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형사들이 돌아가자마자 다시 회장실로 들어온 차성철과 김서원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형식을 바라봤다.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을 뿐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안상훈 셰프 사고 정말 아빠랑 관련 있는 거 맞아요?”
“네가 안상훈을 어떻게 알아?”
“어쩌다 알게 됐어요. 그것도 사고 난 날 병원에서 만났다고요. 그 사람한테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이 있는데…아니죠? 아빠가 한 짓 절대 아니죠?”
김형식이 꾹 다물고 있던 입에서 쩝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다. 내 사업 꾸리기에도 바빠. 이번 MS 백화점 입점 경쟁을 알고 저 사람들이 뭔가 오해를 한 게지.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고 있는 거라고.”
김서원의 표정이 바로 풀어지지 않았다.
절대 아니라고 자세히 설명하는 아버지 김형식의 말보다, 백화점에서 우연히 들은 구 과장의 말과 그 때 서인우가 보였던 표정에 더 믿음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버지의 말을 믿고 싶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안상훈의 예쁜 딸 유진이를 위해서, 그리고 서풍의 식구이고 싶어 하는 자신을 위해서.
“퇴근 시간 다 됐는데 셋이 저녁이나 하고 가지.”
“저는 다음에….”
“서원이 너한테 묻는 말 아니었다. 넌 무조건 같이 가고, 차 팀장 괜찮겠나?”
차성철이 뒤로 고개를 살짝 빼서 가로젓고 있는 김서원을 힐끗 쳐다봤다.
“오후에 특별한 스케쥴은 없습니다만, 부녀의 오붓한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같이 가. 비서한테 [일송정] 예약해놓으라 하고. 자리 정리하고 거기로 와.”
“네, 알겠습니다.”
“아빠, 저는 선약이…”
“분명 어제 저녁 같이 먹겠다고 했다. 잠시 앉아있어, 나랑 함께 나가게.”
포기했다는 듯이 김서원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나도 차 가지고 왔어요. 그럼 몇 시까지 가면 되는 건데요?”
“가까우니까, 내 차로 가. 식사하고 회사에 내려줄 테니까.”
“그럼 예약하고 바로 [일송정]으로 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새 입이 코보다 더 나온 김서원을 향해 까딱 고개를 숙여 보인 차성철이 회장실을 나갔다.
“아빠, 내가 엄마랑 셋이 저녁 먹자고 했지, 언제 저 남자랑 저녁 먹자고 했어? 왜 항상 아빠 맘대로야?”
“이 세상에 내 맘대로 못하는 일은 하나도 없어. 차 팀장 능력 있는 남자다. 가까워져서 나쁠 건 없어.”
“내가 요즘 지켜보니까 서인우 씨가 정말 능력 있는 남자던데, 아빠 말대로면 더 가까워져야겠네요.”
서인우 얘기를 꺼내면 분명 역정을 낼 걸 알고 있는 김서원이 일부러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뜻밖의 반응에 오히려 김서원이 더 당황했다.
“정말이요?”
“적을 알아서 나쁠 건 없다는 얘기다. 많이 가깝게 지내. 그러다 내가 필요할 때 정보나 제공해주던지.”
김서원의 두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손바닥이 허옇게 변할 정도로.
“가깝게는 지낼 거예요. 아빠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내가 여기 [만가복] 정보를 서인우 씨에게 제공해줄 수도 있는거죠.”
서인우라는 남자는 절대 그런 꼼수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단지 아버지 김형식에게 화가 나서 아무 말이나 던져버렸다.
“일어나자. 차 팀장 성격에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와 통화하는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는 김서원이 더 화가 났다.
뭔지 모르게 진 것 같은 느낌에 괜히 바닥을 발로 툭 쳤다.
‘이건 정다운씨 습관인데….’
갑자기 서풍 식구들과 술 한잔하고 싶어졌다.
그것도 미치도록.
아직 숨을 쉬는지 아가미가 벌어졌다 오므라졌다 하는 생선 대가리가 떡하니 올라가 있었다.
그 아래로 한 점 한 점 수놓듯 줄 세워 진열해놓은 싱싱한 생선회.
