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순간 어두워진 서인우의 표정을 바로 읽은 최만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도 알고 있었구만.”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두 분이 고향 친구분이셨고, 요리도 같이 배워 시작하셨습니다.”
최만수도 장비서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유재철로부터 들은 사실들은 고향 친구면서 평생 같은 길을 가자고 약속한 사람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런 소중한 관계가 어쩌다가….”
장비서가 안타깝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난 알 것 같네. 만약 내가 여기 서인우 사장이랑 비슷한 또래였다면 나도 열등감에 빠져 이 친구를 미워했을 수도 있어.”
이런 게 연륜이라는 건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해도 두 사람 사이에 오갔을 감정들을 미뤄 짐작하는 듯했다.
“서풍의 서동수 사장의 요리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숱한 협박을 했나 보던데, 그 일을 맡아 했던 것도 이번 안상훈 셰프 사건과 같은 놈이더라고.”
“네?”
“놀라는 걸 보니 그것까진 몰랐나 보군.”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안 셰프님 사고는 조사가 다 끝난 건가요?”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에 잠시 시선을 뺏긴 최만수가 양장피를 눈으로 가리켰다.
“자꾸 손님이 들어오는군. 장사가 잘돼서 다행이야. 당연한 결과지만. 우선 우리 맛있게 식사하고 전화번호 주고 갈 테니까 자세한 건 그 사람한테 듣도록 해.”
“그 사람이라면…?”
“내가 이 조사를 맡긴 친구. 이름은 유재철이고 만나보면 많은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서인우는 정다운이 주문받는 소리를 들으며 급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새로 주문 들어온 칠리 중하 새우를 요리하기 위해 튀김반죽을 만들어 큼직한 새우를 튀겼다.
동시에 소스를 만들기 위해 양파와 당근, 파프리카를 잘게 다지던 서인우가 잠시 딴생각에 빠져 중식도를 손에서 놓쳐버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중식도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정신 안 차려! 서인우!
화들짝 놀란 서인우가 중식도를 잡으며 잽싸게 안상훈을 쳐다봤다.
다행히 완성된 백 짬뽕을 그릇에 담느라 정신없던 안상훈이 그 장면을 보지는 못한 듯했다.
‘미안해, 사부.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뭐야?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정신이 나갔어? 저 인간이 봤으면 기절했을 거다. 다리도 부러졌는데, 머리도 깨졌으면 어쩔 뻔했어?
‘안셰프 다리 저렇게 만든 놈이 우리 아빠한테 요리 비결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놈이래.’
-뭐? 아씨, 이번에는 내가 놀라서 공중으로 튕겨 나갈 뻔 했네. 자세히 좀 말해봐.
‘그 조사를 맡았던 사람이랑 연락해보기로 했어. 자세한 건 만나서 들어보려고.’
-야, 너 제대로 알아보고 토씨 하나 빼지 말고 전달해야 해. 아니 나랑 같이 가던지.
‘우선 칠리 새우부터 내놓고.’
띵!
완성된 칠리 새우를 가져가며 박은선이 서인우의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왜요?”
“아니에요, 사장님. 좀 전에 주방으로 들어가실 때 얼굴이 창백한 게 핏기가 하나도 없어서 걱정돼서요.”
“그랬어요? 멀쩡합니다.”
그 와중에 고개를 쏙 집어넣어 남편 안상훈과 눈인사를 하는 둘의 미소가 행복해 보였다.
아직 일한 지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박은선의 표정이 밝아 보여 마음이 놓였다.
-저 둘은 신혼이냐? 진짜 눈꼴셔서.
‘얼마나 보기 좋아? 난 부럽기만 한데.’
-밥만 축내는 와꾸 별로인 친구가 없으니까 좀 심심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친구는 언제 오냐?
‘지금 일 배운다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을 거야. 오늘내일 분명 술 한잔하자고 찾아오겠지.’
-밥값은 하는 건지….
‘아마 그 이상을 하고 있을 거야. 실전에 더 강한 친구라서.’
“사장님. 회장님 일어나십니다.”
정다운이 주방으로 뛰어와 전해준 정보로 다행히 최만수와 장비서에게 잊지 않고 인사할 수 있었다.
“올 때마다 이렇게 나오고 그러지 말게. 요 백 짬뽕 생각나면 매일 올 수도 있어.”
