리 완성해놓고 유재철하고 통화해봐. 우리 쪽에서도 뭔가 액션을 취해야지.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냐?
‘알았어.’
완성된 소스에 잘 튀겨진 고기를 부어 재빨리 볶았다.
연한 갈색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탕수육을 완성해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았다.
띵!
요리가 완성됐음을 알리는 벨소리에 박은선이 달려왔다.
뭔가 주방의 분위기를 살피려는 듯 고개를 쑥 빼서 슬쩍 보고는 접시를 들고 다시 몸을 돌렸다.
다행히 안상훈이 여느 때처럼 아내 박은선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심시켜 주었다.
서인우는 조금 전 기사를 보고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주는 안상훈이 고마웠다.
잠시 쉴 새도 없이 주문 화면에 짜장면 두 개가 올라와 있었다.
시키지 않아도 벌써 면을 삶고 있는 안상훈을 보고는 잠시 주방 뒤쪽 직원 통로로 나가 유재철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저 서인우입니다.”
-기사 보셨군요?
“네, 어떻게 된 건가요?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여우 같은 노인네가 선수 친 겁니다. 게다가 강기태가 김형식과 손잡기 전에 벌였던 범죄 기록이 전부 공개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확보한 건 강기태의 녹음자료와 범행 기록들 뿐이고, 가장 중요한 건 강기태의 자백이었습니다.
“모두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미 강기태의 전과 사실과 범죄 기록이 공개됐기 때문에 그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거죠. 좀 더 중요한 증거를 찾아보겠습니다.
답답한 심정이 짧은 한숨으로 나왔다.
“강기태에게 다른 증거는 없습니까?”
-김형식이 워낙 철저하게 뒤처리해놨습니다. 통장 거래 내역 조차 전혀 없어요.
“그래도 뭔가 있을 겁니다. 저도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나도 이렇게는 절대 못 있어요. 어떻게 해서든 김형식 같은 인간이 지은 죄는 밝히도록 할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일 보십시오.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치고도 여전히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빠의 사고에 대해 알고 싶었다.
다시 통화버튼을 누른 서인우가 초조하게 신호음이 울리는 걸 듣고 있었다.
“유재철 씨. 강기태를 만나야겠습니다.”
서인우의 목소리에 강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강기태를 만나 직접 듣고 싶었다.
그가 알고 있는 아빠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실타래처럼 엉킨 머리를 흔들어 보이고는 새로 들어온 주문을 확인했다.
백짬뽕과 볶음밥을 준비하고 있던 서인우와 안상훈이 동시에 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죠?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죠?”
“내가 나가 보겠습니다.”
홀에 나가보니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한 여성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열심히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박은선과 윤지영도 함께 섞여 있었다.
“정다운씨. 무슨 일입니까? 누가 왔어요?”
서인우가 정다운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하고 있던 순간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던 여자가 손을 흔들며 서인우를 불렀다.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주위 사람들 얼굴 사이에 작은 얼굴에 꽉 찬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지난번에는 못 알아봐서 실수를 했지만, 이제 서인우도 정확히 아는 얼굴 아이돌 제이였다.
“안녕하세요, 제이씨.”
녹색 체크가 멋스러운 바바리를 입고 서인우를 향해 반갑게 다가오는 제이는 누가 봐도 연예인이었다.
“이제 내 이름 기억하네요?”
“아, 그럼요.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때는 제가 워낙….”
“됐어요. 그때 굴욕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요.”
“식사하시러 오신 겁니까?”
옆에서 정다운이 서인우의 팔을 툭 치며 잡아끌었다.
“오늘 여기 백화점에서 화보 촬영 있었어요. 사장님만 모르고 있지. 저 손님들 다 그래서 온 거고요.”
어쩐지 오늘따라 머릿속은 복잡한데, 주문이 쉴 틈이 없다 했었다.
“다운씨는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정다운이 오른손으로 머리를 한 번 휙 들어 올리더니 서인우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새 가까이 다가온 윤지영과 박은선이 반은 넋이 나간 상태로 정다운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 나랑 제이씨가 맞팔이라는 사실 벌써 잊었어요?”
그 말에 윤지영이 정다운의 팔짱을 끼며 몸을 비비 꼬았다.
“다운씨, 정말이야? 자기 저 제이씨랑 맞팔이야?”
그새 정다운의 어깨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 안마를 하고 있던 박은선 또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때마침 정다운 앞으로 다가온 제이가 반갑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윤지영과 박은선의 눈에 하트가 넘쳐흘렀다.
“촬영 때문에 왔다가 지난번 너무 맛있게 먹었던 백 짬뽕 생각나서 올라왔어요.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네.”
“제이 씨. 내가 혹시 몰라 안쪽 작은 룸 비워 놨는데, 식사하고 가세요.”
“역시 내 맞팔이라 다르네. 그럼 잽싸게 한 그릇 비우고 갈께요. 사장님, 지난번처럼 끝내주는 국물 부탁해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제이에서 서인우로 서인우에서 다시 정다운으로 정신없이 옮겨갔다.