김형식이 자주 가는 회사에서 가까운 일식집 VIP룸 이었다.
대화하다 상대방 입에 아슬아슬하게 숨 쉬는 저 생선 대가리를 처박아도 아무도 모를 그런 은밀한 공간.
원하지 않아도 옆 사람 대화가 들리고, 다른 테이블에 놓인 음식도 흘낏흘낏 쳐다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좋아하는 김서원은 지금 이 방이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다.
겨자 향 강한 소스가 뿌려진 샐러드를 입에 넣자 김형식이 바로 테클을 걸어왔다.
“회 먹어라. 그런 걸로 배 채우지 말고.”
“나는 나대로 음식 먹는 순서가 있어요. 개취니까 먹는 것까지 간섭하지 마세요.”
“개 뭐라고? 어디서 그런 쌍스러운 말을…차 팀장은 방금 얘가 한 말 알아듣나?”
고개를 살짝 아래로 떨어트리고 웃고 있던 차성철이 작은 목소리로 간단히 설명했다.
“개인 취향이라는 말을 줄여서 개취라고 표현한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말 줄임이 워낙 유행이라서요.”
“개인 취향이라는 단어가 뭐 길지도 않구만 그걸 또 줄여. 다 게으르고 놀고먹는 놈들이 만들어 낸 거지.”
“그게 아니라…됐어요. 내 실수. 회가 싱싱하네, 날로 먹기 딱이네요.”
차성철이 소리 없이 계속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김형식이 차성철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차 팀장이 올해 몇이지?”
“서른둘입니다.”
“그렇군. 우리 회사에 막 들어왔을 때가 여기 서원이 나이쯤 됐었지?”
“네, 벌써 6년 차입니다.”
“6년간 쌓은 노하우를 우리 애한테 전수해줘.”
김서원이 인상을 쓰며 김형식을 쳐다봤다.
“아빠, 나는….”
“흥분할 거 없다. 지금 말고 나중에 말이야. 언젠가 필요하면….”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아버지 김형식의 반응에 짜증이 확 올라온 김서원이 술잔을 비우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진심으로 제 생각을 얘기했건만, 끝까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독한 술입니다. 천천히 드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은 몰라도 팀장님보다 잘 마실걸요.”
빈 잔을 다시 채워 보란 듯이 단숨에 넘겨 버렸다.
내일 해장은 [서풍 TWO]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또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 *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복잡한 머릿속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새벽시장에서 사 온 싱싱한 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늦게까지 마신 술과 매운 닭발의 여파는 싸르르한 위장 통증과 잦은 화장실 출입의 결과를 가져왔다.
-어디 아프냐? 얼굴색도 별로고, 화장실도 들락날락하고.
“어제 오랜만에 좀 많이 마셔서.”
-요리 시작한 후로 많이는 안 마시더니…백 짬뽕 재료 꺼내 봐. 시원하게 해장하고 시작하라고.
“사부.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평상시보다 배추를 더 많이 넣어 시원한 백짬뽕탕을 만들고 있는데,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직 오픈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인우야. 나 좀 살려줘.”
이준형이었다.
어그적 거리며 걸어오는 폼이 이준형도 화장실 좀 다녀온 것 같았다.
“어! 이거 백 짬뽕 맞지? 너 인마 정말 전생에 우리 부부였던 게 틀림없어. 밤새 화장실만 다섯 번을 넘게 갔다. 속 쓰려 죽겠다.”
“조금만 기다려. 배추 더 넣어서 시원하게 끓이고 있어.”
“넉넉히 만들어. 왜 안 들어오지?”
칼칼하고 시원한 백 짬뽕이 완성돼 막 그릇에 담으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또 들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아직 출근 시간 아닌데?”
“저…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서인우씨 항상 새벽시장 갔다가 일찍 출근하신다고 해서 와봤는데…”
“입구에서 못 들어오고 어슬렁거리고 있더라. 내가 간신히 사정해서 같이 들어왔어.”
굵은 웨이브의 긴 머리가 잔뜩 엉켜 산발이 된 김서원이 얼굴을 쏙 내밀고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김서원도 전날 많이 달린 것 같았다.