“저희야 영광이죠. 매일 오세요, 회장님.”
“그럴까, 장비서?”
“다음에는 칠리 새우 사주시면 모시고 오겠습니다. 옆 테이블에서 먹는데 군침이….”
“이 사람이 내 요리보다 여기 서풍 요리가 더 맛있다는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하는건가?”
장비서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제가 또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라서요. 우리 애들하고도 와야겠습니다.”
“아까 그분들 말대로 나도 서인우 사장한테 배워야겠군. 얼마면 돼?”
“네?”
“하하, 으하하.”
최만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식당에 울리는 듯했다.
식당 입구까지 따라가 인사하는 서인우에게 최만수가 명함하나를 건넸다.
“좀 거칠기는 한데 일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니 잘 만나보게.”
“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뒤돌아서 가면서까지 장비서와 다음 메뉴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70대의 뒷모습이 저렇게 편할 수 있다면….
그건 누가 봐도 잘 살았다는 거겠지.
서인우는 자신의 70대에는 어떤 뒷모습을 하게 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구에서 보이는 식당 안의 모습은 다행히 모두 행복해 보였다.
음식을 먹는 손님들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직원들도 너무나도 즐겁게 웃고 있었다.
‘유재철, 빨리 끝내고 통화해봐야지.’
손에 들린 명함을 잠시 쳐다본 후 다시 주방을 향해 뛰다시피 들어갔다.
발걸음 하나하나 힘을 주며.
* * *
박정원 대표를 따라 새우면 공장을 찾은 이준형은 제대로 신고식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수고들 하십니다. 여기 이 친구는 우리 새우면 사업의 공동대표인 이준형 사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젊은데, 성공하셨네.”
“젊은 게 아니라 어리구만. 대학생?”
“제가 워낙 동안이라 어려 보여도 벌써 대학 졸업했습니다. 중화요리 고수 서인우와 서풍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새우면 작업을 맡은 공장의 한기영 사장이 그런 이준형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제품을 판매하려면 그 제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직접 경험해봐야 하는데, 그런 각오는 좀 되어있으려나?”
“물론입니다. 뭐부터 하면 될까요?”
박정원과 잠시 눈빛을 교환한 한기영이 씩 한번 웃어 보이고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다른 직원들이 저마다 고개를 돌리며 웃고 있었다.
이준형만이 진지한 표정에다 인중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우선 우리 제품은 소비자가 직접 만들어 먹는 식품인 만큼 위생 관리가 철저해야 해. 그 정도는 알지?”
“그럼요. 위생관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 식구가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야죠.”
“젊은 친구가 사고방식이 됐네, 됐어.”
“감사합니다.”
칭찬 좋아하는 이준형이 신나서 코까지 벌름거리며 한기영을 따라갔다.
“여기 보이는 이 기계부터 저기 보이는 기계까지가 새우면 작업에 들어가는 기계야.”
“아, 크기가 대단하네요. 하긴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작하려면 당연히 커야 하겠죠.”
“그렇지. 그래서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한기영이 고무장갑과 깨끗한 면으로 되어있는 수건인지 행주인지 모를 천이 잔뜩 들어있는 쇼핑백을 건넸다.
“이 천으로 기계 안을 깨끗이 닦으면 되는 거야.”
“여기부터 쩌기 있는 기계 전부요?”
“그렇지. 다 새우면 제작하는 과정에 필요한 기계들인데, 중간에 하나만 더러워도, 에이 절대 안 되지.”
말보다 고개가 먼저 끄덕여진 이준형이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아차차, 기계 청소 전에 바닥부터 대걸레로 깨끗이 닦아야 먼지가 안 들어가는데.”
이쯤부터는 뭔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이준형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나를 시험해보겠다는 것 같은데. 내가 또 악바리 근성 하면 서인우와 일, 이 등을 겨루는 사이라서 말이야. 한 번 속아주지.’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바닥을 깨끗이 닦아서 먼지 한 톨 없게 만들어놓고, 바로 기계 안을 닦아 최상의 근무 환경을 만들면 되는 거죠?”
“역시 젊은 친구라 이해가 빠르네.”
“그러니 저 나이에 벌써 사장이지.”
다들 고개 돌려 킥킥거리는 모습을 애써 못 본 척 이준형이 더 씩씩하게 답했다.
