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백화점 밖으로 나온 서인우는 조용히 대화할 만한 곳을 물색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술자리는 좀 그렇고, 아무래도 조용한 카페가 좋을 듯했다.
백화점 뒤쪽으로 보이는 3층짜리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에 들어가 사람들이 거의 없는 벽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믿을 수 있는 거겠지?
‘최만수 회장님이 소개해주셨으니까 믿을 수 있어.’
-그래도 모르는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알아봐. 너한테는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일일 테니까.
잠시 중식도와 속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핸드폰 액정에 유재철이라는 이름이 둥둥 떠오르며 전화가 울렸다.
“네, 서인우입니다.”
-백화점 근처인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뒤쪽에 3층짜리 카페로 오시면 됩니다. 2층에 앉아 있습니다.”
-알았어요.
5분 조금 넘어가자 2층으로 올라와 잠시 두리번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갈색 가죽 재킷에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서인우 씨?”
“아, 네. 유재철 씨인가요?”
“반갑습니다. 유재철입니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모습에 잠시 당황한 서인우가 바로 유재철이 내민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넸다.
진한 커피를 앞에 놓고 유재철이 서인우를 힐끗 쳐다봤다.
그 눈빛이 매섭게 느껴진 서인우는 갑자기 이 남자의 직업이 궁금했다.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한 눈빛이었다.
“가장 궁금해할 일부터 먼저 얘기하도록 하죠. 안상훈 씨 사고 말입니다.”
“안상훈 씨 느낌대로 고의적인 사고가 맞습니까?”
“네. [만가복] 김형식 회장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던 거죠?”
서인우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개새. 아휴, 열받아.
중식도의 흥분한 외침이 그대로 전달됐다.
유재철이 강기태와 김형식이 찍힌 사진을 내보였다.
“혹시 이 두 사람 중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기 이 사람은 김형식 회장이고, 옆에 있는 사람은 처음 보는….”
서인우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이 남자가 안상훈 씨를 오토바이로 친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본 적 있는 겁니까?”
“네.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영준 셰프님 가게….”
“[셰프의 주방] 말씀하시는 거죠?”
“네, 어떻게 그것까지 알고 계시네요?”
입꼬리만 살짝 올려 잠시 웃어 보인 유재철이 금세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이었다.
“이름은 강기태. 나이는 마흔둘. 두 딸과 와이프 이렇게 네 가족이 살고 있어요.”
“아내도 있고 심지어 딸이 둘이나 있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김형식이 벌인 더러운 짓들은 다 이 남자가 맡아서 했어요. 당연히 강기태의 입을 막기 위해 김형식이 두 딸을 두고 협박을 하고 있었고.”
가족을 두고 협박하는 짓을 또 하다니.
서인우는 아빠가 당했던 협박이 떠올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만수 회장님이 두 딸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걸 보고 나서야 하나씩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 서동수 사장님 때부터 시작이었더라고요.”
-내 친구 서동수 말하는 거지? 자세히 좀 물어봐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서인우는 잠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느라 짧게 심호흡을 했다.
“아버지 얘기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김형식 회장하고는 고향 친구였고, 언젠가부터 아버지에게 비밀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괴롭혔다고 들었습니다.”
“서동수 사장님이 살아계실 때 음식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큰 소동이 있었습니다. 일주일 영업정지도 먹었다고 들었는데, 모르셨나요?”
‘사부, 이게 무슨 말이야? 영업정지라니?’
-너랑 중국 여행 갔던 때 그때 말하는 것 같다. 서동수가 어차피 일주일 문 닫게 된 거 처음 갖는 휴가라고 생각한다고 했었어.
‘나한테는 아빠가 큰맘 먹고 휴가 낸 거라고 했는데, 영업정지라는 복잡한 상태로 어떻게 여행을 갈 생각을 했던 거지? 전혀 내색도 하지 않고 말이야.’
-네 아빠가 그런 사람이다. 그릇이 컸다, 엄청.
중식도와 속으로 대화하느라 잠시 멍해 있던 서인우를 빤히 쳐다보며 유재철이 다시 물었다.
“이미 지난 일들인데, 괜히 내가 들쑤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 일이 현재 제 사람들에게 이어지는 거 아닙니까? 정확히 알아야죠.”
“그 영업정지까지 가게 됐던 이물질 사건도 이 남자 강기태한테 시켰던 일이라고 합니다.”
서인우의 턱 근육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서동수 사장님이 협박도 받았었다는데, 그것도 그자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김형식이 벌인 더러운 짓들은 다 강기태의 손을 빌린 것입니다.”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가족을 두고 협박했었다고…그 모든 게 강기태와 김형식의 짓인 줄은 몰랐네요.”
“형사들이 조사 시작했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한테 숨겨진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거죠.”
-그 뱀 같은 혀로 또 어떻게 넘어갈지 모르지. 내가 그냥 단칼에, 아오.
유재철이 서인우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원래 한번 물면 끝까지 파헤치는 버릇이 있어서 이번 일 조사하다가 서동수 사장 실족사 건을 좀 살펴봤는데 말입니다.”
-어, 어. 뭔가 중요한 얘기가 나올 것 같다. 와씨, 떨려 죽겠네.
서인우도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서인우가 준비됐다는 표정으로 유재철의 눈을 강하게 쳐다봤다.
“조사하다 보니 강기태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감이 딱 와서 강하게 떠봤습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서동수 사장 실족사 아니지? 살인 사건이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요?”
서인우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건 절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릅니다가 아니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유재철의 날카로운 눈빛이 서인우의 심장을 깊이 찌르듯 파고들었다.
