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126화 (126/200)

제126화.

일주일간 [서풍 TWO]에는 그야말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게 변한 건 안상훈 셰프 와이프 박은선의 새로운 투입이었다.

예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나?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정확히 반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건지….

이준형의 난 자리는 전혀 티 나지 않고, 박은선이 들어온 이후 가게 분위기가 확 바뀐듯했다.

안상훈과 아내 박은선은 9시 30분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를 봤다.

똑순이 안유진은 가까이 사는 외할머니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이 박은선이 출근하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네, 오늘도 안전 운전하셨죠?”

박은선의 인사에 서인우가 반가움을 담아 물었다.

“이 사람 운전할 때는 완전 딴사람 같아요. 겁을 상실했다니까.”

안상훈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상시에는 겁이 엄청 많은 사람인데, 조금만 자리 있으면 쏙 들어가고, 속도도 많이 내는 편이고 말입니다.”

“사장님 덕에 제가 숨겨진 재능을 하나 찾은 것 같아요. 운전 너무 재미있어요.”

싱긋 웃어 보이고는 바로 앞치마를 장착하더니 시키지 않아도 테이블 위를 착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은선 언니. 테이블 다 닦고 정리 끝났어요.”

정다운의 말에 박은선이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나 얼마 만에 은선 언니라는 소리 들어보는지 몰라.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고마워, 정다운 씨.”

“그럼 보통 언니를 어떻게 부르는데요?”

“새댁, 아기 엄마, 아니면 유진이 엄마 그렇지 뭐. 좀 심할 때는 아줌마.”

마지막 아줌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는 박은선의 얼굴이 무척 슬퍼 보였다.

“점점 내 이름을 잃어가던 삶에서 다시 이름을 찾은 듯한 느낌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정다운도 윤지영도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오픈 시간이 조금 넘어가자 손님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짜장면 하나, 삼선볶음밥 하나 그리고 먹물만두.

오늘의 첫 주문이었다.

주방 모니터에 주문이 들어오자 안상훈이 바로 물을 올렸다.

“이렇게 큰 백화점 식당에 사장님 혼자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조금씩 더 빨리 오도록 해보겠습니다.”

이미 완벽하게 준비된 채소와 해물들, 심지어 다 빚어놓은 먹물 만두까지 아침마다 보는 모습이지만,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네, 다리 다 나으면 출근 시간 당길 거니까 각오하세요.”

팔팔 끓는 물에 잘 빚어놓은 먹물 만두를 넣자 까맣게 변하며 하나씩 동동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우는 그 옆에서 해물을 넉넉히 넣어 고소한 볶음밥을 만들었다.

띵!

벨 소리가 들리자 누구보다 먼저 달려온 박은선이 잘 익은 먹물 만두가 담긴 접시를 들고 손님 테이블로 향했다.

“주문하신 먹물 만두 나왔습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맛있게 드세요.”

식당에서 일한 경험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베테랑 포스가 느껴졌다.

젊은 여자 둘이 테이블 한가운데 만두를 잘 보이게 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진짜 새까맣네. 정말 맛이 상상이 안 되기는 한다. 얼른 먹어 보자.”

무슨 과학 해부실인 줄.

각자 앞접시에 만두를 가져가 반으로 잘라 속에 있는 내용물을 유심히 살피던 밝은 갈색 단발머리 여자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봐서는 속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

그러면서 동시에 반쪽짜리 만두를 입에 쏙 넣었다.

“이거 너무 맛있어. 지은아, 너도 빨리 먹어봐.”

지은이라 불리는 긴 머리 여자도 열심히 파헤치던 해부를 포기하고 만두를 입에 집어넣었다.

“이거 고기만두도 아니고 해물 만두인 건가? 에이, 뭔지 몰라도 너무 맛있다.”

띵!

그 사이 삼선볶음밥과 짜장면이 완성되었다.

이번에는 정다운이 달려가 완성된 음식을 여자 둘의 테이블에 먹기 좋게 놓아 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또다시 시작되는 촬영 타임.

짜장면 한 번, 볶음밥 한번, 나 한번, 너 한번.

그렇게 사진을 찍고는 윤기 자르르한 짜장면을 쓱쓱 비볐다.

