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김서원이 바닥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가느다란 목소리만 간신히 내보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아빠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긴 해도 사람을 해치는 일까지는 ….”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녀도 확신은 없는 걸까?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네, 조사하면 다 밝혀지겠죠. 단순 사고일 수도 있고요.”
이준형이 얼굴 가득 안쓰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뜨자마자 달려왔는데, 이렇게 시원한 해장국을 먹고 나니까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충전되는 느낌이에요.”
“언제든지 오세요. 앞으로 오래오래 함께할 식구가 되기로 약속한 것도 잊지 말고요.”
“고마워요. 오늘 하루도 힘내서 열심히 일할게요. 다들 파이팅입니다.”
김서원이 작은 두 주먹을 올려 보이고는 올 때보다는 한결 단정해진 머리를 쑥스러운 듯 만지며 유유히 사라졌다.
“제시카 씨. 안쓰럽다.”
“뭐가? 씩씩한데….”
“너 인마, 아까 아버지 얘기할 때 표정 못 봤냐? 부모는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닌데, 마치 자기가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주눅 들어 있잖아.”
‘나는 내 아버지 사고가 김형식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그때도 저 여자를 함께 꿈을 키워갈 식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술도 마시고, 운동도 몇 배로 더 했지만,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사부를 통해 들은 얘기들이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커피 마실 거지?”
“아, 커피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할 걸 그랬다. 죄지은 사람처럼 급하게 가버렸네.”
“우리 오픈 준비해야 하니까.”
“그래, 빨리 마시자. 두 여성분 오기 전에. 그리고, 나도 빨리 마시고 안 셰프님 모시러 가야하고.”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본 서인우가 주방으로 들어가 원두를 갈았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커다란 홀에 가득했던 시원한 짬뽕 향이 마법처럼 커피 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향 죽인다. 난 아아로 부탁해.”
아침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지만, 시원한고 알싸한 아이스 커피의 매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유리잔 가득 얼음을 채우고 진하게 내린 커피를 따르자 딸각거리며 얼음들이 빈자리를 채워갔다.
“마시고 바로 일어나야겠네?”
“응, 늦지 않게 가야지.”
“매일 힘들지 않냐?”
“전혀. 사실 난 안셰프님이 다리 다쳤을 때 정말 큰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너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하고, 어디서 안셰프님 같은 실력자를 구하나 해서 말이야.”
얘기를 들으며 잔에 맺힌 물방울을 냅킨으로 닦고 있던 서인우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준형이 너는 박정원 대표님과 함께 새우면 사업을 제대로 키워봐. 다음 주부터 안셰프님 출퇴근은 다른 방법을 생각 중이야.”
“무슨 방법?”
“며칠 전에 슬쩍 물어봤더니 안 세프님 와이프, 그렇니까 형수님이 면허증은 있는데, 운전 경력이 없다고 해서 어제부터 일주일 운전 연수 등록해드렸어.”
이준형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인우를 쳐다봤다.
“그럼 형수님이 운전해서 출퇴근을 시켜준다는 거야?”
“나중에 안셰프님 오시면 잠시 회의하고 결정하긴 할 건데, 너는 이제 새우면 사업을 해야 하니까 형수님이 같이 일하시면 어떨까 해서.”
“너 형수님 일자리 찾는다는 얘기 듣고 그렇게 생각한 거구나?”
서인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준형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니까 사업 열심히 해. 나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식구들한테 다른 곳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으로 보답해주고 싶어.”
“그 생각은 나도 마찬가지다. 걱정하지 마라. 새우면 이미 폭발적인 인기다. 내가 너 재벌로 만들어 줄게.”
“나 아니고 우리겠지.”
“그래, 우리. 그럼 사장님. 난 안셰프님 모시고 오겠습니다.”
남은 커피를 쭉 들이켜고 가게를 급히 빠져나가는 이준형의 뒷모습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제 속은 괜찮냐?
“그럼, 아빠의 백 짬뽕 국물이면 완전 끝장이지.”
-그런 것 같긴 하다. 네 눈빛이 달라졌어.
“응. 이제 내 인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
-오케이. 양배추 좀 더 썰어볼까?
“좋았어!”
여느 때와 같이 주방 전체에 경쾌한 도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다운을 시작으로 윤지영, 마지막으로 이준형과 안상훈이 도착했다.
“오늘은 오픈 전에 잠시 간단한 회의를 좀 하고 시작합시다.”