“지금 바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젊은 직원 하나가 한기영 사장과 박정원 대표의 눈치를 슬슬 보며 대걸레와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럼 다들 나가서 커피라도 한잔하십시오. 제가 반짝반짝 윤이 나게 청소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럴까 그럼?”
이준형의 표정을 읽은 박정원이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툭 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커다란 공장 안에 이준형 혼자 남아있었다.
물을 틀어 대걸레를 빡빡 빨아온 이준형이 공장 사람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라고 나름 챙겨입은 양복 재킷을 벗어 한쪽에 걸어놓았다.
넥타이도 와이셔츠 단추 사이로 집어넣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 용가리 통뼈가 한 번 한다면 제대로 하지. 다들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 기대하시라.”
쓱쓱 싹싹.
어릴 적 교실 바닥 청소했던 추억을 되살리며 줄 맞춰 청소하던 이준형이 잠시 허리를 펴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와씨, 공장이 왜 이렇게 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난 이준형이 다시 바닥을 가르며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동안 충전되어 있던 에너지가 있어서인지 바닥 청소는 금방 끝이 보였다.
문제는 기계 안 청소.
꿈틀꿈틀한 모양의 기계와 작은 구멍이 있는 기계 등 제각각인 기계를 청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전 한기영 팀장이 건네준 쇼핑백에 왜 이렇게 다양한 사이즈의 천들이 들어있나 이상하게 여겨졌던 부분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간신히 하나를 청소하고 나니 더 복잡하게 얽혀있는 기계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바로 도착한 공장에서 벌써 세 시간 넘게 청소만 하고 있었다.
다시 허리를 쭉 펴며 밖을 쳐다본 이준형은 벌써 어슴푸레 어두워지려 하는 하늘을 보며 불끈 쥔 주먹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준형. 너는 할 수 있다. 그동안 서인우 그 자식을 보며 배운 대로 하면 되는 거야. 매사 성의있게 성실히 임하다 보면 항상 좋은 결과가 따를지니….”
하지만 어깨도 허리도 끊어질 듯 아팠다.
다시 심기일전하며 마지막 기계를 닦고 있을 때 공장문이 열리며 한기영 사장을 비롯해 박정원 대표와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지금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굴 여기저기에 검댕이 묻은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말하는 이준형의 모습에 박정원이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한기영으로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직원에게로 번지듯이 퍼져나갔다.
“이준형 사장. 이거 마무리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
“딱 2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좋아, 그럼 20분 후에 삼겹살 먹으러 갑시다.”
“삼겹살이요? 그럼 15분 컷 하겠습니다.”
그 말에 또다시 공장 안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좋아, 껍데기 추가.”
이준형의 눈이 불판 위의 껍데기처럼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 * *
백화점 마감 시간이 지나 불 꺼진 홀에 혼자 남은 서인우가 최만수로부터 전해 받은 명함을 손에 든 채 핸드폰의 키패드를 누르기 시작했다.
누군지 얼굴도 보지 못한 남자, 유재철.
아빠와 안상훈 셰프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두 알아낸 사람.
최만수가 믿는 사람이라면 서인우도 안심이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듣게 될 사실들이 종일 서인우를 긴장시켰다.
삑삑삑.
키패드를 하나씩 누를 때마다 심장이 쿵쿵 같이 울리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신호가 울리는 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쉽게 종료 버튼을 누른 후 다시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단 한 번의 신호에 상대편 음성이 들려왔다.
-서인우씨?
“어떻게 제 번호를…안녕하십니까? 서인우입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소개받았을 거 아닙니까? 서인우 씨 번호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죠.
“아, 그렇겠네요. 오늘 최만수 회장님께 명함 받았습니다.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 제가 이 시간 이후 밖에는 불가능해서요. 우선 양해 말씀 먼저….”
-편하게 합시다. 그래서 오늘이요, 내일이요?
서인우는 훅 들어오는 유재철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빨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가능하시다면 지금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럼 30분 이내에 근처 가서 전화하리다.
“서로 얼굴을 모르니 전화를 주시면 제가….”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아니까. 조금 이따 봅니다.
말 그대로 거칠게 느껴지지만, 왠지 믿음이 가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가 어떤 진실을 꺼내놓을지 잔뜩 긴장한 채 가방에 잘 넣어둔 중식도 위에 다시금 손을 살며시 올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