“너무 맛있겠다. 천천히 다 먹어야지.”

둘이 젓가락과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여 가며 짜장면과 볶음밥을 먹어댔다.

“아침도 안 먹고 먹는데도 어쩜 하나도 안 느끼해. 너무 맛있다. 그치?”

“응, 나 여기 메뉴판에 있는 음식들 정말 다 먹어보고 싶다.”

“나도 나도.”

깔깔거리며 음식을 먹는 두 손님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박은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직원도 바뀐 겨?”

그 소리에 정다운이 후다닥 달려가 보니 뭔가 어색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아는 얼굴 여기 있네. 오늘 우리 시장 전체 수도관 공사 들어간다고 해서 일부러 왔어. 우리가 의리 빼면 시체여.”

이전 가게 단골이었던 전기 집 사장과 과일 집 사장이었다.

“잠시만요. 사장님 모셔 올게요.”

“냅둬. 손님도 많아 바쁘겠구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연신 주방 쪽으로 고개를 빼고 있는 모습이 서인우 얼굴도 한 번 봤으면 하는 듯했다.

“우선 메뉴 고르세요.”

눈치껏 주방으로 달려가 상황을 전한 정다운의 얼굴에도 반가움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사장님들 오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바쁠텐디 뭐허러 나오남? 우린 그냥 이 맛이 그리워서 온거여. 그리고…쩌거.”

“네?”

“저…쩌거 한쪽에 세워둬.”

전기 집 사장이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슬쩍 가리킨 곳에 작은 화분이 하나 놓여있었다.

[대박 성공 기원. 인물값 햐!]

문구마저도 딱 사장님이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신 것도 너무 감사한데… 저런 멋진 화분까지 진심으로 감사해요.”

“아녀, 막상 가지고 와보니께 식당이 겁나 고급스럽고 좋아서 좀 그려.”

서인우가 보란 듯이 걸어가 바닥에 놓인 화분을 카운터 옆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놓았다.

“천천히 메뉴 고르세요. 맛있게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그려그려, 바쁜디 어여 들어가 일봐.”

화분이 놓인 자리를 연신 쳐다보며 픽픽 웃던 두 사장은 이번에도 메뉴판은 보지도 않고 백 짬뽕 두 개를 주문했다.

화면에 반짝이는 메뉴를 보며 이미 예상했다는 듯 웃어 보이는 서인우를 안상훈이 힐끗 쳐다봤다.

“정말 단골인가 보네요. 이미 백 짬뽕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네, 정말 정겹고 고마운 분들입니다. 이거 안셰프님이 완성해주세요. 전 서비스로 양장피 하나 만들어 드리려고요.”

“최선을 다해 사장님 맛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멀리서 반가운 손님이 왔나 보군. 그럼 나도 실력 발휘를 해보지.

서인우가 중식도를 손에 잡자마자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오징어며 새우등의 재료를 손질하고, 채소 손질까지 마쳤다.

-저 인간 저러다 백 짬뽕에 침 떨어트리겠다.

그 말에 돌아보니 안 셰프가 넋이 나간 듯 서인우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냥 봐도 봐도 놀랍습니다. 중식도를 다루는 솜씨는 돌아가신 서동수 사장님보다 한 수 위이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신기한 기술까지 나오는지 정말….”

안상훈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봐도 나를 다루는 솜씨는 네가 한 수 위인 것 같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넌 이제 진정한 고수가 돼가는 건가?

‘다 사부 덕분이지.’

-어째 내 자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 씁쓸함이 느껴지는군. 나 가을 타나?

안상훈이 볼까 조심스러워하며 웃던 서인우가 그새 양장피를 완성해 접시에 가지런히 순서대로 담고 있었다.

띵!

완성된 백 짬뽕을 정다운이 가지고 나가자마자 서인우도 소스까지 작은 접시에 담아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거의 차버린 홀에 있던 손님들이 서인우가 직접 소스를 부어 섞어 주는 모습을 무슨 공연이라도 보듯이 쳐다봤다.

“이, 이건 뭐여? 우리는 백 짬뽕 한 그릇씩이면 되는디?”