“회의? 오빠, 무슨 일 있어?”
“이제 한 주의 시작인 매주 월요일 오전에 짧게라도 회의 시간을 가지려 해. 마지막 주 월요일은 휴무니까 그 주는 화요일에 회의하고.”
서인우가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쳐다봤다.
“우리 [서풍TWO] 직원은 다 같은 식구니까.”
정다운과 안상훈의 얼굴이 살짝 상기된 듯 보였다.
“지난달부터 시작한 새우면을 이제는 박정원 대표님과 우리 서풍의 공동사업으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잘은 몰라도 그거 좋은 소식인 거죠?”
“네, 새우면이 잘 팔린다는 얘기고, 우리가 그 수익의 반을 갖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준형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이준형 사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새우면 사업으로 바빠질 것 같아서, 여기 안상훈 셰프님 형수님이 같이 일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안상훈이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서인우를 쳐다봤다.
“갑자기 아내한테 운전 연수를 등록해주신 이유가 이거였습니까? 유진이 때문에 밤에는 일하지도 못할 텐데요?”
“형수님이 운전해서 두 분이 같이 출근 하시고 유진이 집에 오기 전까지만 파트타임으로 일해 주시면 됩니다. 우선 오늘 댁에 가셔서 여쭤봐 주세요.”
안상훈의 표정이 무척 복잡해 보였다.
“일을 찾고 있던 우리한테는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사장님은 그러면 또 저녁 타임 사람을 더 구해야 하는데….”
“어차피 다음 달부터 일할 제 후임을 오후 시간으로 잡으면 되죠. 우리 오빠가 그런 계산은 다 했을 겁니다.”
“어젯밤에 아내가 우리 차는 아니지만, 자기 평생 운전할 일이 있을 줄 몰랐다며 잠을 설치는 걸 보고 정말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서인우가 안상훈 셰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수 열심히 받으시라고 꼭 전해주십시오. 안셰프님 이름의 차를 몰게 되는 그날이 멀지 않을 거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나도 이제 다리가 하나도 안 아파요. 지금보다 더 오래까지 일할 수 있습니다.”
“설마요. 어디서 개뻥을….”
정다운이 웃으며 툭 나온 말을 도로 집어넣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푸흡!”
다들 참고 있는데 결국 윤지영의 웃음이 터져버렸다.
한차례 신나게 웃고 또다시 각개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력 또한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듯 보였다.
* * *
온종일 서서 음식을 만들고 그릇 정리하느라 살짝 부어있는 발목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안상훈이 신이나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정말 같이 청소하고 문 닫는 거 보고 가도 된다니까요?”
“안셰프님. 이제 바쁜 시간 다 지난 거 아시잖아요? 빨리 댁에 돌아가셔서 가족회의 하셔야죠. 따님의 윤허가 떨어져야 형수님도 출근할 수 있으실 거 아닙니까?”
대답 대신 피식 웃고는 결국 탈의실로 들어가 앞치마와 셰프복을 벗어들고 주방을 나섰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다른 때와 달리 안상훈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준형 사장님. 우리 와이프가 같이 일하는 거 정말 민폐 아닐까요?”
“형수님은 식당 경험도 있으시고, 음식 솜씨도 워낙 좋아서 인우 그놈이 머리 쓴 거 같은데…안셰프님은 별로 안 땅기시죠?”
“네?”
“에이 솔직히 집에서 종일 보고 직장에서까지 와이프를 봐야 하는 건 별로지 않겠어요?”
“아, 그건 아닙니다. 내 아내가 힘들까 걱정이지 같이 있으면 커피라도 한 잔 챙겨줄 수 있고 좋죠.”
생각지 못한 대답에 이준형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방황했다.
“참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십니다. 어제 우리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뭐라고 답했는지 아세요?”
안상훈이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이준형의 답을 기다렸다.
“죽고 싶으면 그런 소리 떠들라고. 미쳤냐고 펄펄 뛰시던데요.”
오랜만에 긴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안상훈의 집 앞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길에 서서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 서 있던 안상훈이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생길 걸 대비해서 3층짜리 빌라의 1층에 살기 시작한 건 정말 탁월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도어락 뚜껑을 열어 딸아이 유진의 생일을 꼭꼭 눌렀다.
“아빠!”