* * *
형사들이 다녀간 후 김형식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는 강기태가 그동안의 범행 사실을 밝혔다는 건 누군가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 줬다는 얘기였다.
‘딸들에게 절대 자신이 범죄자인 걸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자가 갑자기 왜 돌변한 걸까?’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한참 스크롤 하던 김형식이 번호 하나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남형사, 나 김형식이요.”
-회장님이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거기 강남 경찰서에 신명훈이라는 형사가 나를 찾아왔는데, 혹시 알고 있는 내용인가?”
-아, 잠시만요. 밖에 나가서 받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형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 회장님. 혹시 안상훈이라는 사람하고 무슨 원한 관계라도 있으십니까?
“남 형사, 나 잘 알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나? 안상훈이 누군데?”
-회장님. 이번에는 그렇게 모르쇠로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강기태라는 사람을 사주해 안상훈을 죽이려 했던 모든 증거가 이미 밝혀졌습니다.
“증거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회장님이 강기태한테 사건을 지시한 내용이 녹음된 파일이 공개됐습니다. 그래서 영장까지 발부된 거고요.
‘이 교활한 자식 나랑 통화하면서 녹음을 했다는 말이지?’
김형식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회장님. 듣고 계신가요?
“남 형사도 그 녹음을 들었으면 알 거 아닌가? 난 분명히 죽이라고 한 적은 없었네. 경쟁에서 지고 낙담할 내 아들이 불쌍해서 그날 팔만 좀 못 쓰게 해달라고 한 것을….”
-회장님이 지시한 건 사실이니까요.
“내 아들이 더는 힘들어하는 꼴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네. 이 잘못된 부정이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고 말았어.”
꽉 잠긴 목소리에 중간중간 훌쩍이는 듯한 소리까지 들렸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하지만, 진실이 왜곡되는 건 참을 수 없네.”
잠시 끊겼던 목소리가 조용히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조용히 진실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남 형사는 정말 말길을 금방 알아차려서 좋아. 강남점 매출은 여전히 잘 나오고 있지?”
-그럼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고해요.”
전화를 끊은 김형식이 잔뜩 일그러졌던 눈썹을 엄지손톱으로 쓱쓱 긁어댔다.
‘잠시 방심 했더니 감히 나와 한 통화를 녹음해! 좋게 넘어가 주려 했더니 안 되겠군. 강기태 너는 이제 아웃이야. 모든 걸 떠안고 사라져 줘야겠어.’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옮긴 김형식이 책상 아래 서랍 안쪽에서 노트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걸 노란 서류 봉투에 넣은 후 밀봉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김 비서, 잠깐 들어와.”
노크 소리와 함께 김 비서가 문을 열자 김형식이 책상 위 봉투를 가리켰다.
“이거 퀵 서비스 하나 보내줘야겠어. 강남경찰서 남우식 형사 앞으로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봉투를 가지고 김 비서가 회장실 밖을 나가자 김형식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 * *
유재철을 만난 후로 서인우의 머릿속에 시한폭탄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종일 째깍째깍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불안하고 답답했다.
“사장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안상훈이 그런 서인우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안 셰프님 사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네? 그래서 사장님 표정이 어두웠던 거군요. 맞습니까? 고의로 낸 사고가?”
“유감스럽지만, 저희와 경쟁했던 [만가복] 김형식이 한 짓이 맞습니다. 강기태라는 자가 직접 움직였고, 모든 사실을 밝혔습니다.”
평상시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안상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매일 반복되는 강행군으로 가라앉을 새도 없이 퉁퉁 부어있는 안상훈의 발목을 보니 서인우도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지금 형사들이 조사하고 있다고 하니까 모든 사실이 다 밝혀질 겁니다.”
다시 한번 안상훈의 다리로 시선을 옮긴 서인우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다친 다리가 바로 좋아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 국민이 김형식 그자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합니다.”
“네, 진실은 반드시 밝혀야죠. 이게 그냥 단순 사고인 줄 알고 넘어갔으면, 또 어떤 범행을 저질렀을지 모릅니다. 이 기회에 확실히 벌을 받게 해야 합니다.”
서인우가 안상훈의 어깨를 두 손으로 힘주어 잡았다.
“셰프님 고생이 헛되지 않게 반드시 성공해 보답하겠습니다.”
“네, 사장님 성공이 제 성공이니까요. 이제 더 힘내서….”
안상훈의 뒷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다운이 큰 목소리로 다급하게 서인우를 찾았다.
“왜 그래요, 다운 씨? 밖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사장님, 그리고 안 셰프님 이것 좀 보세요.”
정다운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서인우 앞으로 들이밀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갑자기….”
핸드폰 화면에 보이는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서인우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하고 있었다.
“사장님 뭔데 그래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만가복] 김형식 회장의 끔찍한 아들 사랑이 불러온 비극.
유명한 요리대회에서 우승 자리를 뺏긴 아들 김원상이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더는 욕심 내지 말자는 김형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 백화점 중식당 입점 경쟁에 참여했다.
결국 아들의 패배를 또다시 볼 수 없었던 김형식 회장이 강기태라는 전과자를 매수해 상대측 셰프를 겁을 줘서 심사 날 참여를 못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더 큰 성과를 보여 김형식 회장에게 점수를 딸 욕심에 강기태가 결국 오토바이를 이용해 상대측 셰프를 쳐 왼쪽 발목에 골절상을 입히게 되었다.
뒤늦게 알게 된 김형식 회장이 이 모든 사실을 경찰에 자수하며 언론에 밝혀지게 되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서인우의 얼굴이 무섭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