“이건 저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뭐 이런 걸 다. 그럼 우리 쐬주 해야 하는디?”

“술 한잔하시겠어요?”

전기 집 사장이 잠시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 어제도 마셨는디, 오늘꺼정 마시면 진짜 맞아 죽을 겨. 그냥 요 양장피만 맛있게 먹을테니께 어여 들어가 일 봐.”

맞은편 과일 집 사장도 아쉬운지 침만 꼴딱 삼키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서인우 앞에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어! 회장님!”

항상 그림자처럼 같이 다니는 장비서와 최만수였다.

“잘 지냈나?”

“네, 언제 올라오셨어요?”

“어제저녁에. 자네랑 할 얘기도 있고 해서…우선 백 짬뽕 한 그릇 먹어야겠지. 장비서 자네는?”

“지난번에 전가복 사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냥 홀에 앉아서 먹겠다며 빈자리로 가던 최만수가 껄껄 웃으며 양장피와 백 짬뽕을 주문했다.

“어! 저 양반 텔레비전에 나왔던 사람 아녀?”

전기 집 사장이 최만수에게 다가왔다.

“여기 사장하고 중화요리 고수인가 뭐신가 뽑는 데 나온 사람 맞는디. 그거 떨어졌는디 여 와서 밥 먹는거유?”

방송에 나왔던 최만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장비서가 살짝 앞을 막으려 하자 조심스러운 눈빛을 보낸 최만수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알아봐 주시네요. 제가 그 대회에서는 떨어졌지만, 여기 서인우 사장하고는 친해졌습니다.”

“허긴, 배우는 데 나이차가 뭔 대수여. 기냥 바짝 엎드려서 여기 사장한테 잘 배워요. 진짜 실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께. 방송에서처럼 노익장의 힘을 보여줘 봐유.”

“네, 알겠습니다.”

계속 웃으며 대답을 다 해준 최만수가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하자 늦게 소식을 듣고 비서진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회장님. 연락을 미리 주셨으면….”

“누가 얘기했어? 조용히 밥만 먹고 갈 거니까 소란 피우지 말고 다들 돌아가 일 봐요.”

“그래도….”

장비서가 고개를 저어 보이자 그제야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후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놀란 듯 보고 있던 전기 집 사장과 과일 집 사장이 식사를 급히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계산햐.”

“맛있게 드셨어요?”

“여기 백 짬뽕이야 언제 먹어도 끼깔나제.”

“감사합니다. 양장피는 서비스였으니까 짬뽕값만 받겠습니다.”

“이거 팔아주려고 왔는디, 그런디….”

정다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하고는 바로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 윤지영이 정다운 옆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방금 자기한테 뭐라고 하신 거야?”

“풉!”

정다운이 최만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왜?”

“저 회장님 아무래도 조폭 두목 같다고, 우리 사장님한테 조심하라고 전해달래요.”

“뭐?”

분명 요리대회에서 본 얼굴인데,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다가와 허리 숙여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폭 대빵으로 보였나보다.

하긴 최만수가 이 백화점 회장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일이긴 했다.

그런 오해를 받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던 최만수가 요리를 완성해 다가오는 서인우를 한껏 반기는 얼굴로 쳐다봤다.

“회장님. 주문하신 전가복과 지난번 킵 해놓으신 양장피 나왔습니다.”

“아니,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소스를 부어 쓱쓱 빠르게 섞은 양장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톡 쏘는 겨자 향이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 바로 이런 느낌이었어. 봐봐, 장비서. 이전에 먹었던 것과 완전 똑같지 않나?”

“네, 우선 겉보기는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그럼 맛을 볼까요?”

장비서가 양장피를 최만수 앞접시에 덜어주고 바로 조금 가져와 입에 넣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대단해, 참 대단한 친구야. 자네.”

“감사합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아직 주방이 많이 바쁜가?”

“아닙니다. 바쁜 시간은 좀 지났습니다.”

“그럼 잠시 앉아보게.”

최만수의 얼굴이 금세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일 시킨 친구가 김형식 회장 조사를 했는데 말이야. 그 사람 악행의 시작이 유감이지만 자네 아버지 때부터 던데… 알고 있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