문 여는 소리에 벌써 한걸음에 달려와 현관에 서 있는 유진이를 보니 아픈 다리로 종일 쌓였던 피로도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우리 유진이 오늘도 재미있게 보냈어?”
“그럼. 오늘 유치원에서 도훈이가, 내 짝꿍 도훈이 알지? 걔가 나랑 사귀고 싶다고 고백했어.”
뭘 해?
고백?
안상훈은 가끔 자기 딸이 유치원생이 맞는지 심각한 의문이 들곤 했다.
“그래서 우리 유진이는 고백을 받아줬어?”
“난 이미 고백한 남자가 있는데, 그러면 안 되지. 그래서 거절했어.”
그 고백한 남자는 분명 내가 아는 어른 놈일 거고, 차라리 도훈이가 나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훈씨. 말도 마. 도훈이가 오후 내내 간식도 안 먹고 울기만 한다고 도훈이 엄마 전화 왔었어.”
“우리 유진이가 뭐라고 거절했는데?”
“그냥 나는 결혼할 오빠가 있다. 너보다 키도 크고 눈도 크고 잘생기고, 무엇보다 짜장면을 끝내주게 만든다고 했어.”
“그랬더니 도훈이가 뭐래?”
“자기는 키도 계속 클 거고, 크게 뜨면 눈도 큰 편인데…짜장면을 만들지 모른다고 하더니 울더라고. 유치하게.”
여섯 살짜리한테 유치한 거면 도대체 어떤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딸의 심리 파악은 포기하고 아내 박은선에게 물었다.
“오늘 운전해보니까 어땠어? 할 수 있겠어?”
“자기야. 나 아무래도 운전에 소질 있는 것 같아. 오늘 처음 연수받는데, 진짜 잘한다고 칭찬받았어.”
“면허시험 볼 때는 무서웠다면서?”
“그때는 엄마가 되기 전이잖아. 여자가 애를 딱 낳고 엄마라는 타이틀을 쓰기 시작하면 무서운 게 없어지는 법이거든.”
옆에서 초코과자를 먹고 있던 안유진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물었다.
“엄마, 그러면 다 내 덕이라는 거네?”
“응? 그, 그렇지. 우리 유진이 덕에 엄마가 운전도 안 무서워졌고, 세상이 좀 만만해졌지.”
안상훈은 지금 아내가 하는 말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결혼 전에는 수줍음 많고 겁도 많았던 아내가 힘든 일도 많이 하고 유진이도 낳고 하면서 용감해졌다.
그런 아내한테 또다시 일자리를 권하는 게 맞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만약 어딘가에서 꼭 일해야 한다면 서풍처럼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상훈씨, 뭐 할 얘기 있구나?”
이제 눈만 봐도 속을 다 읽어버리는 아내 박은선이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유진이는 이제 과자 그만 먹고, 이 닦아야지.”
“딱 다섯 개만 더 먹고.”
“우리는 차 한잔 마셔요.”
슈퍼에서 세일해서 샀다는 대용량 현미녹차 티백을 꺼낸 박은선이 안상훈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서풍 젊은 사장님이 갑자기 운전 연수도 시켜주고, 뭐 있는 거지?”
“지난번 김밥 싸줬을 때 자기가 어디 취직하려 한다는 말을 얼핏 했거든.”
“그래서? 나 취직시켜준대?”
“혹시 나와 같이 서풍에서 일하면 어떻겠냐고 자기한테 물어봐 달라고 하더라고.”
박은선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꼼짝하지 않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운전해서 자기와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면 자기 출퇴근도 해결되고, 나도 돈을 벌게 되는 거네. 맞지?”
“사장님 생각은 그래. 유진이가 아직 어리니까 마감까지 같이하지는 못하겠지.”
“백화점이라 마감도 일찍이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유진이가 4시에 오니까 시간이 안 맞지.”
“그건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안상훈이 떨떠름한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가끔 마시던 녹차인데 오늘따라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
“자기는 어떻게 하고 싶어? 계약서 봐서 알겠지만, 6개월 후에 내 월급도 지금의 두 배야. 그러면 자기가 굳이 일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나도 젊을 때 벌어야지. 그래야 우리 유진이 영어학원도 보내주고 피아노도 가르쳐주지. 그리고….”
박은선이 안상훈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딱 10년만 열심히 일해서 해외여행 가자. 그 목표 하나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대답 대신 아내의 손을 더 힘주어 잡은 안상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 얼마 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