백 짬뽕을 한 사발 가득 담아 세 명 앞에 하나씩 놓고 해장을 시작했다.
“캬!”
“으억, 시원하다.”
“역쉬.”
백 짬뽕 한 모금에 감탄사 한 무더기를 쏟아내며 김서원과 이준형이 그릇을 들어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인우가 피식 웃음을 웃어 보였다.
“제시카 씨는 누구와 그렇게 마셨습니까?”
“아빠와 [만가복] 차성철 팀장이요. 원치 않던 저녁 식사라 과음 했더니 [서풍] 백짬뽕 밖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아빠와 [만가복]이라는 말에 잠시 표정이 굳었던 서인우가 마음을 가다듬고 김서원을 바라봤다.
“우리 식구 아니었나요? 술 마시고 식구끼리 해장하는 건데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두 분은 같이 마셨나 보네요?”
“네, 어제 둘이 좀 많이 달렸습니다. 그놈의 매운 닭발 때문에 화장실도 몇 번이나….”
이준형이 급하게 말을 끊었다.
“죄송합니다. 먹는데 드럽게….”
“아니에요. 매운 닭발 먹어 본 사람은 다 이해하죠. 서로 다른 곳에서 마셨지만, 이렇게 같이 해장하니까 좋은데요.”
여전히 머리는 산발을 하고도 환하게 웃고 있는 김서원을 보니 점점 더 김형식과는 다른 결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김서원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사부의 말이 떠올랐다.
‘아빠가 죽을 당시 옆에 있었던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가까운 친구라면 김형식과 최영만 둘 중 하나일 거라는 건 알겠는데…최영만을 의심해야 한다는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역시 해장에는 여기 백 짬뽕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다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제는 왜 그렇게 많이 마신 겁니까? 그것도 그 팀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랑.”
김서원이 차성철 팀장과 같이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어제 마신 술보다 더 속이 쓰린 듯 보이는 이준형이 물었다.
“난 내가 만든 [바램 인테리어] 사업이 너무 좋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여기 서풍 식구들과 같이 성장하고 싶고요.”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어린 애도 아니고 마음먹은 대로 하면 되지 않냐는 듯한 이준형의 질문에 김서원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가 수없이 설명하고 이해시켰다고 생각했는데…우리 아빠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식들도 무조건 따라주길 바라죠.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서인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김서원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래서 김서원씨 아버지가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김형식의 딸로 살아가는 거죠.”
“그 말은…?”
“네. 아빠는 내가 [만가복] 후계자로 살길 원해요.”
“네?”
이준형이 정말 놀랐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만가복] 후계자는 제시카 씨 오빠, 김원상 셰프 아닌가요?”
김서원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오빠도 그러길 바라지만, 아빠는 자식한테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이에요. 이것저것 계산해본 결과 오빠보다 내가 더 적임자라는 판단을 한거구요.”
이준형이 김서원을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테이블 모서리에 고정한 채 물었다.
“제시카 씨 생각은 어떤데요? [만가복] 회장 자리 욕심나지 않으세요?”
“아니요. 나는 아빠처럼 이미 충분한데 더 많은 걸 욕심내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하나밖에 없는 오빠한테 상처 주고 싶지도 않고요.”
조용히 듣고 있던 서인우가 고개를 들어 김서원의 눈을 쳐다봤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뜻을 거부하고 계속 우리와 함께한다면 김서원씨와 아버지의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는데,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점점 사이는 안 좋아지겠죠. 하지만, 이미 20년을 넘게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감정 없는 인형처럼 살았어요. 아버지 생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내 인생도 포기할 수는 없어요.”
이준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한 동감의 뜻을 밝혔다.
뭔가를 얘기하려던 김서원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왜요?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편하게 얘기해요.”
“어제 아빠한테 형사가 찾아왔어요.”
“형사가요?”
서인우와 이준형이 동시에 김서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상훈 셰프님 사고에 관해 조사할 것이 있다고….”
어두운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는 김서원과 달리 서인우의 눈이 아주 잠깐 반짝하고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김형식의 민낯이 하나씩 벗겨질 때가 된 것 같았다.