정다운을 따라 안쪽 작은 룸으로 들어간 제이와 매니저가 그제야 조금 편안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려는 서인우를 끌고 제이가 있는 룸으로 들어간 정다운이 메뉴판을 펼쳐 보였다.
“제이씨.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천히 메뉴 고르시면 특별히 더 신경을 써서 맛있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매니저 오빠가 시간 없다고 안된다고 했는데 내가 졸라서 왔어요. 진짜 내 이름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기억합니다. 절대 안 잊습니다.”
제이가 수줍은 듯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백짬뽕 하나랑 오빠 아까 뭐 먹고 싶다고 했지?”
“마파부두 부탁합니다.”
“네, 맛있게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룸을 빠져나가자마자 아직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걸 보고 잠시 당황한 서인우는 주방으로 가는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조금 전 주문 들어온 볶음밥을 완성해 내놓은 안상훈이 서인우를 슬쩍 쳐다봤다.
“사장님 나가니까 밖이 더 소란스러워지던데, 무슨 일입니까?”
“혹시 아이돌 가수 제이라고 아세요?”
“제이요? 노래도 하고 작년에 드라마도 찍었던 그 아이돌이요?”
“네, 엄청 유명한가 봅니다. 그 사람이 와서….”
서인우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안상훈이 평상시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목발을 들고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지금은 홀에 없어요, 방금 룸으로 들어갔어요.”
“우리 유진이 최애 아이돌이예요. 싸인 받아줘야 하는데….”
서인우가 좀 전에 봤던 박은선의 모습이 떠올라 픽 웃음을 내 보였다.
“형수님이 열심히 사진도 찍고 촬영도 하시던데요? 이미 유진이가 좋아할 사진은 다 가지고 계실 겁니다.”
이번에는 중식도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어디냐? 빨리 앞장 서!
‘이미 주문받고 왔는데, 어딜 앞장서라는 거야?’
-너 밀크공주 제이 씨 오면 나 데리고 간다고 약속 했냐, 안했냐? 너 혼자 그렇게 얼굴 보고 인사하고 그러기 있냐 없냐. 응?
‘제이 씨가 밀크공주야?’
-너는 팬이 될 자격이 없어. 유독 얼굴이 하얘서 별명이 밀크공주고 키 164에 몸무게, 고건 프라이버시고. 외동이며 집은 서초동.
‘사부. 무슨 제이 사생팬인 줄.’
-내가 나설 수만 있으면 사생팬 되고도 남지. 이렇게 어딘가에 내 영혼이 깃들 거면 제이 씨 마이크에나 깃들지. 하늘이 원망스럽다.
‘됐고! 제이씨가 주문한 백 짬뽕하고 마파두부나 맛있게 만들자고.’
-마파두부를 주문했어? 그럼 또 내가 이 신급 실력을 선보여야지.
주문 화면을 확인하고 바로 백 짬뽕을 준비하는 안상훈을 보고, 서인우 역시 마파두부를 준비했다.
부드러운 연두부를 으깨지는 거 하나 없이 깨끗한 단면으로 잘라내는 모습에 안상훈의 웍질이 순간 멈춰버렸다.
“안 셰프님, 음식 탑니다.”
“아, 정말 신기한 광경이라 그만.”
끓는 물에 소금을 살짝 넣어 연두부를 데쳐낸 후 생강과 파를 빠른 속도로 다졌다.
그리고는 이어서 쾅쾅 마늘을 두드려 다지고, 청홍피망을 잘게 다져놓았다.
웍에 다진 고기를 볶다가 잘게 다져둔 마늘, 생강, 파를 넣고 볶았다.
매콤한 맛을 내줄 두반장과 간장, 굴소스를 넣어 볶기 시작하자 맛있는 향이 주방에 가득했다.
고기가 익어갈 때 다진 청홍피망을 넣고 육수를 부어 졸이다 전분물을 넣어 완성했다.
모든 과정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안상훈이 수줍은 엄지척을 해 보였다.
띵!
-인우 네가 들고 가! 나도 같이.
‘바빠.’
-아아앙.
하마터면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중식도의 예고 없이 훅 들어온 애교에 하는 수 없이 앞치마에 중식 도를 넣어 직접 마파두부와 백 짬뽕을 들고 룸으로 향했다.
‘내가 정말 소원 들어주는 거야.’
-사랑해!
“이렇게 직접 가져다주시는 거예요? 혹시 제이는 특별하니까?”
큰 눈을 깜빡거리며 제이가 쳐다보고 웃자 주머니 안에 넣어둔 중식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이러다 들키겠어.’
순간 긴장한 서인우의 이마에 작고 하얀 손을 올린 제이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긴장했어요? 사장님 이마에 땀 나요.”
제대로 오해한 제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매니저 또한 다른 의미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마파두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